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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리 노트 (이옥선·김하나, 콜라주, 2022.)

Dog君 2022. 8. 28. 18:19

 

  진주를 떠나 산 것도 벌써 20년이 넘었다. 공익근무요원 시절을 포함해도 전체 인생의 절반 가까이를 타지에서 살았으니 진주 사람이라는 정체성도 많이 옅어진 셈이다. 그래도 여전히 진주 사람이 쓴 책을 보면 괜히 반갑고 관심이 간다.

 

  진주 말을 살려 쓴 책이면 더 그렇다. 구어(口語)로만 쓰던 사투리를 문어(文語)로 옮기면 어딘지 모르게 오글거리고 간지러운 느낌이 든다. 처음에는 그 느낌이 그렇게 싫었는데, 언제부턴가 그 오글거리고 간지러운 느낌이 나쁘지가 않다.

 

  『빅토리 노트』는 진주 태생인 이옥선이 쓴 육아일기를 살짝 다듬고 거기에 지금 시점에서의 느낌을 보태서 낸 책이다.  아마 이 책에 대한 거개의 감상은 5년 간의 육필 육아일기라는 것 혹은 김하나 작가의 유명세에 맞춰져 있겠지만 육아의 경험이 없는 나에게 이 책은 글자로 된 진주 말이 주는 간지러움이 훨씬 더 즐거운 책이었다.

 

  '모개'(48쪽.), '새근'(125쪽.), '씌우다'(125쪽.),  '우리~하게 아프다'(333쪽.) 같은 말에는 진주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오묘한 말맛이 있다. '모개'와 '새근이 들다'는 사전적으로야 '모과'와 '철이 들다'와 대응하겠지만 그걸 딱 그렇게만 옮기면 어딘지 모르게 뭔가 허전하다. '씌우다'를 볼 때는, 나는 '쎄우다'로 썼는데... 싶어서 고개를 갸웃하기도 했고, '우리~하게 아프다'에서는 저 물결표시가 아니면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특유의 억양과 느낌을 우째야 되노 싶어서 혼자 실실 웃고 그랬다.

 

  나는 이 책을 전혀 다른 카테고리의 두 사람에게 거의 동시에 추천받았다. 그 두 사람 역시 육아일기나 김하나 작가의 명성과 무관하게 이옥선 작가가 진주 사람이라는 것에 주목해서 이 책을 추천한 것이었다. 물론 유명세로야 김하나 작가가 훨씬 더 하겠지만 (1등 팟캐스트라던데...) 적어도 내게는 이옥선 작가의 글솜씨와 위트가 훨씬 더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내가 아침저녁으로 운동을 할 때 마음 속으로만 생각했던 것들을 이옥선 작가는 이 아래 글처럼 표현하는 것이다. 이쯤 되면 이건 그냥 피식피식 웃는 정도를 넘어서 동질감까지 느끼는 수준이 된다. (지금 보니 약간 공격적인 것 같기도 하다만은...)

 

  한참 걷다 보면 어디서 뽕짝뽕짝 쿵짝쿵짝 요란한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주로 나이 든 아저씨 풍의 남자 사람이 손에 들고 다니는 음향기기에서 나는 소리이다(가끔씩 여자도 있다). 자신의 취향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한다는 생각은 전혀 없고 자신의 취미생활을 자랑 삼아 공공연하게 즐기는 것 같은데, 내가 볼 때 이런 사람은 구속 입건 수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의 짜증을 유발하여 사회에 불만분자를 심으려고 하는 수상한 행동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꼭 밝혀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문제는 이런 사람들이 꽤 많다는 데 있다. (이옥선, 308쪽.)

 

  그렇습니다. (67학번 혹은 68학번으로 추측되는 까마득한) 선배님, 저희도 선배님의 위트를 본받고자 과방에 있는 날적이에 글을 끄적이며 대학생활 4년간 유우-머를 연마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말입니다, 언제 한 번 신년하례식 같은데 오셔서 저자사인 함 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요새는 이웃이라는 게 없는 세상이다 보니 내가 이용하는 이런 곳의 주인들이 곧 나와 안면 있는 이웃이라는 생각이 든다. 단골 미용실 원장이 다독가라 파마를 하는 긴 시간 동안 서로 읽은 책에 대한 수다를 떨면서 즐거워한다. 수다 중에 제일은 책 수다지. 자동차도 한번 사면 폐차할 때까지 타고 다니니 지금 적당하게 낡아 어디 좀 살짝 긁혀도 그렇게 가슴이 쓰리지 않는다. 낡은 차를 끌고 다니면 오랫동안 잘 알고 지내는 카센터 한 곳쯤은 있다. 그런 점도 마음이 든든하다. (이옥선, 6쪽.)

