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g君 Blues...
내 논문을 대중서로 (손영옥, 푸른역사, 2022.) 본문
제목과 내용이 정확히 일치하는 이 책의 판매고는 아마도 신통찮을 것이다. 논문을 쓰거나 읽을 일이 없는 대부분의 도서 소비자를 노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책은 논문 쓰기를 업業으로 삼은 연구자를 독자로 상정하는데, 그 절대적인 숫자가 얼마나 되겠냐 말이다. 더욱이 '대중서'를 터부시하거나 혹은 연구자의 본업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한국 학계의 분위기를 생각하면, '대중서'를 쓰려고 마음 먹은 연구자의 숫자는 다시 또 적어질 것이고.
그래서 이런 책을 쓴 저자와 이런 책을 낸 출판사가 놀랍다. 애초에 안 팔릴 것이 정해진 책인데 말이다. 하지만 이 책은 분명 누군가에게는 꼭 필요한 책이다. 특히, 논문을 갓 마무리한 나 같은 사람.
지난 겨울에 논문을 마무리한 후로 어디 가서 몇 번 학위논문에 관해 말할 일이 있었다. 역사학 비전공자부터 전공자까지 꽤 다양한 사람들 앞에서 내 논문을 이야기했다. 그런데 강의 때마다 정말 마음에 안 들었다. 박사학위논문에 녹여 넣은 많은 이야기들을 나 스스로도 어찌하지 못하고 허우적대느라 필요한 부분만 골라내서 강의시간에 맞게 요약해 넣는 것부터가 너무 버거웠다. 그렇게 어찌어찌 요약한 것은 그야말로 핵노잼이었고. 그러니 스스로에게 보통 불만족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말을 하고 있는 나 스스로도 내용요약을 못해 허우적대서 노잼인데, 듣는 사람은 오죽할까 싶었다.
그랬던 나에게 이 책은 더할 나위 없이 적절한 실용서였다. 이 책을 읽으며 내가 했던 이야기를 좀 더 객관적으로 돌아볼 수 있었다. 꼭 '대중서'를 쓰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내 연구주제를 가지고 타인과 소통하기 위해 나에게 다시 되물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됐다. 무슨 뭐, 대단한 철학이 아니라 나의 이야기를 좀 더 재미있고 편안하게 하기 위한 실용적인 기술을 얻어낸 느낌이다.
올 하반기부터 본격적으로 학위논문을 분해하고 살을 더 붙이는 작업을 할 예정인데, 그에 앞서 나의 시행착오를 돌아보고 타인의 시행착오까지 잘 정제해서 흡수할 수 있었다. 이 책에서 일러준 몇 가지 팁을 잘 기억해두었다가 조금씩이라도 내 말과 글에 녹여넣어야겠다. 그러면 적어도 지금보다는 좀 더 나아지겠지. 그리고 언젠가는 남들에게 돈 받고 팔만한 결과물이 되는 날도 올 것이고.
(...) 몸통만 남기고 머리와 꼬리는 잘라라. 제일 처음 이걸 염두에 두라고 말하고 싶군요. 서론·본론·결론의 삼단 논법구조로 된 논문 형식에서 서론과 결론을 과감히 쳐내라는 뜻입니다. 생선을 회 뜰 때도 머리와 꼬리는 잘라낸 뒤 몸통만 사용합니다. (...)
논문 쓰는 데 참조할 것도 아닌데 어떤 독자가 선행 연구에 뭐가 있는지, 어떤 연구 방법을 썼는지 궁금해할까요. 연구 방법과 연구 범위, 연구의 기여 등 이런 딱딱한 분류 용어는 정말이지 그 책을 덮고 싶게끔 만드는 금기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일식집 셰프는 잘라낸 생선 머리를 버리지는 않습니다. 탕을 끓일 때 국물 맛을 내는 아주 중요한 재료로 씁니다. 그런 것처럼 논문의 서론 중에서 중요한 걸 단행본의 다른 부분에 '적당히' 녹여 넣으면 됩니다. (23쪽.)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고 합니다. 시대사의 디테일. 이것은 비단 사극에만 요구되는 덕목은 아닙니다. 제 책 《미술시장의 탄생》이 보여주듯 인문사회 분야 논문을 단행본으로 낼 때도 꼭 필요한 덕목입니다.
앞에서 '이야기를 입히자'라고 제안했습니다. 시대사의 디테일을 입히는 것은 이 이야기 요소를 강화하는 장치이기도 합니다. 시대사의 디테일은 특히 사회문화사적 연구 방식을 택한 논문을 단행본으로 낼 때는 꼭 넣어야 할 양념입니다. (...)
논문을 단행본으로 다시 쓸 때는 논문에 일일이 담지 못한 시대사의 풍경을 풍성하게 그려넣으려고 애썼습니다. 그래야 그 시대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처럼 생샌한 글이 되고 그래야 독자들이 더 재밌게 읽을 수 있을 테니까요. 〈미스터 션샤인〉을 찍은 세트장처럼 책 속 묘사가 구체적일수록 좋지요. (...) (95~96쪽.)
(...) 참고한 작가가 여럿 있는데 그 가운데 위기철 씨가 있습니다. (...) 그가 쓴 글쓰기 책(안타깝게도 제목은ㅇ 기억이 나지 않아요)을 읽다가 무릎을 친 대목이 있습니다. 독자에겐 시시콜콜 스토리를 얘기할 필요 없이 어떤 이미지를 제공해주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컨대 봄에 대해 쓸 때 미주알고주알 봄에 일어난 모든 이야기를 쓸 게 아니라 화창한 봄날에 일어난 근사한 장면 한 컷만 독자에게 떠올리게 해주면 된다는 겁니다. 나머지 스토리는 독자의 상상력이 알아서 채워준다는 거지요. (...) (114~115쪽.)
그런데 인물 이야기는 왜 읽힐까요. 다큐멘터리가 아닌 드라마의 시청률이 더 높은 걸 떠올리면 답은 어렵지 않지요. 인물에는 흥망성쇠의 스토리가 투영돼 있어 읽는 재미를 줍니다. 타인의 삶을 엿보는 일은 가보지 못한 길을 걷는 듯한 대리만족을 주고 인물에 쉽게 감정이입시켜 독서의 몰입도를 높여주지요. 시든 채소처럼 시들한 내용도 인물 이야기가 첨가되면 비를 맞은 듯 싱싱해지는 효과를 냅니다. (...) (160~161쪽.)
교정. 초판 1쇄
171쪽 12줄 : 월터 휴Walter Hough -> 월터 허프Walter Hough (다른 책을 인용한 부분이라 좀 거시기한데... 구글링을 해보니 Hough의 발음은 /hʌf/ 인 것 같다. 영어 사용자에게도 헷갈리는 발음이기는 한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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