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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과 통치 (조은주, 창비, 2018.)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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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과 통치 (조은주, 창비, 2018.)

Dog君 2023. 12. 3. 21:01

 

  근대 국가에서 '인구'란 단지 여러 사람을 뜻하는 집합명사가 아닙니다. 국부의 증대를 위해 인구 관리의 필요성을 인식한 중농주의 이래로 인구는 자연적 현상이 아니라 권력이 개입하여 조정할 수 있는 통치의 대상으로 간주되었죠. 물론 ‘권력’ 같은 거창한 표현을 빌리지 않더라도 국가의 정책 수립과 집행을 위해서는 인구에 대한 정확한 파악과 관리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러니 본격적인 경제개발계획을 모색하던 1960년대에 가족계획을 통해 인구를 통제하겠다는 발상이 시작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말은 이렇게 쉽게 하지만 1960년대 이후 가족계획의 역사에도 온갖 우여곡절이 많았습니다. 피임으로 산아를 조절한다는 것은 전통적 농경사회의 관념에 배치되는 데다가, 피임 방법을 알려주는 것 역시 여러 가지 현실적인 문제들(일일이 설명 안 드려도 되죠?) 때문에 만만찮은 일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2023년 현재 한국의 출산율이 전세계 최저 수준으로 떨어진 것을 보면 이러한 노력들이 정말 어마어마한 '성과'를 거둔 것 같기는 합니다.ㅎㅎㅎ

 

  하지만 이 책이 가족계획의 과정과 성공을 묘사하는 방식은, 피임법 보급 과정에서 벌어졌던 낯부끄러운 기억들을 되새기는 '그때를 아십니까'와는 분명히 다릅니다. 이 책에 따르면 한국에서 가족계획 캠페인이 성공하는 과정은 '정상가족'의 이데올로기가 사회의 최말단까지 스며드는 과정이었고, 이를 통해 성性과 가족에 대한 인간의 보편적 욕구가 권력의 요구와 필요에 따라 재편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미셀 푸코 이래로 그렇게나 많이 강조되었던 '근대적 권력'이라는 것이 비로소 한국사에 등장하게 되었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섹스를 하고 결혼을 하고 자녀를 낳아 '적절한' 규모의 가정을 꾸리는 평범한 과정에조차 권력의 기획이 숨어있을 수 있다는 말겠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니 대체 권력이 개입 안 한 게 뭐 있냐, 우리는 권력으로부터 절대 못 벗어난다는 거냐, 하는 체념이 마구 뒤따라와서 어쩐지 좀 슬프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평범한 일상에조차 권력이 개입해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난 후에야만 권력이 아닌 우리 스스로가 주체적으로 꾸려가는 일상도 상상해 볼 수 있겠죠.

 

  덧. 사족 하나 덧붙이자면, 개인적으로는 이 책이 1960년대 이전으로 소급하지 않는 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물론 이 책이 다루는 가족계획은 1960년대 이후 노동자층의 등장과 밀접하게 관련되기 때문에 무리하게 1950년대까지 소급하라는 요구는 부당합니다. 하지만 가족계획정책의 전제가 되는 통계학의 제도화까지 시야에 넣는다면 1950년대의 상황을 생략할 수는 없겠습니다. 이 책에서도 다룬 주한통계고문단만 해도, 설립 논의가 시작된 것이 1956년이고 실제로 만들어진 것도 1959년이죠. 그말인즉슨 한국에서의 가족계획과 통계학 지식의 제도화는 1950년대의 또다른 맥락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온전히 설명된다고 보기 어렵다는 겁니다. 그러니 1960년대로 논의를 한정한 이 책은 자칫 독자의 오해를 유발할 수도 있습니다.

 

  (...) 1960년대와 1970년대는 군사쿠데타와 유신체제의 시대이면서 동시에 역설적이게도 권력이 근대적 형태로 변모한 시기였다. 이 시기에 본격적으로 전개된 자본주의 산업화는 가족의 근대적 재편, 새로운 삶의 양식과 결합했다. 권력을 주체의 외곽에서 작동하는 것으로 보는 자유주의적 권력관에 대한 푸꼬의 비판처럼, 권력은 주체의 경계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주체를 관통했다. 근대적 전업주부와 임금노동자가 창출되었고, 해방과 종속의 동시적 과정이 일어났으며, 평범한 개인들의 삶을 특정한 양태로 정상화(normalization)하는 기술이 발전했다. 인구에 대한 지식이 구축되었고, 국가의 통치화가 전개되었다. (8~9쪽.)

