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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이브 취향 (아를레트 파르주, 문학과지성사, 2020.)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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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이브 취향 (아를레트 파르주, 문학과지성사, 2020.)

Dog君 2022. 5. 7. 20:38

 

  사료를 물리적으로 대하는 태도에서 시작해서, 사료를 역사학적으로 대하는 태도에 대한 이야기까지 이어진다. 아카이브 작업을 직업의 일부로 삼은 역사학 연구자라면 누구나 공감할만한 책이다. 대중적으로 반향을 얻을만한 책은 아니지만 사료 앞에 섰을 때의 막막함을 느껴본 (즉, 글쓰기의 고통에 시달려본) 역사학 연구자에게는 깊숙한 공감을 얻을만하다.

 

  한여름에 만져도 얼음처럼 차갑다. 눈이 해독하는 동안 손은 점점 얼어붙어 간다. 손끝은 양피지 아니면 래그 페이퍼의 차가운 먼지로 점점 검어진다. 꼼꼼하고 가지런한 글자들로 차려입었지만, 미숙련자의 눈으로는 거의 해독 불가능하다. 열람실 책상에 등장할 때는 대개 두툼한 종이 뭉치의 모습을 하고 있다. 허리 부분은 가는 끈으로, 아니면 굵은 띠로 묶여 있고, 모서리 부분은 세월에, 아니면 쥐들의 이빨에 갉아 먹혀 있다. 귀중 자료(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이 값진 자료)이자 손상 자료이니만큼, 끈을 끄를 때는 가벼운 접촉이 결정적 훼손을 초래할 수 있음을 염두에 두고 천천히 끌러야 한다. 이런 형태로 보관된 이래 한 번이라도 끈이 끌러진 적이 있는지 없는지는 한눈에 알아볼수 있다. 끝이 끌러진 적이 없는 종이 뭉치의 가장 큰 특징은 단정한 겉모습이 아니라(지하 서고에서 수해를 입거나 전쟁 등의 참사를 겪은 적이 있을 수도 있고, 냉해나 화재를 당한 적이 있을 수도 있다), 먼지가 겉면에 고르게 눌어붙어 있다는 점이다. 세월 속에 내려앉은 차가운 회색 껍질. 그 먼지에 남은 유일한 흔적은 종이 뭉치의 중간 부분을 허리띠처럼 오랜 세월에 걸쳐 서서히 조여온 끈의 허연 자국이다. (7~8쪽.)

 

  18세기 형사사건 아카이브는 다른 어떤 책이나 소설보다 많은 등장인물로 북적인다. 이름은 알아도 어떤 사람인지는 전혀 알 수 없는 등장인물들의 북적임이 작업자에게는 오히려 큰 고독감을 안겨준다. 아카이브가 작업자에게 일찌감치 안겨주는 충격적 모순이 바로 그것이다. 아카이브는 한편으로는 해일처럼 작업처럼 덮쳐오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렇게 압도적이라는 점 때문에 오히려 작업자를 고독하게 한다. '생동하는' 존재들이 압도적으로 덮쳐올수록 그들을 모두 알아보고 역사로 써내는 것은 도저히 가능할 것 같지 않다. 무수한 흔적들... 모든 작업자의 꿈이기는 하다(흔적에 목마른, 고대사 연구자들을 생각해보라). 흔적의 무수함 앞에서 작업자는 한편으로는 멈칫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매료되어 다가간다. (22~23쪽.)

 

  역사는 소설이 아니다. 과거의 삶들을 글로 되살리기 위해 아카이브를 선택했다면 픽션을 쓰려고 해서는 안 된다. 잊힌 삶들, 정치·사법 체계에 짓눌린 삶들이 인정받아 마당하다면 그 삶들을 제대로 인정할 방법은 역사를 쓰는 것뿐이라는 말을 해보고 싶은데, 그런 말을 거들먹거리는 느낌 없이, 역사소설을 무시하는 느낌 없이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정치 문건 행상 죄로 바스티유에 수감된 죄수가 속옷 한 조각을 찢어 아내에게 편지를 쓴 다음 세탁부에게 부디 편지를 전해달라는 부탁을 남겼다면, 역사를 쓸 사람이 유념해야 하는 일은 그를 소설의 주인공으로 만들지 않는 것이다. 그를 주인공으로 등장시킴으로써 수많은 주인공들 중 하나로 변질시킨다는 것은 그를 배신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저자의 꼭두각시라는 것이 주인공의 가장 특징적인 위상 중 하나임을 고려한다면 더욱 그렇다.
  바스티유에 수감됨으로써 아카이브에 특별한 흔적을 남긴 이 남자는 누군가의 상상이 낳은 꼭두각시가 아니라 엄연한 자율적 주체다 그의 존재가 깊이와 의미를 얻으려면 그를 주인공으로 등장시키는 소설이 아닌 이야기, 그를 역사의 주체로 복원할 수 있는 이야기, 그에게 말과 글을 빌려준 사회에서 펼쳐지는 이야기가 필요하다. 그에게 '생명'을 불어넣으려면, 허구의 우화를 쓸 것이 아니라 그를 아카이브에 잡아넣은 상황들을 가시화하는 글, 그런 상황들을 둘러싼 일상의 어둠을 최대한 정밀하게 세공해내는 글을 써야 한다. 헝겊 편지로 아카이브에 작은 흔적을 남긴 바스티유의 죄수, 그는 특별하고 자율적인 존재이면서(죄수가 되었다고 해서 특별함과 자율성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역사가 대화 상대로 삼아야 하는, 글로 남겨진 이성 존재un être de raison다. (97~98쪽.)

 

  다들 알다시피, 과거에 있었던 일들에 언제나 똑같은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아카이브에서도 배울 수 있는 교훈이다. 아카이브라는 약한 기억은 역사가가 주제를 선택하고 논거를 발견하는 데 필요한 자료일 뿐이다. "한 주제를 고찰하는 역사가는 그 주제의 고찰에 필요한 역사를 구축해야 한다. 그런 구축 작업에는 다른 분과학문들도 필요하다." 저절로 의미화되는 아카이브란 존재하지 않는다. "자료가 말해줄 수 있는 것은 자료를 작성한 사람의 생각을 벗어날 수 없다. 다시 말해 자료는 자료 작성자가 무슨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했는지, 무슨 일이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무슨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는지, 거기까지밖에 말해줄 수 없다. 좀더 야박하게 말하자면, 자료는 자료 작성자가 자기 생각이라고 생각해주기를 바랐던 것까지밖에 말해줄 수 없다. 역사가가 아카이브 작업에 착수해 의미를 읽어내가까지 아카이브에는 아무 의미도 없다는 뜻이다. 아카이브에서 발견된 사실이든 다른 곳에서 발견된 사실이든, 역사가가 어떤 사실을 어떻게든 이용할 수 있으려면 일단 그 사실을 자료화해야 한다. 얄궂은 표현을 쓰자면, 그 사실은 처리 과정을 거쳐야 한다." (116~117쪽.)

 

교정. 제1판 제3쇄

86쪽 1줄 : 그럼 있다 보세 -> 그럼 이따 보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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