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g君 Blues...
연속성과 교차성 (전지윤, 갈무리, 2022.) 본문
제목에 'XX성'이라는 말이 들어 있으면 일단 거리를 두게 된다. 'XX성'으로 표현되는 개념 치고 난해하고 추상적이지 않은 것이 없는데 내가 그런 내용에 유독 취약하기 때문이다. (철학 다중전공을 포기한 것도 대략 그 때문이지.)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이 저자가 그렇게 추상적이고 난해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약간 의아하기도 했다. (저자 본인은 모르시겠지만 꽤 오래 전부터 지켜보고 있다... 아니, 그렇다고 스토커는 아니고;;)
이 책에서 말하는 연속성과 교차성이란 사실 대단히 까다로운 개념이 아니고, 사회를 변혁시키는데 있어서 여러 층위의 모순과 질곡에 연속적이고 교차적으로 맞서싸워야 한다는 의미이다.
아니, 그건 너무 당연한 거 아니야? 라고 되물을 사람이 있겠지만 그간 한국의 변혁이데올로기를 살펴보면 이건 그렇게 당연한 이야기가 아니다. NL이니 PD니 IS니 하는, 지난 수십년간 한국의 변혁정치를 주름잡았던 이데올로기적 경향들이 별달리 그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떤 경향은 완전한 민족국가의 건설(즉, 통일)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했고, 또 어떤 경향은 세상 그 무엇보다 계급 모순이 우선이고 노동자계급의 투쟁만이 자본주의의 모순을 끝낼 수 있는 유일한 원동력이라고도 했다. 그러니까 여러 층위의 모순과 질곡에 동시에 맞서싸워야 한다는 이 책의 주장은 기실은 과거의 변혁이데올로기들과 (좀 과감하게 말하자면) 결별하겠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사회변혁은 민주주의적 과제와 사회주의적 과제를 연속적으로 수행해 나가는 과정일 뿐 아니라, 착취와 억압과 소외로부터의 해방을 교차시키며 해결해나가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연속적이면서도 교차하는 과정으로서 사회변혁을 구상하자는 것이다. 이것은 민주주의적(또는 민족주의적) 과제와 사회주의적 과제를 분리시키고 단계적으로 사고하는 것에 대한 비판적 문제의식뿐 아니라, 착취와 억압과 소외를 기계적으로 구분하고 위계를 설정하면서 '먼저와 나중', '중요와 부차'를 나누는 것에 대한 비판적 문제의식 속에서 발전하게 된 고민이다. 그러한 경직된 접근은 투쟁의 결합과 연대의 확장을 가로막을 뿐 아니라 좌파를 자족적 고립으로 내몰았다. (15~16쪽.)
불과 10~20년 전까지만 해도 이 책처럼 주장하는 것은 우경화라는 비판을 듣기 딱 좋았다. 현재 한국사회의 핵심적인 모순을 제쳐놓고 젠더나 생태 같은 주제를 꺼내는 것은 모순의 본질을 회피하고 사소한 문제에나 집중하는 개량주의로 간주되었으니까. 그래서 기존의 변혁적 경향들에서는 젠더나 생태를 부차적인 문제로 치부하거나, 혹은 계급모순이 해결되면 자동적으로 해결되는 문제 정도로나 치부했다.
하먼은 계급투쟁의 침체기였던 1980년대의 시점에서 "투쟁의 부활은 1960년대와 마찬가지로 공장이나 사무실에서 일하는 노동계급의 핵심에서부터 시작할 것"이라고 보았다. 여성 억압 등에 맞서는 투쟁의 운명 또한 이 "투쟁의 성패에 달려"있음으로, 사회주의자들은 그 운동을 향해 "노동자 대중과 연대해 투쟁하지 않고서는 자신의 요구를 쟁취할 수 없다고 주장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동의 여부와 무관하게, 이런 주장은 분석의 우선성만이 아니라, 투쟁의 출발점, 투쟁의 중심성을 여성 억압보다 계급 착취에 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부 페미니스트들이 마르크스주의적 접근법을 '성에 눈 감은'sex-blind 것이라고 비판하는 것은 이런 접근법과 상관있다.
그래서 일부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은 마르크스주의의 이런 측면을 보완하며 혁신하기 위한 시도를 해 왔다. 마르크스주의의 장점을 계승하면서도 여성주의적 문제의식을 수용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한 것이다. (...) (38~39쪽.)
