Dog君 Blues...
파이아키아, 이야기가 남았다 (이동진, 위즈덤하우스, 2020.) 본문
숫자에 대한 강박이 있다. 어려서는 지금보다 훨씬 더 심했다. 예를 들어, 중고등학교 때는 매일 점심시간 때마다 시간을 신경 쓰느라 식사를 제대로 못했다. 12시 34분 56초가 될 때를 직접 눈으로 확인해야 하루가 편안하게 느껴지기 때문이었다. 당시 나는 카시오 전자시계를 차고 있었는데, 그 시계의 숫자가 1부터 6까지 일렬로 늘어서는 순간을 기어이 봐야했던 것이다. 그걸 놓치면 기분이 상하게 되니, 혹시라도 못 보게 될까봐 12시 20분쯤부터는 서서히 긴장되기 시작해 계속 시계를 반복해서 체크해야 했다. (지금은 점심 잘 먹는다. 아예 시계를 차지 않은 지도 20년이 넘었다.) (43쪽.)
(...) 「희생」의 필름은 모두 17롤인데, 크기에 따라서 마치 탑을 쌓듯 정성스레 쌓아 올렸다. 그리고 아크릴로 원통형 케이스를 따로 만들어 그 위에 씌웠다. 아침마다 여기서 정수기 물이라도 떠다 놓고 기도를 올려야 하는 걸까. (파이아키아에 방문하시는 분들, 이 「희생」 탑에 동전을 던져 올리면 다시 이곳에 돌아올 수 있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고 하네요, 믿거나 말거나.) (57쪽.)
(...) 우리 반은 소피 마르소 파와 피비 케이츠 파가 정확히 반반이어서 쉬는 시간마다 서로 삿대질을 해가며 열을 올렸다. (2년 뒤 고등학교에선 아이들이 주다스 프리스트 파와 블랙 새버스 파로 나뉘어 싸웠다. 얘네들, 지금은 또 뭐로 편이 갈려 있으려나.) (73쪽.)
수석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기에 급하게 자료 검색을 한 후 구입에 나섰다. 수석의 다양한 종류 중에서 산과 골짜기를 축소한 듯한 모양의 돌인 산수경석이어야 했다. 영화 속에서 나온 수석이 산수경석이니까. 처음엔 수석을 전문적으로 판매하는 곳에서 사려고 했는데 여의치 않아 결국 오늘만큼은 평화로워야 할 중고나라 카페에 접속했다. 며칠을 계속 검색한 끝에 마침내 딱 맞아 보이는 수석을 발견하고 연락을 취했다. 지하철 2호선 성수역에서 직거래를 하기로 했다.
60센티미터 길이에 10킬로그램이 넘는 그 큰 수석을 카트에 담아 직접 가져오신 분은 죄송스럽게도 여든 가까워 보이는 할아버지셨다. 비닐 쇼핑백에서 수석을 꺼내시던 할아버지께서 대뜸 내게 "돌을 좀 아시냐"고 질문하셨다. (수석인들은 그저 심플하게 '돌'이라고 표현하는 듯 했는데, 그런 지칭에서 이상하게 전문가 포스가 넘쳐났다.) 전혀 모른다고 했더니 그럼 왜 구입을 하냐고 재차 물으셨다. 그런데 이 길고 이상한 수석 구입 사연을 지나다니는 사람들로 치이는 성수역 2번 출구 CU 앞 인도에 서서 수석 전문가에게 어떻게 간단히 이해시켜드릴 수 있단 말인가. 그냥 수석에 막 관심을 가지게 된 단계라고만 답변 드리고 서둘러 돈을 드린 후 (이젠 나도 수석인이니까) 돌을 받아 들었다. 정말 잘생긴 돌이었다. 90도로 몸을 꺾어 할아버지께 감사 인사를 드렸다. (125~126쪽.)
잭 니컬슨은 만화적인 측면을 살려 기괴하고 우스꽝스러운 면모를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조커를 연기했다. 히스 레저가 캐릭터라이징을 최대한 자제하면서 악이라는 관념 자체를 매우 흥미롭고도 일관된 톤으로 형상화했다면, 와킨 피닉스는 조커라는 캐릭터에 담겨 있는 역설적 비극성을 극적으로 살려낸 정서적 연기를 선보였다. 그리고 자레드 레토는...... 음, 이야기하지 말자. (사실 레토는 좀 억울하기도 할 것 같다.) (184쪽.)
MBC FM 「이동진의 꿈꾸는 다락방」 첫날 첫 곡은 비틀스의 「Across the Universe」였다. 이날 풀스 가든의 「Dreaming」과 채퍼퀴딕 스카이라인의 「Heart Shaped Pool」도 들려드렸는데, 때마침 감사하게도 도중에 깜짝 출연을 해준 유희열 씨가 방금 틀었던 채퍼퀴딕 스카이라인이라는 희한한 밴드명을 거론한 뒤 별 이상한 음악을 다 튼다고 장난스레 놀린 적도 있었다. (...)
SBS FM 「이동진의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첫 곡은 세상에서 가장 따스한 위로를 담은 듯한 콜드플레이의 「Fix You」였다. (...) 그날 킹 크레오소트 앤드 존 홉킨스의 「John Taylor's Month Away」도 선국했는데, 무인도에 딱 다섯 곡만 가져가야 한다면 포함시킬 수 있을 정도로 각별히 아끼는 곡이다. 한 달간 바다로 항해를 떠난 존 테일러란 사내도 그랬을 텐데, 세상일들로 속 시끄럽고 부대낄 때 이 노래를 들으면 그 모든 감정들이 다 부질없게 여겨지면서 일순 평화로워진다. (...) 「이동진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체가 세파에 지친 청취자들에게 딱 그런 느낌으로 다가가길 바랐기 때문이다. 평소 입버릇처럼 쓰던 말을 가져와 내가 직접 지은 '그럼에도 불구하고'란 프로그램명 역시 비슷한 생각이었다. 프로그램명과 관련된 회의를 하게 되어 '설마 이게 되겠어?'라는 마음으로 가볍게 제안했는데 곧바로 채택되어 놀랍기도 했다.
MBC FM 「푸른밤 이동진입니다」의 첫날 첫 곡은 더 보이 리스트 라이클리 투의 「Happy to Be Myself」로 골랐다. 나라서 짜증 나고 나여서 싫은 일들로 가득한 나날들 속에서, '나이기에 행복한' 시간을 만들어드리고 싶어서 선택했다. 듣고 나면 기운이 나고 주변이 밝아지는 곡이어서 더욱 적절했다. (...) (384~385쪽.)
(...) 말하자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수집하는 자와 수집하지 않는 자. 물론 그 둘 사이에 우열 같은 건 없다. 하지만 명백히 차이는 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나는 수집하는 자가 아니라, 수집하지 않을 수 없는 자다. (472쪽.)
교정. 초판 1쇄
532쪽 33줄 : 무한히 반복되는데 -> 무한히 이어지는데 (파이는 비순환무한소수이기 때문에 "반복"이라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다.)
540쪽 20줄 : 이것인 것 같아요 -> 이곳인 것 같아요 (꼭 틀린 것은 아니지만 문맥상 "이곳"이 더 어울리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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