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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구는 언제 죽었을까?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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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구는 언제 죽었을까?

Dog君 2022. 8. 28. 18:30

 

  최승구(崔承九)라는 사람이 있다. 1892년에 태어난 시인으로, 호는 소월(素月)이다.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고 1910년대부터 저항정신이 뚜렷한 시를 여럿 발표했다고 한다. 서른이 채 되지 않은 나이에 일찍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다가 1970년대에 다시 알려지기 시작했고, 1982년에야 작품집이 간행될 수 있었다고도 한다.

 

  이런 성과들만으로도 충분히 기억할만한 사람이겠으나 사실 그보다는 나혜석의 연인이라는 점으로 더 많이 알려진 사람이기도 하다. 최승구도 그렇고, 나혜석도 그렇고, 이런 신변잡기만으로 누군가를 기억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일인가 싶어 다소 안타깝기는 하지만... 머 암튼 그게 본론은 아니니까 각설하고.

 

 그런데 최승구가 세상을 떠난 해가 언제인지 자료마다 다르게 나온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이나 두산백과를 보면 1917년에 죽은 것으로 나오는데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여러 글들에서는 1916년에 죽었다고도 한다. 심지어는 같은 글 안에서 헷갈리기도 한다. 상황이 이러하니 방송 같은데서는 최승구가 언제 죽었는지 제대로 표기하지 않고 얼버무리는 경우도 있다. (그런거 제대로 확인하고 검증하라고 전문가 패널이 있는거 아닌감? 작가들이 써준 대본만 그대로 읽을거면 거기에 왜 있는 거야...)

 

 

  그런데 이 문제, 생각보다 쉽게 풀린다. 이렇게 쉽게 풀리는데 왜 이렇게 혼란스러운지 의아할 정도. 멀리 갈 것도 없이 이 아래의 세 글만 읽어도 얼추 풀린다. 따라서 내가 할 말도 결국에는 이 글들을 갈무리한 정도에 불과함을 미리 말씀드리면서...

 

1. 권보드래, 「자료/해제 : 『학지광』 제8호, 편집장 이광수와 새 자료」, 『민족문학사연구』 39, 민족문학사학회·민족문학사연구소, 2009.

2. 이상경, 『나는 인간으로 살고 싶다 : 영원한 신여성 나혜석』, 한길사, 2009.

3. 한동민, 「해제 : 羅蕙錫, 「永遠히 이저주시오」 『月刊每申』 1934년 3월호, 15~16쪽」, 『나혜석연구』 1, 나혜석학회, 2012.

 

  최승구가 사망한 시점에 대해서는 크게 세 가지 설이 있다. 1)1917년, 2)1916년 4월, 3)1916년 2월, 이다.

 

  2022년 현재 시점까지 나온 여러 자료로 볼 때 내가 보기에는 3)이 사실상 (빼박캔트 수준으로) 맞는 것 같다. 3)의 근거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 최승구의 동생인 최승만이 자신의 회고록 『나의 회고록』(인하대학교 출판부, 1985.)에서 최승구가 세상을 떠난 것이 1916년 1~2월 정도라고 밝혔고, 둘째, 2012년에 공개된 「永遠히 이저주시오」(『月刊每申』 1934년 3월호)라는 글에서 나혜석이 최승구의 사망시점을 1916년 2월이라고 밝혔으며, 셋째, 2009년에 『민족문학사연구』 39호를 통해 공식적으로 공개된(존재 자체는 2002년에 이미 알려졌다고 한다.) 『학지광』 제8호(1916년 3월 발행)의 「有爲한 二靑年志士를 哭함」이라는 글에서 최승구가 사망했음을 밝힌 것이다.

 

  위의 첫째와 둘째 근거는 최승구가 사망할 당시 그의 곁을 거의 마지막까지 지켰던 두 사람의 회고라는 점에서 신빙성이 높고 (두 사람의 회고에 약간 차이가 있긴 하다.) 셋째 근거는 최승구가 사망할 당시의 당대자료라는 점에서 신빙성이 높다. 최승구의 사망시점에 대해서는 근대문학사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했던 모양인데 2012년과 2009년에 이들 자료가 보고되면서 최승구의 사망시점을 1916년 2월로 특정되는 분위기인 것 같다. (다만 정확한 날짜까지는 아직 특정하기 어려운 듯하다. 해주 최씨 족보를 보면 있을라나.)

 

  그렇다면 이제 남는 의문은 1917년설과 1916년 4월설의 근거는 무엇인가 하는 것.

 

  1917년설은 김학동의 견해로, 그가 1982년에 간행한 『최소월 작품집』을 통해 주장한 것이다. 최승만이 쓴 최승구 추도시 「소월」이 1917년 7월에 간행된 『학지광』 제13호에 실렸기(1917년 4월 23일에 썼다고 부기되어 있다.) 때문이다.

 

 1916년 4월설은 나혜석과 가까웠던 최은희가 「최초의 유화가 나혜석」(『한국개화여성열전』, 추계 최은희전집 4, 조선일보사, 1991.)에서 최승구가 세상을 떠난 것이 1916년 4월 23일이라고 전한 것이다. (안타깝게도 『최소월 작품집』과 『학지광』 제13호, 최은희전집을 직접 보지는 못했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겠지만 두 주장이 년도만 다를 뿐 4월 23일이라는 날짜를 공유하는 것이 꽤 공교롭다는 느낌이 든다.

 

  어쨌거나 이 중에서 1916년 4월설은 순전히 최은희의 회고에만 의지한 것이므로 다른 설에 비해 신빙성이 비교적 떨어지는 편이다. 1917년설도 마찬가지인데, 최승만의 추도시가 반드시 최승구의 사망 직후에 쓰여졌으리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최승구가 세상을 떠나고 1주기를 즈음하여 썼다고 해도 말이 된다.

 

  그렇다면 신빙성이 부족해 보이는 1917년설이 특별히 강한 생명력을 가지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비교적 신빙성이 떨어지는 1917년설이 이렇게 동네방네 퍼진 이유가 뭐냔 말이다. 그것은 아마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의 '최승구' 항목을 김학동이 집필했기 때문일 것이다. 최승구에 대한 초기 연구는 거의 김학동이 전담하듯이 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런 그가 '최승구' 항목에 자신의 견해를 녹여넣은 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물론 김학동이 '최승구' 항목을 집필한 1995년의 시점에서 보면 1917년설이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 후로 나혜석의 글과 『학지광』 제8호 등의 자료가 발굴되었으니 이를 반영하여 정보를 수정할 필요는 있을 것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라고 하면 여러 면에서 권위있는 사전이고 나 역시도 종종 인용하는 자료다. 그런데 이게 벌써 거의 한 세대 전에 쓰여진 것이라 그간의 조사와 연구가 거의 반영되지 못한 상황이다. 그러니 '최승구' 사례처럼 최근의 자료와 연구를 통해 기존의 통설이 수정되어야 함에도 그게 제대로 반영이 안 되는 경우가 생긴 것이다. 그러니 최승구의 사망시점을 둘러싼 혼란은 결국 한국민족문화대백과가 너무 오래됐기 때문에 생긴 일종의 해프닝 아닐랑가.

 

  (최승구가 죽은 것이 1916년이라는 말이 아니다. 최근의 연구와 자료에 따를 때 그의 사망시점을 1917년으로 확정할 수는 없으니, 적어도 그의 사망연도를 '?'으로 고치는 정도의 수정은 해야지 않을까... 뭐 그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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