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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 홉스봄 평전 (리처드 J. 에번스, 책과함께, 2022.)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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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 홉스봄 평전 (리처드 J. 에번스, 책과함께, 2022.)

Dog君 2022. 8. 28. 18:05

 

  2022년의 독서 도전, 에릭 홉스봄 한 권 완독을 위한 사전 준비. 애초에 이런 평전 류에 흥미가 별로 없는 편인데가가 분량도 워낙에 많아서 읽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런던에 머무를 적에 에릭 홉스봄의 묘에 가니 어쩌니 호들갑을 떨었지만 고백하건대 에릭 홉스봄의 책을 많이 읽었다거나 평소에 그의 글에서 엄청난 감동과 영감을 받았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에릭 홉스봄은 최근 들어서는 (대략 90년대 말 정도부터) 후배 연구자들이 마땅히 비판하고 넘어서야 할 '골리앗'에 가까웠던 것 같다. 마르크스주의 입장에 너무 충실한 그의 입장은 주변부 학계에 속한 나에게는 불만족스러울 따름이었고, 서구중심주의 혹은 고답적인 마르크스주의라고 비판하기에 딱 좋은 대상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에릭 홉스봄의 학문 여정은 그 자체로 존경의 대상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마르크스주의자로서의 비전을 평생동안 잃지 않았고, 역사학자로서도 평생동안 읽고 쓰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읽고 쓰고 공부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은 나에게 한평생 올곧았던 노老학자의 삶은 언제나 경이롭게 느껴진다.

 

  에릭 홉스봄의 일상에 대해서는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이 책을 통해 몰랐던 것을 꽤 많이 알게 됐다. 10대 때 이미 마르크스주의자였다는 것도 의외였지만 무엇보다 그가 비교적 젊을 때부터 책 판매 수익이 짭짤했다는 사실은 퍽 놀라웠다. (에릭 홉스봄 책이 그렇게나 많이 팔렸다고? 이렇게 어려운 책이?) 책을 읽기 전에는 에릭 홉스봄에 대해 아웃사이더 이미지가 꽤 강했는데, 이 정도면 아웃사이더는 확실히 아닐 것 같다. 특히 노년에 들어서는 세계적인 명성을 쌓았으니 더 말할 것도 없고.

 

  물론 이 책을 통해 에릭 홉스봄에 대해 가지고 있던, 고답적인 마르크스주의자라는 선입견이 크게 틀리지 않았다는 점도 다시금 확인하게 됐다. 예컨대 페미니즘에 대한 입장은 확실히 문제적이다. 우리 주변의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서도 흔히 볼 수 있을 것 같은 계급갈등지상주의라고나 할까, 젠더갈등 같은 문제를 부차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그의 입장은 2022년 한국의 관점에서 보면 확실히 별로다.

 

  그런데 여지없는 마르크스주의자라는 게 꼭 나쁜 의미만은 아니다. 결국 역사학에서의 마르크스주의라는 건 역사는 언제나 진보해왔으며 앞으로도 계속 진보할 것이라는 굳건한 믿음이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희망도 나오는 것이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동력도 얻어지는 것이겠지.  아래 인용 같은 부분은 살짝 뭉클하기까지 하다.

 

  에릭의 시각은 어느 정도로 마르크스주의라는 틀을 여전히 두르고 있었을까? 마르크스주의가 무엇이냐고 폴리토가 물었을 때, 에릭은 무엇보다 마르크스주의는 "특정한 역사적 단계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이해했을 때 인간 사회가 성공적인 구조물인 이유는 그것이 변화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과 따라서 현재가 종점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줍니다"라고 답변했다. (...) (777쪽.)

 

ps. 그런데 위에 인용한 에릭 홉스봄의 문장은 비문이다;; 가장 중요한 문장에서 번역에 삑싸리가 나부럿네...

