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g君 Blues...
중일전쟁 (래너 미터, 글항아리, 2020.) 본문
적어도 탕수육에게 중일전쟁은 역사의 공백처럼 남아있습니다. 중고등학교에서 배웠던 중국근현대사는 1911년 신해혁명으로 끝났고, 이후 독립운동 과정에서 몇 차례 등장하다가 1949년 공산주의 혁명과 뒤이은 한국전쟁으로 다시 제 시야에 들어오기 때문에 신해혁명부터의 40여 년간 군벌의 할거와 중일전쟁에 대해서 제가 아는 것은 극히 적습니다. 그나마 읽은 책도 『장개석은 왜 패배하였는가』와 『왕징웨이 연구』 정도입니다. 그런데 하필 두 책이 국공내전에서 국민당의 패인을 분석하거나 국민당 출신의 괴뢰정부 수반인 왕징웨이를 다룬 탓에 중일전쟁 과정에서 국민당의 역할에 대한 저의 인상은 극히 부정적입니다. 마오쩌둥이 이끄는 공산당군에게 희대의 역전패를 당한 것도 모자라 대만으로 넘어간 후에는 2.28 같은 짓거리나 하는 녀석들 정도였죠.
하지만 래너 미터는 약간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분열된 중국을 이끌고 공산군과 경쟁하며 일본군에 맞선 것만 해도 중일전쟁에서 국민당의 역사적 의의는 충분히 높이 살만하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국민당이 8년간 일본군에 끈질기게 맞선 덕에 일본군의 전력이 분산되었다는 것 역시 인정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일본군은 동남아시아(와 태평양)에 더 많은 전력을 투입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죠. (이 책의 원제인 '망각당한 연합군Forgotten Ally'은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물론 저자 역시 (지금까지 국민당의 문제로 지적되었던) 국민당의 부패와 무능을 간과하지 않습니다. 전쟁 수행을 명분으로 국민당이 농민층에게 가혹한 현물세를 요구한 것도 엄연한 사실이구요.
중일전쟁에서 국민당의 역할을 강조하는 저자가 정말로 아쉬워하는 것은, 중일전쟁을 계기로 국민당과 공산당 모두 전체주의의 길로 갔다는 사실입니다.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양측은 각각 상대방과 일본을 절대적인 적으로 상정할 수 있었고, 이 과정에서 중국 사회의 다원성은 사라졌다는 것이 저자의 지적입니다. 여기서 한국전쟁을 치른 우리나라가 떠오른다면 좀 과한 상상력일까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탕수육은 이 시기 역사에 대해 문외한인지라 중일전쟁의 전개과정을 차분히 살펴보았다는 것만으로도 꽤 즐거운 독서였습니다. 국민당의 역할을 새삼 강조한다는 문제의식도 중요하지만 중일전쟁의 경과를 정리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이 책은 꽤 많은 독자에게 유익할 것 같습니다.
덧. 다만 번역이 좀 어색한 부분이 여럿 눈에 띕니다. 특히 마지막 장은 좀...
1931년 일본군의 만주 침략으로 분위기는 완전히 바뀌었다. (...) 양차 대전 사이에 우드로 윌신의 국제주의 원칙은 아시아에서 일본의 팽창을 누그러뜨렸다. 그러나 1929년 세계 대공황은 일본을 경제 위기에 빠뜨렸고, 전체주의와 적극적인 제국주의의 길로 들어서게 했다. (...) 1931년 9월, 이시와라와 이타가키의 지시를 받은 관동군은 현지 주민들이 부패한 지방 군벌 장쉐량에게 반란을 일으켜 일본의 우호적 지원을 받는 독립국가 만주국滿洲國을 세웠다고 선언했다. 물론 이런 주장을 사실로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 점령당한 만주의 피란민들은 장제스에게 일본에 맞서기를 요구했지만, 그는 일본에 공식적인 항의를 했을 뿐이었다.
(...) 그는 자신의 군대가 전 일본 제국군은 물론, 관동군에 맞설 역량도 안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 만주에서 망명한 중국인들은 동정을 호소했지만, 1930년대 중반 중국인들에게는 전쟁 열의가 거의 없었다. 중국은 지속되는 경제 위기를 포함해 그 밖의 위기들에 대응해야만 했다. 지정학적으로 분리되어 잇는 만주는 중국의 핵심 문제가 아니었다.