그런데 지난 10여년간의 경험은 그러한 '변혁의 순위 매기기'가 얼마나 끔찍한 결과로 이어지는지를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젠더 문제만 해도 그렇다. 이미 수십년 전부터 조직 내 성폭력 문제로 그 많은 운동단체들이 와르르 무너지는 와중에도 운동단체들은 엥겔스의 가족 이데올로기가 어쩌고저쩌고 주워섬겼고, 결국에는 그들의 젠더 의식이 얼마나 끔찍한 수준인지를 적나라하게 폭로당했다.
이 책은 계급이나 민족 같은 핵심 모순에 집착하지 않으면서도, 그간 개량주의적이고 부문주의라고 비판받았던 젠더나 기후위기 같은 문제들에 대응하면서도, 사회 변혁이라는 궁극적인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찾는다. (이는 아마도 저자 개인의 경험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을 것이다.)
(...) 사회주의자들은 미리 정해진 중요하고 중심적인 부문과 투쟁이라는 도식을 움켜쥐고 있지 말아야 한다. 구체적 상황에 대한 구체적 분석을 수행하면서 투쟁 속에서 대화하고 배우려고 해야 한다. 억압과 모순이 중첩된 부문에서 투쟁이 먼저 시작되고 그것이 이 체제의 '약한 고리'가 될 가능성도 열린 자세로 받아들이며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 적대와 모순이 상호 교차하는 변화무쌍한 상황에 최대한 유연하게 대응하면서 투쟁과 쟁점들을 결합하고 연결시켜야 한다. (67쪽.)
(...) 무어는 마르크스주의 가치 법칙과 이론을 재해석한다. (...) 여성, 자연, 식민지를 무상(공짜) 일/에너지의 원천인 "저렴한 자연 프런티어"로 삼는 자본주의는 가부장제, 개발주의, 제국주의를 필연적으로 동반한다는 것이 다양한 통찰을 받아들여 재구성된 무어의 '확장된 마르크스주의 가치 이론'이다. 자연을 외재적인 것이나 외부적 한계로 보는 것은 틀렸으며, 자본주의는 '생명의 그물' 속에서 인간 자연과 비인간 자연이 "저렴한 자연의 법칙" 속에서 공동생산한다는 것이다. 무어는 식량, 에너지, 노동력, 원료를 "네 가지 저렴한 것"으로 지목하고, 이것이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의 주기적이고 철저한 감축'과 '착취 관계와 전유 관계의 끝없는 확대'를 낳는다고 주장한다.
(...) '저렴한 자연' 덕분에 생산비가 하락하면서 이윤율이 상승하고 "세계생태잉여"가 증가하면서 축적이 순조롭게 이뤄지지만, 생태잉여는 결국 장기적으로 저하하는 경향이 있다. 무어는 '역사적 자연의 마모, 축적된 자본 규모의 증가, 자본의 재생산 시간과 자연의 재생산 시간 사이의 모순, 자본축적의 낭비와 비효율 경향'을 그 요인들로 지목한다. 투자의 확대와 축적의 성공은 투자의 축소와 축적의 실패로 전환되기 시작한다.
(...)
1970년대부터 등장한 신자유주의는 바로 이러한 위기에 대처하면서 '저렴한 자연'을 재건하려는 자본주의와 지배계급의 프로젝트였다. (...) (97~99쪽.)
지난한 투쟁을 버텨내며 노조 인정 등을 통해 노사관계의 제도 안으로 들어온 노동자들도 곧 빠르게 민주노조 운동 속에 만연한 여러 가지 관행과 타성에 젖어 들곤 했다. 결국 한국의 노동운동은 지금, 사회적으로 고립된 채 활력을 회복하지 못하며 투쟁으로 성취한 자신들의 조건을 지키기에 급급해 있다. 훨씬 더 많은 노동자는 노동조합이라는 우산과 제도화된 노사관계의 틀 밖에서 무방비로 고통받고 있다. 여전히 한국의 노조조직률은 낮은 수준에서 크게 개선되지 못하고 있고 노조의 문턱은 높다. 이렇다 보니 이 틈과 격차를 이용한 지배자들의 이간질과 공격은 갈수록 더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전체 노동자들의 전반적인 조건은 더 악화하고 있다. (160~161쪽.)