 

  (...) 1935년 7월에는 대학 진학을 위해 통과해야 하는 졸업시험을 치렀다. 역사와 라틴어는 최우수, 영어는 우수, 프랑스어는 "구두시험에서 추가 점수"를 얻은 보통의 성적을 받았다. 자신이 역사 공부를 잘한다는 것이 분명하다는 이유로 대학에서는 역사를 전공하기로 결정했다. (...)
  그러나 이 시점에는 전문 역사가가 될 생각이 없었다. "미래의 나를 꿈꿔본다. 불같은 연사 E. J. H., 유명 저자 E. J. H., 냉혹하고 정력적인 조직가, 철학자. 그러자 너무 유치하고 상상의 나래를 지나치게 펼쳤다 싶어 얼굴이 화끈거렸다." 역사 분야나 학계 쪽으로 간다고 상상하지는 않았다. (128~129쪽.)

 

  그러나 얼마 후 전 세계 공산주의자들은 예상치 못한 충격을 받았다. (...) 1939년 8월 23일, 스탈린의 외무장관 몰로토프와 독일 외무장관 리벤트로프는 양국 간 불가침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에는 폴란드를 양국이 분할하고 발트해 국가들을 소련에 양도한다는 비밀조항도 들어 있었다. 조약의 공식 조항들마저 두 나라가 철천지 적국에서 우호적 동맹국으로 전환했음을 분명히 했다. (...) 영국 전역에서 많은 이들이 공산당을 떠났다. 그러나 대다수 당원들은 소비에트와 독일의 불가침 조약을 스탈린의 방어전략의 화룡점정으로 받아들였다.
  에릭은 영국과 소련의 조약을 기대해왔다. 그러나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이 체결됐을 때 반대하지 않았다. "당과 소련의 올바름에 대한 증거가 그 조약에 반대하는 선언 등에 서명한 사람들의 명단밖에 없다고 해도, 그걸로 충분할 거야"라고 1939년 8월 28일 론에게 썼다. 그러면서 조약이 히틀러의 동맹체제를 붕괴시킴으로써 그 자체로 정당화되었다고 했다. (...) (231쪽.)

 

  실제로 보안정보국은 전후 초기 내내 에릭을 주시했다. 케임브리지 킹스칼리지에서 "홉스봄과 개인적으로 접촉하는" "믿을 수 있고 정확한" 정보원은 1951년 에릭이 "깁스 빌딩 G층에 거처를 두고 있다"고 보고했다. "그의 방에는 공산주의 문헌이 가득하며, 그는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숨기지 않는 전투적 공산당원으로 보인다. (...) 정보국은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의심할 나위 없이 에릭 홉스봄은 케임브리지의 학생들 사이에서 상당히 효과적인 선전 활동을 할 것이다"라고 MI5는 비꼬는 투로 적었다.
  MI5의 의혹은 근거가 거의 없었다. 에릭은 결코 전투적 공산당원이 아니었다. 그는 정치적 맥락에서 자신이 "운동 내 아웃사이더로서 이상한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
  이 무렵 그는 당과 자주 충돌했다. 영국 공산당은 1948년 스탈린과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의 요시프 브로즈 티토가 갈라선 사건으로 인해 특정한 충성 시험에 직면했다. (...) 코민테른을 계승한 코민포름에서 유고슬라비아가 퇴출된 후 동유럽 전역에서 '티토주의자들'에 대한 일련의 여론몰이용 재판이 열렸다. 에릭은 불가리아, 체코, 헝가리의 '반역자들' 중 다수를 그들이 전시에 영국에서 망명 생활하던 때부터 알고 지낸 터라 그들에 대한 기소를 신뢰할 수 없었고, 유고슬라비아를 가리켜 1947년에는 소련의 충실한 동맹이라고 칭송하다가 1948년에는 자본주의의 도구라고 비난하는 영국 공산당의 입장 전환을 신뢰할 수도 없었다. 그는 유고슬라비아의 '수정주의'에 반대하는 당의 정통 노선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점을 개인적으로 분명하게 밝혔다. (391~394쪽.)