(...)
1931년 장제스는 사방에서 압력을 받았다. 왕징웨이와 또 다른 혁명 원로이자 광둥성의 보수주의자인 후한민 등 국민당 내 남부 출신들은 여전히 장제스에 반대했다. 장시성에서는 공산주의자들이 근거지를 세우는 중이었다. 일본과의 싸움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점점 군국주의화되어가는 도쿄 정부는 국민정부가 일본에게 '불성실'하다는 꼬투리를 잡을 기회만 노렸다. (...)
그러나 일본의 점령에 저항하지 않겠다는 장제스의 결정은 심각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반대자들에게는 더 많은 명분을 제공해주었다. 1932년 2월, 상하이에서 중국 노동자와 일본 승려들 사이에 발생한 싸움은 급작스레 확대되었다. 일본 해군 사령관 시오자와 고이치塩沢幸一 소장은 그 기회를 틈타 중국에 사과와 배상뿐만 아니라 상하이의 반일 시위자들의 진압까지 요구했다. (...) 공개적으로 장제스는 타협을 제안했지만, 암암리에 제19로군 사령관 차이팅카이蔡廷鍇에게 일본군에게 반격하라고 지시했다. (...) 3주 동안 중국은 1만4000명, 일본은 3000명의 사상자를 냈고, 시민들은 1만 명 이상이 사망했다. 결국 쌍방은 정전협정을 맺었다. 상하이에서 중국군의 활동 범위를 제한한 양측의 합의는 중국인들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67~70쪽.)
난징 정부는 신중하게 전쟁 준비에 착수했다. 주목할 만한 활동은 1932년 11월 29일 국방계획위원회의 설치였다. 이 기구는 채탄, 철도 기반 시설, 농작물 경작, 전기 생산과 금속을 비롯한 분야에서 중국의 능력이 어느 정도 되는지 철저하고 상세한 조사를 진행했다. (...) 마오쩌둥 시절 중국의 특징이었던 계획경제의 씨앗을 처음 뿌린 쪽은 일본의 위협에 자극 받은 장제스 정권이었다.
또한 장제스는 중국 안보가 무력에 달려 있음을 깨달았다. (...) 19345년 장제스는 새로운 군사고문단장으로 독일에서 한스폰 제크트 장군을 초빙했다. (...) 전체적으로 국민정부의 군사 개혁 목적은 (일본처럼) 징병제로 운영되면서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고, 잘 훈련된 중국 중앙군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1930년대 중반까지 약 8만 명이 독일식 훈련을 받았다. (71~72쪽.)
(...) 1937년 3월, 장제스의 오랜 친구이자 대일 유화파였던 장췬張群이 국제사법재판소 재판관을 역임한 왕충후이王寵惠의 뒤를 이어서 외교부장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대일 강경 노선을 지지했다. 중국의 분위기가 바뀌었다는 소식이 일본으로 흘러들어가자 일본 대중은 온건한 하야시 정부를 향해 불만을 드러냈다. (...) 1937년 6월 4일, 하야시 내각은 끝장났다. 새로운 정부는 고노에 후미마로를 총리로 지명했다. 강경파인 히로타 고키広田弘毅가 외무대신이 되었다. (...)
중국과 일본 어느 쪽도 미처 깨닫지 못했지만, 제2차 세계대전은 이미 아시아에서 시작되었다. (82~83쪽.)
오랜 세월 중국인들은 피란 여행을 경험했다. 역대 정복 왕조들은 자신들이 지나가는 길목에 있는 수많은 피란민을 뿔뿔이 흩어지게 했다. 그러나 20세기에 와서 처음으로 중국 중심부의 광대한 거리를 빠른 속도로 가로질러서 이동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중국인들의 지리적 상상력을 바꾸어 놓았다. 대규모의 인원이 광대한 지역을 이동한 경험은 향후 수십 년 동안 이 나라에 형성될 민족의식을 불어넣는 데 기여했을 것이다. (...)
적에게 부역하거나 한간韓奸(중국에서 친일 협력자를 가리키는 말―옮긴이)은 더 이상 같은 중국인이 아니며 뿌리 뽑아야 할 대상이었다. (...)