즉 노동운동은 가장 밑바닥 사람들의 편에서 사회정의를 위해 투쟁한다는 정당성과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데이비드 맥낼리는, 억압과 차별이 갈수록 심화하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서 "노동자 계급의 저항과 사회구조 변혁에 있어 유일하고 진정성 어린 정치는 강제 퇴거당한 사람들, 인종차별과 분리로 인해 억압받는 사람들, 미등록 이주노동자들과의 굳건한 연대에 기반한 정치"라고 강조했다. 이 '진정성의 정치'를 위해 필요한 것은 청년실업자, 여성, 이주민 등에게 더 절실한 요구와 투쟁을 우선한다는 관점이다. 그것이 조직 노동자들에게 단기적·부문적으로 조금 손해라고 하더라도 장기적·전체적인 계급이익을 위해 연대와 투쟁에 나서야 한다. (179~180쪽.)
스무살 즈음의 나는 변혁이니 혁명이니 하는 급진적 언사에 끌리는 사람이었다. 저 위에서는 기존의 사회운동조직들을 깔아보듯이 썼지만 사실은 나 역시도 그 일부분이었다. 위에 쓴 냉소적인 말은 사실 과거의 나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ㅎㅎㅎ
지금의 나는 급진적인 주장에 그때만큼 끌리지는 않는다. 나라의 녹을 받아먹는 신분 때문이기도 하고, 급진적인 주장 자체에 피로감을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큰 이유는 하나의 핵심적인 모순을 제시하고 거기에 다른 모든 의제를 종속시키는 것이 너무 답답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내가 진보적인 정치에 가장 먼저 눈을 뜬 것은 생태주의운동이었는데 (라떼는 기후위기라는 말을 안 썼다...) 생태문제에 대한 좌파조직의 몰이해 내지 무관심에서부터 나의 실망은 시작되었다. (기껏해야 '녹색은 적색이다' 정도 수준이었다.) 거기에 달라붙는 '민주집중제'니 '소비에트'니 하는 말도 결국에는 일사불란한 의견통일과 행동통일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애초부터 누군가를 만나서 설득하고 조직하는 일이 성격에 맞지도 않았던 나는 몸에 안 맞는 옷을 입은 것 같은 느낌으로 몇 년을 버티다가 그만 견디지 못하고 보통의 시민1로 살아가게 되었다...는 것이 간단한 나의 이야기.
(...) '정통'에 대한 집착과 고수가 아니라 모든 경계를 넘어서는 '이단'적 상상력과 접근방식이 너무나 필요하다. 이견을 제시할 자유와 열린 토론이 가로막히지 않아야 투쟁하는 대중들 속에서 듣고 배울 수 있기 때문이고, 혁명적 대안이 진정으로 대중적 설득과 동의를 얻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설득되거나 동의하지 않는 상황에서 행동 통일의 강제가 없어야 하며, 결정에 따르지 않을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 사상적으로 단일한 당이 혁명을 지도한다는 관념, 특정한 집단만이 혁명의 주체라는 관념도 벗어나야 한다. 혁명은 아래로부터 기층 민중이 협력과 토론 속에서만 만들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또 착취·억압받는 대중들 모두가 혁명의 주체가 될 수 있다. 그들 중에서 특정 집단만이 중심적 주체가 되고 나머지는 보조적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다. (233쪽.)
(...) 낸시 프레이저도 같은 지적을 한다. 우리는 '노동조합을 가진 백인 남성 산업 노동자들의 행동'이라는 1930년대에 뿌리를 둔 계급투쟁에 대한 이미지를 벗어나야 하고, 사회적 재생산을 둘러싼 이러한 투쟁들뿐 아니라, 성적 학대에서 벗어난 안전한 일터를 위한 미투MeToo 투쟁들까지 계급투쟁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
프랑스의 '노란 조끼'Gilets Jaunes 투쟁, 미국의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s 운동 등 근래의 국제적 투쟁들에서 또 한 가지 나타나는 특징은 그것에 참가하는 노동계급과 사회적 소수자들, 청년들이 기존의 전통적인 노조나 정당들의 밖에서 혹은 심지어 그것에 맞서서 일어나 행동을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도 2016년 촛불 항쟁이나 2019년 검찰개혁 촛불은 기존의 전통적 정당이나 좌파가 주도한 것이 아니었다. (...)
항상 그렇듯이 새롭게 급진화하는 대중은 정치적 탐색을 하면서 그들의 의지에 걸맞은 정치적 대안을 찾게 된다. 그것은 서로 다르거나 경합하는 입장들을 견줘보면서 검증하는 시간을 필요로 한다. 낡은 질서에 맞서오면서 관성을 발전시켜 온 기존의 전통적인 조직과 리더들이 이 과정에서 뒤로 밀려나는 것은 자연스럽다. (...)
