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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톤 소녀, 마이티 모, (레이첼 스와비·키드 폭스, 학고재, 2020.)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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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톤 소녀, 마이티 모, (레이첼 스와비·키드 폭스, 학고재, 2020.)

Dog君 2021. 5. 21. 00:18

 

  내가 아는 한, 달리기보다 간단한 스포츠는 없다. 어떤 지점에서 또다른 어떤 지점까지 가장 빠르게 이동한다는 것 외에는 규칙이 거의 없다. 그런데 이 간단한 운동을, 불과 50년 전까지만 해도 여성은 할 수가 없었다. 800m 이상 달리면 자궁이 뒤틀릴 거라는 둥, 호르몬이 교란돼서 털이 부숭부숭 날 거라는 둥, 지금 봐서는 무슨 이런 개소리가 다 있나 싶지만, 그때는 그게 너무도 당연했다. 그런 편견이 무너진 것은, 편견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달렸던 러너들 덕분이었다. 1963년 여성 최초로 마라톤을 공식 완주한 메리 레퍼, 1966년 수풀에 숨어 있다가 몰래 마라톤을 달린 보비 기브, 1967년 진행요원의 제지를 뿌리치고 마라톤을 완주한 캐스린 스위처(그 사진, 다들 한번씩은 보셨을 거다) 등... 초기의 여성 러너들은 편견까지 뚫고 달려야 했다. 그러니까 여성 달리기의 역사는 러너가 각자의 위치에 편견과 맞서 싸우고 연대하여 어렵게 얻어낸 성취라는 거다.

  그리고 이 책 『마라톤 소녀, 마이티 모』는 캐스린 스위처가 보스턴 마라톤을 완주하고 2주 뒤에 곧장 여성 마라톤 세계신기록을 세웠던 13세 소녀, 모린 윌턴에 관한 이야기다. 뛰어 노는 것을 좋아했던 한 캐나다 아이가 달리기 선수가 되어 세계신기록까지 세웠다가 달리기를 그만 두고, 수십 년이 지나 다시 러너로서 세상에 나오게 되는 이야기다.

  이 책의 주인공은 모린이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모린보다는 그를 지지하고 격려했던 주변 사람들에게 더 감정이 이입된다. 아마도 나이가 든 탓일 거다. 세상에 불만도 많았고 박탈감도 강했던 예전의 나였다면 달랐겠지. 하지만 이제는 조카와 친구네 아이들을 보며 박탈감보다는 책임감을 더 느끼는 때가 된 거 아닌가 싶다.

ps. 책 귀퉁이를 플립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편집자의 센스도 무조건 칭찬받아야 한다.

 

  여자 달리기 역사의 대부분은 논쟁과 협박 편지, 법정 소송으로 얼룩져 있다. 수백 년 동안 여자는 장거리 달리기에서 배제되었다. 의사들은 달리기가 여성 건강에 위험하다는 허튼 소리를 남발했다. 그들은 여자가 몇 킬로미터를 안간힘을 쓰고 달리면 생식 계통에 손상을 입혀 불임이 될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장거리 달리기가 여성스럽지 않다고 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땀을 흘리거나 육체적으로 힘든 일을 하는 건 여자로서 부적절한 일이라고 했다. 그래서 달리는 여자는 자주 조롱에 시달렸다. (...)
  그러나 서서히 분위기가 바뀌었다. 2010년 무렵에는 남성보다 훨씬 많은 여성이 장거리 달리기 결승선을 넘었다. 2016년에는 도로 경기에 참가한 남자는 5백만 명 남짓이었지만, 여자는 7백만 명이 넘었다. 더 빨리 더 멀리 뛰고 싶어 한 여성들이 모욕과 공개적인 항의, 뉴스 보도의 중상모략에 맞서 달리며 용감하게 규칙을 깨뜨린 덕분이었다. (...)
  그야말로 혁명가들의 역사이고, 그들 모두 역사의 혁명가들이다. 하지만 달리기 세계에는 우리가 지금 그 어적을 기리고 있는 여성 혁명가들 말고도 잊힌 혁명가들이 있다. (19~21쪽.)

 

  1964년에 여자는 달리기를 거의 하지 않았다. 달리기 팀에 가입하는 경우도 드물었고 경기에 나가는 경우도 드물었다. 사람들은 달리기를 하는 건 숙녀답지 않다고 생각했다. 여자는 땀에 젖거나 기진맥진하거나 숨을 헐떡이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
  모린은 이런 사정을 전혀 몰랐다. 집에서 오빠들이 하는 건 전부 했다. 부모가 그러라고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모리와 작은오빠 댄은 똑같이 발이 빨랐고 빛나는 파란 리본을 갖겠다는 열망이 있었다. 모린의 부모는 대안을 찾아보지도 않고 모린을 주저앉히려 하지 않았다. 수많은 소녀들의 꿈을 깨뜨린 사회의 나쁜 생각으로부터 딸의 파란 리본 꿈을 지켜 주기 위해 방패처럼 행동했다. (39~40쪽.)