전쟁은 중국인들이 갑작스럽게 국가를 인식하게 만들었고 국민의 정체성을 한층 다급하고 중요한 일로 여기게 해주었다. (...) (142~143쪽.)
한편으로 전쟁은 또한 예전 같으면 중국에서는 결코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규모의 사회적 동원을 실현시킬 기회이기도 했다. 이때부터 군중 동원은 보편화되기 시작했다. 1950년대의 토지개혁운동부터 지주들에 대한 공개 폭력과 살해, 문화대혁명 당시 교사와 의사에 대한 의례적인 공개 고문에 이르기까지, 마오쩌둥 시절의 중국에서 끝없는 사회운동은 항전 시절의 관행에 뿌리를 두고 있었으며 사회적 무관심과 불신감을 품고 있던 대중을 광신자들로 바꿔놓았다. (144쪽.)
중일전쟁사에서 1938년 말 우한이 함락된 뒤 1941년 말 진주만 공격까지 3년의 시간은 얼핏 보기에 지리한 교착 상태로 보일지도 모른다. (...) 전쟁의 성격은 공격에서 방어로 바뀌었다. 전쟁 첫해와 같은 격렬한 전투는 줄어들었다. 그 대신, 중국의 운명을 좌우하는 것은 변덕스러운 동맹관계, 비밀 외교, 앞으로 자신들의 진로를 영원히 바꾸게 되는 사회적인 변화였다. 변화의 중심에는 사회복지라는 새로운 발상이 있었다. 전통적으로 중국에서는 국가가 인민의 일상적인 복지에 직접 관여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이제는 전쟁 상황 속에서 새로운 체제들이 서로 경쟁해야 하는 처지였다. 국민당과 공산당은 국가가 인민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하는 만큼 인민 또한 국가에 더 많은 것을 요구할 수 있음을 증명해야 했다. 한편, 친일 괴뢰 정권들은 자신들의 새로운 주인이 중국의 오래된 수많은 문제에 직면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줄 참이었다. (206쪽.)
장제스 정권이 허난성의 기근에 마땅히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실은 틀림없다. 곡물세를 현물로 전환한 점, 구호를 위해서 식량 대신 지폐를 운송하여 실패를 자초한 점, 부정부패와 같은 정부의 직접적인 조치가 초래한 상황은 충칭의 정책 결정권자들에게 책임이 오롯이 돌아갈 수밖에 없다. (...) 그러나 장제스는 (...) 그를 뒷받침하는 세계 제국의 지원도 없었을 뿐더러, 인도처럼 전란과는 무관한 대륙을 갖고 있지도 않았다.
(...) 부패와 무관심, 냉담함은 하나같이 나름의 역할을 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장제스가 할 수 있는 더 나은 선택은 없었다. 영은 투기와 사재기가 "현지 주민들이 국민정부를 적대시하게 만들었으며, 농촌 민심이 공산당 쪽으로 돌아서는 데 일조했다"라고 인정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재정적 조치로 곡물을 징발한 것은 전쟁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서 불가피한 선택이었으며 정부의 자금 확보를 위한 수단 중 하나였다"라고 주장했다. 국민정부가 항전을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은 곡물세 덕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대가를 치른 이들은 시어도어 화이트가 목격했듯이 허난성의 들판에서 죽어가던 농민들이었다. (334~336쪽.)
진주만 공격 이후 중국은 외부와 한층 더 고립되었고 군사적·경제적 위기가 심화되었다. 국민당은 자신들의 통치 구조와 사회 기반을 강화하기에 급급했다. 또한 충칭이 약화된 것을 이용해 공산당과 난징 정권(왕징웨이)은 경쟁 체제의 구축에 나었다. 세 정권 모두 그 기반의 본질은, 실제로는 복잡하게 얽혀 있었지만 거의 거론되지는 않았던 국가 폭력이었다. (...) 전시 중국이라는 실존적인 위협은 경쟁자들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상호간에 위협과 폭력을 저지르면서도 상대의 비판에 대해서는 모르쇠로 일관할 수 있는 완벽한 핑계거리가 되어주었다. (...)