 

  에릭은 러시아에 남아 있는 전쟁의 상흔과, 전화번호부나 지도조차 구할 수 없는 비밀주의가 만연한 분위기에 낙담했다. (...) 영국 손님들은 자신들과 비슷한 누군가를 거의 만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소비에트 미디어는 영국 손님들이 소비에트 동료들과 노르만족의 정복, 영국 노동자들의 이데올로기, 중세 농민 봉기와 같은 쟁점에 대해 "활발한 토론"을 벌였다고 보도했다. 이 경험은 에릭의 정치적 견해에 영향을 주지 않았다. 소비에트식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데 따르는 문제와 어려움이 어떻든 간에, 에릭은 그 공산주의가 서구의 제국주의보다는 낫고 따라서 종전처럼 그것을 결연히 옹호할 필요가 있다고 계속 생각했다. (407~408쪽.)

 

  (...) 매리언 베너던과의 관계는 결국 첫 번째 결혼이 끝난 뒤 정서적 안정을 찾으려던 시절의 산물이었다. 두 사람은 공통점이 너무 적어서 관계를 정말로 지속할 가능성이 전혀 없었다. 표류하고 있다는 에릭의 의식은 영국 공산당에 헌신한다는 느낌과 소속감이 사라진 이후로 더욱 뚜렷해졌다. 온전한 행복과 만족을 찾기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한편 공산당이라는 대체 가족을 빼앗긴 에릭은 재즈의 세계에서 다른 종류의 대체 가족을 찾았다. 1956년 중반부터 그는 가깝게 지내는 재주 애호가들과 연주자들, "일종의 지하세계 국제 프리메이슨단"과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재즈 애호가들은 "문화적 소수 취향을 가진 사람들 중에서도 수가 적고 대개 수세에 몰리는 집단"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재즈계에서는 주류에서 벗어나 있고 사회의 중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느낌이 그들 간의 친밀감 및 집단 정체성과 결합되어 있었다. (...) (458쪽.)

 

  《혁명의 시대》는 단호하게 주제별로 분석적 서술을 하고 영국의 정치적 서사 전통을 배격했다. 책은 정치뿐 아니라 경제, 사회, 문화, 예술, 과학 등 유럽 문명 전반을 다루었다. 그리고 지구사라는 더 넓은 맥락에서 유럽을 묘사했다. 이는 21세기 초에 '지구사'가 출현할 때까지 모방자가 거의 없었던 완전히 새로운 방식이었다. (...)
  《혁명의 시대》는 1789년부터 1848년까지 유럽 전반을 개관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이 책에는 테제가 있었다. 에릭은 서문에서 설명했듯이 '이중혁명', 즉 1789년 프랑스의 정치적·이데올로기적 혁명과 얼추 같은 시기 영국의 산업혁명이 전 세계에 미친 영향을 추적하고자 했다. "책의 시각이 주로 유럽의 시각, 더 정확히 말하면 프랑스-영국의 시각이라 해도, 그것은 이 시기에 세계―또는 적어도 세계의 대부분―가 유럽의 기반, 더 정확히 말하면 프랑스-영국의 기반에서부터 변형되었기 때문이다"라고 그는 설명했다. (...)
  책의 구조는 주된 방법론적 전제, 즉 경제가 또는 마르크스주의 용어를 사용하자면 생산양식이 다른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전제를 구체화한 것이었다. 그래서 책은 산업혁명에 관한 서술로 시작했다. 이미 이 도입부부터 책의 깊은 독창성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혁명의 시대》에서 채택한 지구적 시각에 따르면,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난 것은 영국인들의 어떤 기술적 또는 과학적 우위 때문이 아니라 영국이 특히 1815년 이후로 해양을 장악하여 인도와 라틴아메리카에 면직물을 수출하는 시장을 사실상 독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프랑스 혁명에 대한 에릭의 서술은 대부분의 측면에서 당대의 마르크스주의적 표준 해석, 위대한 프랑스 역사가 조르주 르페브르가 지배한 해석을 따랐다. 에릭은 제3신분을 "응집력 있는 사회집단"인 부르주아지와 동일시했고, 미국 독립전쟁 이후 깊은 재정 위기에 빠진 프랑스 군주정이 봉건 귀족의 지지를 잃었을 때 부르주아지가 정치적 변화를 추동했다고 보았다. 거리 시위와 반란으로 혁명 과정을 급진화한 상퀼로트는 역사의 조류에 맞서 싸운 프티부르주아지로 묘사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산업화와 더불어 19세기에 들어서야 비로소 출현할 계급이었다. 르페브르와 달리 에릭은 농민층에게 어떤 주목할 만한 역할을 부여하지 않았다. 《원초적 반란자들》을 집필하면서 모은 연구들에 비추어 에릭은 농민층을 '정치 이전'의 사회집단으로 간주했다. (515~517쪽.)