 

  (...) 근대국가의 정치적 관심이 인구를 향하게 되었다는 것은 인구의 자연성을 파악하여 예측하고 이를 조정하여 변형시킬 수 있는 기술에 대한 의지가 국가의 실천을 관통하게 되었음을 뜻한다. 출산율과 사망률, 유병률, 이혼과 영아사망의 통계 등이 지역과 관습, 정부 정책, 접종, 고용상태 같은 변수들에 따라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파악하여 이를 조정하는 것이 국가의 중요한 일이 되었다. 이처럼 인구를 움직이는 변수를 탐구하고 개인의 욕구를 파악하며 인구현상에 내재된 규칙성을 밝혀내려는 의지, 인구의 자연성을 실증적으로 포착하고 설명해내기 위한 지적 실천 및 과학적 분석에 대한 요구는 어떤 법칙의 결과로서가 아니라 실증적으로 사회를 발견해내고자 하는 사유를 가져왔다. 인구는 사회를 개관화하는 지적 실천을 통해 사회가 객관적 성격을 가지는 것으로 인식하도록 이끌었다. (45~46쪽.)

 

  (...) 제3세계 인구에 대한 개입은 냉전시기 국제정치의 장에서 서구의 이해를 관철시키는 도구가 되었고, 미국은 이러한 국제적 흐름의 진원지였다. 산아제한에 대한 압력은 제3세계에 대한 경제적 원조와 직접적으로 결합되었고, 미국정부는 제3세계 인구를 통제하기 위한 국제적인 운동을 주도하면서 다른 서구 국가들의 참여를 이끌어내는 한편 유엔인구활동기금을 통해 추가 자원을 보냄으로써 유엔의 활동을 자극하고 유엔의 영향력을 동원했다. 1969년에 설립된 유엔인구활동기금은 140개국이 넘는 곳에 대해 직접적인 지원을 할 뿐만 아니라 국제가족계획연맹 등의 기구를 통해 간접적인 지원을 하는 등 가장 중요한 지원기관의 하나가 되었다.
  결국 세계 대부분의 제3세계 개발도상국들은 산아제한을 채택하게 되었고, 국제기구와 서구 정부기구로부터 막대한 양의 자금이 출산율을 낮추기 위한 목적으로 이들 제3세계 국가에 흘러들어갔다. 1990년까지 세계적으로 가족계획사업을 위해 지원된 액수는 10억 달러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49쪽.)

 