(...) 모든 것에는 명암이 있듯, 이들은 전시 여건을 이용해 현대화와 독재가 일체화된 강력한 국가 체제를 만드는 데 매진했다. (347~348쪽.)
장딩원은 그동안 군대가 저질렀던 패악이 이 같은 일을 초래했다는 사실을 마지못해 시인했다. "그곳에서 규율에 따르지 않고 현지 주민들을 괴롭혔던 소수 군인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국민정부 행정이 제 역할을 못했기에 군대가 대신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신뢰가 무너지는 것이 얼마나 큰 피해를 줄 수 있는지 목격했다. "솔직히 말하기가 참으로 고통스럽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적과 싸우는 것보다 동포들의 공격으로 훨씬 더 많은 것을 잃었다." (400~401쪽.)
(...) 당시 겨우 열여섯 살에 불과했던 황야오우는 결코 사람들에게 기억되지 못할 이름들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자신을 희생한 전우들에게 몹시 화가 났다. 그들은 모두 광둥성에서 왔고 이제 더 이상은 아니다. 전쟁이란 이런 것이다. 승리를 달성하기란 매우 어렵다. 희생자들은 제대로 땅에 묻힐 수도 없다. 전진하는 군대에게는 그럴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몸은 반나절이며 벌레들에게 뜯어먹힐 것이다. 사족들은 그 사실을 통보받지도, 보상받지도 못할 것이다."
산속에서 다 함께 피로 맹세했던 황야오우의 의형제들은 여전히 북부 버마의 정글 속에서 백골로 누운 채 자신들의 죽음이 적어도 국가에 의해 기려지기를 바랐을 것이다. 그러나 운명은 그들에게 더욱 잔인했다. 공산당의 제8로군이나 신4군이 아니라 국민정부군 제6군에서 싸웠던 그들은 몇 년 뒤 마오 치하의 중국에서 그 기록이 지워질 것이었다. "실제로 후대의 역사는 그들에 대해 잊어버렸다." 오랜 세월이 지난 뒤 황야오우는 솔직하게 인정했다. "내 마음 속에서 그들은 조국을 위해 죽어간 선열들이었다. 그들의 죽으므은 정당했다. 그러나 지금 누가 그들을 기억하는가?" (419쪽.)
(...) 가장 중요한 결론 중 하나는 우리가 여전히 중국에서 환영받지 못할 법한 전시 역사 기록을 끌어낼 수 있다는 사실이다. (...) 오늘날 중국의 정치적 상황은 역사가 만들어낼 수 있는 유일한 결과가 아니다. 국민당과 공산당 모두 전쟁에서 놓쳐버린 기회 중 하나는 다원주의를 향한 점진적인 움직임이었다. 어떤 당도 절대 권력에 굴복하기를 꺼렸던 것과 갈수록 가혹해지는 전쟁은 파릇파릇한 새싹을 금세 말라죽게 만들었다. 하지만 어쨌거나 그것은 이곳에 엄연히 존재했으며 새롭게 기억되고 떠올릴 충분한 가치가 있다.
지나간 전쟁이 중국에서 다시 이슈로 떠오르게 된다면, 그에 대한 서양세계의 인식 또한 영향을 받을 것이다. (...)
중국은 망각당한 연합국으로 남아 있다. (...) 난징의 칼에 의해서건, 충칭에서의 폭격이건, 심지어 궁지에 몰린 그들의 정부에 의해 제방이 파괴되면서였건, 8년 동안 중국 민중에게 그러한 잔혹한 죽음은 일상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이 나약한 불구의 국가는 적에게 항복할 수도 있었지만 8년 동안 계속 싸웠다. 국민당과 공산당은 1937년부터 1945년까지의 모든 기간에 아시아에서 일본 제국에 일관된 저항을 유지했던 유일한 두 정치 세력이었다. (...)
중국인들이 저항하지 않았다면 중국은 1938년에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을 것이다. 일본에게 있어 중국 본토의 지배권을 허용하여 도쿄가 훨씬 빨리 그리고 더 집중적으로 자신들의 관심을 동남아시아로 돌리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 중국이 싸움을 멈추지 않음으로써 생겨난 '중국의 수렁'이 없었다면, 일본 제국의 야심은 훨씬 쉽게 실현되었을 것이다.