 

  전작과 마찬가지로 《자본의 시대》도 일반 독자를 겨냥했다. 학생들이 이 책에서 아이디어를 찾아낼 수는 있었지만, 일부 서평자들이 보기에 학생들에게는 여전히 기본적인 예비 지식을 제공하는 구식 서사형 교재가 필요했다. (...) 학생들은 이 책과 씨름하기 전에 무슨 사건이 언제 일어났는지를 마음속에서 정리하기 위해 먼저 진지한 참고도서부터 얼마간 읽을 필요가 있었다. 실제로 《자본의 시대》는 《혁명의 시대》처럼 확고한 주제별 구성을 갖추고 있었다. 전체 16개 장은 '전개'와 '결과' 두 부분으로 나뉘었고, 맨 앞에 1848~1851년의 사건들을 서술하고 분석하는 서론 격의 장이 붙었다. 역시 전작과 마찬가지로 이 책은 경제로 시작해 사회와 정치로 넘어간 다음 두 번째 부분에서 농촌과 도시의 세계, 사회계급, 과학, 문화와 예술을 다루었다. 책의 지리적 범위는 전작보다 넓었는데, 책이 다루는 기간 동안 확대된 '이중혁명'의 영향을 반영한 결과였다. 빅토리아 시대 영국을 연구하는 역사가 J. F. C. 해리슨이 지적했듯이, 책의 초점은 유럽이지만 그 맥락은 전 세계였다. (610~611쪽.)

 

  에릭은 배치를 비판하는 자들이 대변하는 종류의 페미니즘이 궁극적으로 1968년의 소산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1968년 사태가 유감스럽게도 전통적인 좌파를 새로운 사회운동들("페미니즘, 녹색운동, 무지개연합, 게이/레즈비언 등")로 대체했다고 생각했다. 이들 운동은 "마르크스주의와 정반대"였는데, "분별없고 자유지상주의적이고 대개 기본적으로 개인주의적인(즉 반사회적인) 급진화"를 제시했기 때문이다. "1968년의 급진주의는 진보 정치를 위한 기반을 전혀 제공하지 않았고 지금도 제공하지 않고 있다"고 그는 결론지었다. (...) (762쪽.)

 

  아버지는 간신히 숨만 붙어 있는 듯 보였고 스스로 이번을 넘기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 심하게 비틀거리는 몸짓으로 거실의 가장 높은 책장, 재즈 LP판 위쪽의 책장에서 책을 한 권 꺼냈다. 이 비상 읽을거리는 여느 때처럼 주머니에 들어갈 크기였고, 붉은 가죽 장정이었으며, 활자가 촘촘하고 우아했다. (...) 그런데 아버지는 항생제를 맞고 이틀이 지나니 활력이 넘쳤다. 나는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아버지의 휴대전화로 연락해 뭐 필요한 게 있는지 물었다. 아버지는 단것을 무척 좋아했으므로 나는 제일 좋아하는 과일 젤리나 어쩌면 다크초콜릿을 부탁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어쩌다 보니 가장 따분한 책을 가져왔지 뭐니"라고 변명하듯이 말했다. (...) 아버지가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집어든 책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독일어판으로 밝혀졌는데, 위기가 지나간 이상 그걸 읽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 (818~819쪽.)

 

교정. 1판 1쇄

24쪽 밑에서 2줄 : 고온에 -> 고열에

164쪽 6줄 : 동생애 -> 동성애

339쪽 5줄, 7줄 : 헝겁 -> 헝겊

360쪽 5줄 : 불안한다고 -> 불안하다고

394쪽 6줄 : 지지하는 않는다는 -> 지지하지 않는다는

858쪽 5줄 : 바이덴펠트 출판사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본문에서는 "바이덴펠트 & 니컬슨" 혹은 "바이덴펠트"라고 표기했는데 여기서만 "바이덴펠트 출판사"로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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