  (...) 근대적 출산조절과 가족계획을 위한 민간 계몽활동은 식민지시기부터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1950년대 중반부터는 특히 서구의 원조기구와 사설재단들의 영향 아래에서 미국 유학을 마친 엘리트, 그중에서도 의사 출신의 보건관료들을 중심으로 국가 차원의 가족계획을 추진해야 한다는 주장이 여러차례 제기된 바 있다.
  그러나 이같은 주장과 건의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심지어 자녀를 많이 출산한 어머니에 대한 표창이 식민지시기에 이어 이승만 정권하에서도 계속되었다. (...) 이승만은 머지않아 "남북이 하나로 되어 총선거를 실시해야" 하기 때문에 "그때까지 인구가 줄어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이것은 이승만이 가졌던 인구에 대한 관점이 그가 상상했던 정치공동체와 분리 불가능한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1948년에 단독정부가 수립되기는 했으나 대한민국은 하나의 완결된 정체(polity)로 사고되고 있지 못했으며, 남북의 통일과 뒤이은 총선거는 이승만에게 줄곧 "임박한 현실"이었다. 그가 상정한 정치공동체는 남북이 통일된 하나의 정체였다. 반면 군사쿠데타 후 집권한 박정희 정권하에서 통일에 대한 남한의 입장은 완전히 전환된다. 대한민국은 유일한 국가이자 완결된 정체였고, 남한은 이제 통일 후의 총선거가 아니라 경제개발과 근대화를 통해 북한을 압도해야 한다고 여겨졌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인구의 수적 우세는 그 정치적 가치를 상실하게 되었다.
  물론 이같은 전환은 일시에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인구를 둘러싼 상이한 인식은 1960년대 초까지도 각축하고 경합했다. 특히 가족계획사업의 국책화가 추진되자, 군사적·경제적 이유에서 가족계획에 반대하는 주장이 나왔다. 1961년에 가족계획사업을 국책사업으로 의결한 국가재건최고회의 내부에서도, 전쟁이 다시 발발하면 더 많은 인력이 필요하며 특히 남한 군대가 한반도 전역을 점령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인구가 필요하다는 이유에서 가족계획에 반대하는 견해가 있었다. 또한 연소자 인구의 사망률 감소로 인해 나타나는 인구증가는 경제발전의 원동력이 되는 노동력인구의 증가를 의미하는 것이므로, 생산적인 노동력의 증가라는 관점에서 산아제한에 반대해야 한다는 논의도 있었다.
  그러나 대한민국에 대한 군사적 위협의 가능성이나 경제발전의 잠재적 장애물에 대한 이같은 우려는, 대한민국을 잠정적이고 과도기적인 단계로 간주하고 곧 도래할 통일이나 총선거를 대비하여 인구조절을 반대한 이전의 시각과는 완전히 다른 성격을 가진 것이었다. (...) 이제 인구는 대한민국의 경제개발과 근대화를 성취하기 위해 필요한 본격적인 통치의 대상으로 새롭게 부상하게 되었다. (56~57쪽.)

 

  인구에 대한 국가의 개입과 감시, 동원은 국가의 의지만으로는 가능하지 않다. 인구를 조절하고 통제하기 위한 바로 그 목적을 위해서라도 인구를 면밀하게 읽어내는 능력이 필요하다. 가족계획사업이 시작되던 당시 "사업 실시 이전의 현황에 관한 분석자료는 전무"하였고, "전국적인 가족계획 관련 자료는 1960년도 인구센서스 결과에 의한 인구성장률 등 인구분석자료 외에는 거의 전무한 상태"였으며, (...) 1960년에 실시된 인구센서스는 가족계획사업이 주장되었던 거의 유일한 근거였다.
  (...) 1964년 시점에서 지역별로 피임에 대한 수요를 파악하고 각 피임법에 대한 여성들의 선호와 필요를 파악할 수 있는 자료는 존재하지 않았다. 사업 대상 부인 수를 추정하고 이를 토대로 피임에 대한 수요를 추정할 수 있는 자료는 1960년 인구센서스 자료 외에 전무하였다. 따라서 이 인구센서스 자료를 근거로 목표량제도가 시행되었는데, 1960년 인구센서스 자료는 문제가 많아 실제 가임 부인 수를 제대로 파악하기 우려웠다. 가임 부인 수와 이에 따른 목표량이 불일치해서 지역에 따라 실제 가임 부인 수에 비해 목표량이 과다한 문제가 발생하였고, 그럼에도 주어진 목표량을 달성하기 위해 무리하게 피임술이 보급되었다. 그 결과 피임 중단율과 피임술의 부작용이 극대화되어 문제가 속출하게 되었다. (101~103쪽.)

 

  (...) 1960년대 초까지 "한국 내 통계활동의 수준은 통계조사의 객체도 정립되지 못했던 초보적인 단계나 다름이 없었"고 "[통계활동의] 범위가 극히 제한되어 있으며 그 활동도 미미할 뿐 아니라 일본과 미국의 영향으로 여러 기관에서 산발적으로 수행되면서 체계적인 조정 없이 작성"되고 있었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한국에서 통계의 발전은 1960년대 이전과 이후로 크게 구분된다고 언급될 정도로, 한국의 통계는 1960년대를 거치면서 질적으로 발전했다. (123쪽.)

 

  (...) 1960년대 초 한국은 국가의 통치 조건과 역량, 기반 모두 부재한 상태였으며 "'폭압적 정치의 질식'이라는 규탄도 사치스러운, 국민소득 100달러 수준의 절대빈곤 시대였다." 1960년대 부상한 인구에 대한 관심과 통계적 지식의 구축은 이같은 상황을 급격하게 변화시켰다. (132쪽.)