문제는 사회주의적 급진좌파로 눈을 돌려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 급진좌파들은 대부분의 나라에서 작고 고립된 집단들로 정체하고 있을 뿐 아니라, 터져 나오는 대중투쟁들에도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전통적 사회민주주의 정당들 못지않게 많은 급진좌파 또한 과거의 낡은 모델에 집착해 왔기 때문이다. (...)
이것이 더욱 중요한 이유는 오늘날 갈수록 커지고 있는 극우파와 파시즘의 위험 때문이다. 민족주의, 인종주의, 여성 혐오, 호모포비아, 제노포비아를 부추기는 극우익들이 세계 곳곳에서 성장하고 있고 이들은 대중의 불만과 분노를 이용해서 소수민족과 인종, 이주민, 소수자, 무슬림 등에 대한 증오를 부추기려 애쓰고 있다. 한국에서도 '태극기 부대'가 극우 복음주의와 연결되어 수년간 매주 거리 시위를 하더니 2019년 10월 광화문에서는 상당한 규모로 등장해 우리를 놀라게 했다. 더구나 낙인과 혐오의 문제는 코로나19 팬데믹 속에서 더욱더 우리의 피부에 와 닿는 문제가 되었다. (...) (289~297쪽.)
내 이야기를 들어서 알겠지만, 그렇기에 나는 이 책에 무척이나 공감한다. 세상의 모순은 민족이나 계급으로는 미처 담아낼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고 복잡하다. 이런 상황에서 여전히 핵심 모순이 뭔지 파악하는게 중요하다는 주장은 결국에는 바람과자 먹고 구름똥 싸는 신선 이야기로 초월하기 마련이잖은가. 각각의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고 귀를 기울이려면 '정통'을 포기할 줄 아는 유연성 정도는 있어야 할 것 같다.
물론 끝끝내 동의할 수 없는 부분도 있다. 무엇보다 진보당에 대한 종북몰이 부분이 그러하다. 물론 그것이 정권의 공안몰이라는 것을 모르는바 아니고, 그들의 목소리를 위해 싸우는 것이 궁극적으로 시민 일반의 정치적 자유를 신장시키는데 도움이 되리라는 것도 안다. 하지만, 글쎄, 북한 체제와 정권에 대한 그들의 모호한 태도를 문제시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것 같다. 북한 체제의 억압과 착취에 대한 모호한 입장이, 과연 남한 체제의 억압과 착취와 끝까지 맞서 싸울 수 있는 것인지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 물론 진보당에 대한 '종북몰이'는 "과거 안보 위협과 공포의 대상이던 북한이, 체제 경쟁에서 뒤처져 업신여김의 대상으로 추락한 현실에 터 잡고 있다." 이런 북한 체제와 정권에 대한 진보당 지도자들의 태도는 동의하기 어려웠다. 북한 체제는 남한 체제와 마찬가지로 억압·착취 체제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북한 체제의 지배계급과 남한에서 북한 정권에 우호적인 투사들(자주파 활동가들)을 구분해야 한다. 북한의 스탈린주의 관료들은 억압·착취를 행하는 장본인인 반면, 남한의 자주파 활동가들은 억압·착취에 맞서 싸워 온 노동운동의 중요한 일부이기 때문이다. (271~272쪽.)
그럼에도 내가 이 책을 칭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기존의 운동조직에 대한 실망과 반성의 결과로 정반대로 우경화되는 그 허다한 놈들과 달리 이 책은 끝끝내 사회 변혁의 전망을 포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거대담론이 무너진 이 시기에도 여전히 (그리고 막연하게라도) 변혁을 희구하는 각각의 시민에게 꼭 권하고 싶다. 좋은 책이다.
교정. 초판
9쪽 밑에서 3줄 : 전력과 전술을 -> 전략과 전술을 (꼭 틀린 것은 아니지만 '전력'보다는 '전략'이 더 어울리는 표현인 것 같다.)
48쪽 밑에서 3줄 : 생산적 투자 (인용문 끝에 말줄임표가 있는 것이 좋겠다.) 제목에 'XX성'이라는 말이 들어 있으면 일단 거리를 두게 된다. 'XX성'으로 표현되는 개념 치고 난해하고 추상적이지 않은 것이 없는데 내가 그런 내용에 유독 취약하기 때문이다. (철학 다중전공을 포기한 것도 대략 그 때문이지.)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이 저자가 그렇게 추상적이고 난해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약간 의아하기도 했다. (저자 본인은 모르시겠지만 꽤 오래 전부터 지켜보고 있다... 아니, 그렇다고 스토커는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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