교정. 1판 3쇄
79쪽 2줄 : 서면이 아니 -> 서면이 아닌
82쪽 14줄 : 1936년 2월 16일, -> 1936년 2월 26일,
138쪽 각주23번 밑에서 4줄 : 중일전쟁이 폭발하자 ->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184쪽 13줄 : 타어얼좡 -> 타이얼좡
248쪽 각주 33번 : 이마이 다케오(1898~1982) : 인물을 소개하는 각주의 경우 이름과 생몰연도를 삽입해야 함.
291쪽 10줄 : 헤어진 -> 해어진
298쪽 각주 26번 밑에서 2줄 : 없었고 그의 편협한 시각을 -> 없었고, 이는 그의 편협한 시각을
343쪽 9줄 : 국민당 중국은
369쪽 11줄 : 국민당 중국에 : 틀린 것은 아니지만 "국민당 중국"이라는 표현은 아무래도 어색하다. 문맥상 '국민당 정권' 혹은 '국민당 통치 지역' 정도로 바꾸면 어떨까 싶다.
420쪽 밑에서 4줄 : 변수 값을 -> 변수를
423쪽 7줄 : 지휘구조에 -> 지휘체계에
423쪽 9줄 : 갖게 될 것이다 -> 갖게 될 것이었다
437쪽 6줄 : 쟁점거리가 -> 논쟁거리가 or 쟁점이
441쪽 밑에서 3줄 : 자신들이 -> 미국이 : ("자신들이"이 누구를 지칭하는지 명확하지 않다. 원래 문장의 "Americans"가 생략되었기 때문인데, 무장을 시키는 주체가 미국임을 명확히 해야 문장의 뜻이 더 명확해질 것 같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Service argued that "as we did in the case of Yugoslavia," the Americans should simply tell Chiang that they would arm any forces that were anti-Japanese.)
446쪽 11줄 : 얄타의 논의 대부분은 전후 유럽의 운명과 관련하여 서구와 소련의 영향 아래 분할하겠다는 것이었다. -> 얄타 회담에서의 논의는 전후 유럽의 운명, 즉 유럽을 서구와 소련의 영향권 아래로 분할하는 문제에 집중되었다. ("분할하겠다"의 목적어가 없어서 그런지 번역이 어색하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Much of the conversation at Yalta was about the fate of postwar Europe, with the division of the Continent into zones under Western and Soviet influence.)
448쪽 9줄 : SACO -> 중미협조기구SACO, Sino American Cooperative Organization (SACO는 여기서 처음 나온 것 같으니 설명을 붙이는 것이 좋겠다. 하지만 이것은 순수하게 내 기억에 의한 것이므로 내가 틀렸을 수도 있다.)
455쪽 12줄 : 공산당이 가장 최근에 대회를 연(국민당의 숙청으로 추방당했던 1928년 모스크바에서 열렸다) 이후 실로 오랜만이었다. 심지어 마지막 대회는 1938년에 개최되었다. -> 가장 최근의 전국대표대회(국민당의 숙청 때문에 1928년 모스크바에서 열렸다) 이후 실로 오랜만이었다. 심지어 마지막 전체회의는 1938년이었다. (앞 문장과 뒷 문장에 모두 "회의"라는 표현을 쓰는 바람에 의미가 이상하다. 가장 최근 회의는 1928년인데, 마지막 회의는 1938년이라고 하니까... 원문에서는 앞 문장이 "Congress"이고 뒷 문장이 "Plenum"으로 구분된다. 1938년의 회의는 추측컨대 1938년 9월에 개최된 제6기 중앙위원회 제6차 전체회의(6기6중전회)로 보인다. 따라서 1928년의 "회의"와 1938년의 "회의"는 구분해서 번역해야 한다. 또한 1928년 당시 중국공산당이 해외로 망명한 상태는 아니었으므로 1928년의 전국대표회의를 설명할 때 "망명"이라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다. "in exile"은 굳이 번역하지 않아도 정확한 의미 전달에는 문제가 없어 보인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It had been even longer since the Communists had held their most recent Congress (in Moscow in 1928, in exile from the Nationalist purge), and even the last Plenum had been in 1938.)