 

  사실 이 글을 쓰는 지금은 엄마와 사이가 썩 좋지 않은 때다. 엄마와 나는 대화가 잘 통하고 대부분 사이가 좋은 편이지만 가끔 서로 가치관이 크게 부딪힐 때가 있다. 조금 꿍한 마음으로 코멘트를 쓰다가도 자꾸만 반복되는 "엄마가 보기론 오히려 귀엽고" 같은 문장을 마주칠 때면 마음이 몽글해진다. 엄마는 금복주에 모개에 침을 줄줄 흘리는 나를 이런 눈으로 봐줬던 사람이다.
  1948년생인 엄마는 이때 겨우 서른 무렵인데 벌써 애 둘의 엄마이고, 남편은 나돌아다니는 술쟁이여서 독박육아를 하면서도 노트를 펴고 엎드려서 플러스펜을 꺼내 내가 귀엽다고 한 자 한 자 쓰고 있다. 그렇게 쓰인 글자가 내 눈앞에 있다. 45년이 지나 누렇게 바랜 종이 위에. 꿍했던 나의 마음은 너무 작은 것이 되어 어느새 형체도 없이 녹아버린다. 이 일기는 매번 이런 식으로 작용한다. 놀라울 정도로 힘이 세다. 서른 무렵의 엄마는 이제 40대 중반이 된 나보다 훨씬 크다. (김하나, 49쪽.)

 

  아이들을 키우다 보니 책 읽기를 좋아하는 아이(딸)와 싫어하는 아이(아들)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작은아이는 책이라면 다 읽어치우는 반면 큰아이는 도무지 책 읽기를 싫어하는 것이다. 가끔 TV에 교육학자가 나와서 아이들에게 책을 읽게 하려면 부모들이 먼저 책 읽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전문가다운 말을 하는데 나는 그 말을 믿지 않는다. 다른 건 몰라도 책 읽기라면 나와 남편은 그야말로 아이들의 모범이 될 만했다. 우리 집에는 잠자는 머리맡은 물론이고 화장실, 거실, 부엌 구석구석 책이 없는 곳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니 부모들이 책을 안 읽기 때문에 책을 읽지 않는다는 것은 말짱 헛말이라는 생각이 들수밖에...
  책을 읽기 싫어하는 아이에게 책을 읽히려고 어린이용 얄개물을 사다 주기도 하고 책을 한 권 다 읽었을 때는 보상으로 선물도 주고 용돈을 주기도 해봤으나 습관을 들이기엔 허사였다. 혹시 책을 읽지 않으면 궁금해서 못 견딜 만한 내용이면 아이가 책 읽기에 흥미를 보일까 싶어 추리물을 사다가 읽기를 권했는데 읽으라는 큰아이는 읽지 않고 작은아이가 열광적인 책 읽기에 빠져버렸다. 그 덕분에 나도 추리물을 많이 읽게 되었는데 (...) 지금도 작은아이는 미스 마플이나 엘르퀼 푸아로, 브라운 신부 등이 마치 친구나 되는 듯이 나와 이야기를 주고받기를 좋아한다.
  (...) 내가 추리소설을 좀 읽었다고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와 같이 흥미 있는 책을 읽고 같이 이야기를 나누는 즐거움을 누려야 제대로 된 읽기 지도가 되는 게 아닐까 싶다.
  (...) 어릴 때는 마냥 놀 수 있또록 놔두고 좀 더 자라면 아이가 흥미 있어 하는 것부터 조금씩 추천해주면 좋을 텐데, 요즘은 어린이용 책이 너무 넘쳐나서 사실 어떤 걸 택해서 읽혀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어린아이들에게 이렇게 많은 책을 안겨주고 압박감을 느끼게 할 필요가 있나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다 자란 딸이 엄마가 책을 전집으로 사주지 않아서 너무 다행이었고,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 재미있고 흥미로운 책으로 책 읽는 즐거움을 알게 해주어서 참 좋았다는 말을 한다. 책을 읽는 것은 즐거움이고 그것을 아는 사람은 누가 말하지 않아도 찾아 읽기 마련이다.
  내가 볼 땐 책을 읽는 데도 소질을 좀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 그런데도 일률적으로 무조건 책을 많이 읽는 것이 좋은 것처럼 아이 때는 기어이 책을 읽히려고 애를 쓰다가 정작 아이들이 좀 자라고 나면 책 읽지 말고 공부하라고 닦달을 하니, 이게 뭔가 거꾸로 된 게 아닌가 싶다. 결국 아이들을 책 읽기가 부담이 되는 사람으로 만들어놓는 것이다. (이옥선, 293~2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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