 

  조용한 노스요크에서 달리기의 꿈을 품은 소녀들이 침실이나 앞마당을 빠져나와 성지 순례처럼 얼헤이그 트랙을 찾아오기 시작했다. 마그 로빈슨, 낸시 베일리, 에바 반 바우가 팀에서 달리기를 시작했다. 데비 워랄도 가입했다. 이들은 부모의 직업도 배경도 저마다 달랐다. 하지만 모두 공통점이 있었다. 이들은 달려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세상에서 '빨리' 달리고 싶은 사람들이었다. 달리기를 할 수 있는 곳이 갑자기 나타나자, 입소문이 빠르게 퍼졌다. (82~83쪽.)

 

  언론의 주목을 끌기 위해 겉모양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인 육상 클럽도 있었다. (...)
  1964년 4월 20일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잡지 표지에는 이 클럽 소속 단원 세 명의 사진이 실렸다. 모두 풍성하게 부풀린 머리 모양을 하고 입술에는 반짝이는 붉은 립스틱을 바른 모습이었다 (...)
  진짜 운동선수라기보다는 관능미를 뽐내는 모델 팀처럼 보이는 이 클럽이 전국적인 주목을 끌었다는 사실은 다른 여자 육상 선수들에게 깊은 마음의 상처를 입혔다. (122~123쪽.)

 

  모린은 미리 구상했던 계획을 완벽하게 실행에 옮겼다. 1.2킬로미터까지는 캐시와 로베르타가 선두를 다투며 속도를 올리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러다가 마음을 굳게 먹고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1.6킬로미터를 지나면서 캐시를 추월했다. 두 눈을 로베르타의 짧고 검은 머리에 고정했다.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점점 더 가까워졌다. 이제 모린의 눈에는 검은 머리 가닥은 더 이상 보이지 않고 나무와 길 그리고 저만큼 결승선이 보였다. (132쪽.)

 

  그가 임무를 수행하느라 얼마나 오래 달렸는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대단히 고통스러운 여정이었던 것만은 틀림없다. (...)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는 비틀거리면서 목적지인 아크로폴리스에 들어가 "네니케카멘Nenikehkamen!"이라는 단어 하나를 간신히 내뱉었다.
  "우리가 이겼다!"라는 고대 그리스어였다.
  그 말을 뱉은 후 그는 쓰러져 숨을 거뒀다. 이 최초의 마라톤은 한 사람의 목숨을 앗아 갔다. (149쪽.)

 

 

  소녀는 왼쪽으로 돌아 스틸스가로 접어들었다. 나무 말뚝에 붙은 작은 희색 표지판에 '마라톤 결승점'이라고 쓰인 게 눈에 들어왔다. 모린의 머리카락이 더 높이 팔락이고, 모린의 팔꿈치가 바람을 가르며 목까지 솟구쳤다. 소녀는 전력을 다해 질주했다. 결승선을 400미터 앞둔 도로변에 서 있던 모린의 오빠 고드가 모린과 발을 맞추어 뛰면서 동생의 의욕을 북돋아 주었다.
  결승선을 향해 나는 듯이 달려가던 그때, 모린이 모르는 두 가지 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하나는 그가 밀드레드 샘프슨이 낸 3시간 19분 기록을 깰 만큼 빠른 속도로 달렸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가 캐나다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마라톤을 완주했다는 것이었다.
  모린이 알고 있는 건 오직 한 가지, 결승선이 몇 발짝 앞에 있고 이제 남은 힘을 죄다 끌어 모아 그 선을 넘을 거라는 것이었다. 모린은 힘차게 내달렸다. 그리고 서서히 속도를 줄이다가 멈춰 섰다. 그리고 깊게 숨을 몰아쉬었다. (204~205쪽.)

 

  달리기 경기에 나간 사람은 다른 사람들 곁을 달리지만, 사실 달리기는 과거의 자신과 벌이는 경쟁이다. 하루 전의 자신, 한 달 전의 자신, 1년 전의 자신과 겨루는 싸움이다. 모린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경기 출발선에 선 모린 옆에는 늘 과거의 모린이 서 있었다. 모린은 어제도 그저께도 그끄저계도 과거의 자신과 함께 달렸다. 모린은 과거의 자신이 어떤 모습인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슨 감정을 느끼는지, 얼마나 빨리 경기를 끝내는지 알고 있었다. 무엇이 자신을 흔들리게 하고 무엇이 자신을 강하게 만드는가를 잘 알고 있었다. 과거의 자신을 꺾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빠삭하게 알고 있었다.
  달리기 실적이 좋아지는 것은 모린의 기량이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는 뜻, 모린이 과거의 자신을 조금씩 추월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건 단순히 은유적인 표현이 아니다. 달리기는 한마디로 과거의 자신을 이겨야 하는 운동이다. (253~2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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