458쪽 밑에서 3줄 : 결론은 -> 결말은
461쪽 5줄 : 중-소 우호동맹조약
462쪽 밑에서 1줄 : 중소우호동맹조약 (461쪽 462쪽의 표기가 다르므로 통일해야 함.)
462쪽 3줄 : 주어주리라 -> 주어지리라
462쪽 5줄 : 주권으로 -> 주권을
462쪽 각주3번 밑에서 2줄 : 극복하지 -> 극복되지
477쪽 두번째 문단 : 문단 전체 -> 요 근래 국민정부군 출신이 딱히 핍박을 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하나씩 세상을 떠나면서 그들의 존재는 점차 망각되어갔다.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방송인인 추이용위안은 2010년 한 인터뷰에서 중일전쟁 당시 국민정부군 군인이 했던 역할을 새삼 깨달은 일화를 밝혔다. 그가 어릴 때 보았던 영화는 국민정부군이 일본에 협력했다고 은근히 암시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어른이 되어 국민정부군 출신의 한 참전군인와 함께 그의 전우들이 죽어간 전적지를 돌아보고서야 그들의 역할에 대해 크게 깨달을 수 있었다. 추이용위안은 "제가 국민정부군 병사를 만난 건 그때가 처음이었을 겁니다. 저는 그들을 진심으로 존경하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윈난성에서 100명이 넘는 국민정부군 출신 참전군인을 인터뷰했다. 마을 사람들이 8로군 병사를 숨겨주기는커녕 되려 그들을 지목했다는 이야기나 친일부역자조차 종종 양심적이었을 때가 있었다는 이야기 등 각각의 개인이 가진 이야기들이야말로 전쟁의 복잡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수단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는 "부역자의 회고는 다양한 방식으로 스스로를 합리화하는데, 그것을 죄다 조국에 대한 배신으로 단순화시킬 수는 없다. 심지어 'trading space for time'함으로써(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항일을 실천하는 부역자도 있었다"라고 말했다. (문단바꿈) 항일전쟁을 겪은 복잡다단한 영혼들은 자신들이 칼을 내려놓고 숨을 거둔지 70여년이 지난 다음에야 비로소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이 문단은 각 개인의 경험과 기억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측면을 말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그런데 지금 번역에서는 그 의미가 제대로 살아나지 않는 것 같아서 내 나름대로 번역을 고쳐보았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In more recent years Nationalist soldiers may not have been persecuted, but instead they were being ignored as they died off. In 2010 Cui Yongyuan, one of China's best-known television hosts, gave an interview in which he talked at length about his rediscovery of the Nationalist role in the war. As a child he had seen films that implied that the Nationalists had collaborated with the Japanese, and it was only as an adult that he gained a greater understanding of their role when he toured a battlefield with a Nationalist veteran who showed Cui where his comrades had fallen. "This was perhaps the first time that I had met a Nationalist soldier," Cui recalled. "I really began to feel respect for them." Cui interviewed over a hundred Nationalist veterans in Yunnan province. He suggested that individual stories were the best way to explain the complexities of the war, whether it was occasions when the locals had pointed out members of the Eighth Route Army to the Japanese rather than hiding them, or occasions when even collaborators might have shown some conscience. "Memoirs from collaborators give a variety of self-justifications," he observed, "but it's not always as simple as betraying your country. There were even some collaborators who did what they did as a version of the war of resistance, trading space for time." (문단바꿈) The unquiet spirits of the war against Japan were beginning to rise, some seventy years after laying down their swords — or their lives.
480쪽 6줄 : 일본에게 있어 중국 본토의 지배권을 -> 일본에게 중국 본토의 지배권을
480쪽 8줄 : 그럴듯한 또 다른 주장은 평화가 찾아온 중국이 영국령 인도를 침략했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 혹은 중국을 평정한 이후 영국령 인도를 침략했을 수도 있다. ("중국"을 주어로 해서 번역하는 바람에 의미가 정확하지 않다. 직역하면 '평정된 중국은 영국령 인도를 침략하는 것도 훨씬 더 그럴듯해 보이게 만들었다' 정도가 된다. 원래 의미를 살리면서 오해가 없도록 번역을 바꿔보았다. 원문은 다음과 같다. A pacified China would also have made the invasion of British India much more plausi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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