 

  가족계획의 성 담론에서 특히 여성의 성적 만족은 대단히 중요하게 다루어졌으며, 성적 불만족은 일종의 병리적인 상태로 취급되었다. (...)
  여기서 하나의 중대한 모순이 느껴진다. 실제로 1960~70년대 한국사회에서 여성의 성욕이 일반적으로 긍정되고 있었다고 보기 힘들다. (...) 그렇다면 가족계획사업은 당시 한국사회의 전반적인 섹슈얼리티의 지형과는 이질적이고 상이한 이와 같은 담론들을 왜 비현실적일 정도로 집요하고 일관되게 생산해낸 것일까?
  여성의 성적 욕망을 긍정하고 이를 충족시키는 데 초점을 두는 것은 성이 재생산과 분리되는 가장 핵심적인 징표다. 여성의 성욕이란 재생산 자체를 위해서는 결코 필요한 요소가 아니기 때문이다. (...)
  여성의 성욕, 여성의 성적 만족은 섹슈얼리티가 재생산과 부리되는 동시에 사랑과 결합되었음을 가리키는 핵심적인 지표다. '여자의 극치감'이 재생산의 목적을 위해서는 필요하지 않지만 현대의 결혼생활에서 서로의 사랑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는 절대적인 중요성을 가진다는 점이 가족계획의 성 담론을 관통하여 핵심적으로 강조되었는데, 이러한 주장은 인간의 성행위의 목적이 결코 재생산, 즉 임신 및 출산에 있지 않다는 시각과 강력하게 결합한 것이었다. (198~199쪽.)

 

  가족계획의 성 담론 전반에 걸쳐 궁극적으로 강조되는 것이 바로 이 부부관계였다. 가족계획 담론은 성행위의 테크닉에 대한 기술부터 성교육 교과서에 이르기까지 남녀의 사랑에 대한 전면적인 강조를 보여주었는데, 이때 남녀의 사랑은 명시적으로든 암묵적으로든 혼인관계와 결합된 것이었다. 부부 사이의 사랑을 특권화하고 부부의 행복한 성생활을 강조하는 이같은 담론은 가족구조를 부부관계 중심으로 재구조화해야 한다는 요청과 결합되는 것이었으며, 이로써 적어도 가족계획의 담론 안에서 부부관계는 가족관계의 핵심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가족계획 담론은 부부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야말로 근대가족이라는 상을 제시하였고, 다산(多産)은 부부의 사랑을 위협함으로써 가족 전체의 문제를 야기하는 것으로 비판되었다. (209쪽.)

 

  이로부터 우리는 가족계획사업이 시작되던 1960년대 초의 한국사회에 관해 중요한 두가지의 사실을 읽어낼 수 있다. 첫째, 1960년대 초 한국에는 자본주의 산업화를 위해 필요한 임금노동자 집단이 충분히 형성되어 있지 않았다. 일용직을 포함해서 임금노동자가 전체 취업자의 절반을 넘어선 것은 1980년대 중반 이후의 일이다. 둘째, 이것은 곧 근대적 형태의 노동력 재생산의 기제 역시 발달되지 않았음을 뜻한다. 남성이 생계를 부양하고 여성이 가정을 돌보는 성별분업의 물적 토대가 형성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전후 혼란기와 산업화 초기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한 것은 절대빈곤 상태의 농민들과 그 가족들이었다. 학력은 낮았으며 문맹률은 높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농업에 종사했으며, 임금소득을 통해 생활을 유지하는 가구는 일부에 불과했다.
  이같은 사회적 조건은 가족 담론에 접근하는 데 있어 당시 한국의 평범한 빈곤계층의 삶에 대한 감각과 의식이 가지는 중요성을 환기시킨다. (...) 식민지시기부터 등장한 가족담론의 근대성 혹은 여성 담론의 급진성이 실제로 사회 전반에 걸쳐 가족구조 및 가족관계의 변화와 결합하여 의미를 갖기 시작한 것은 1960~70년대 본격적인 산업화가 전개되면서부터였다. 산업화의 전개와 함께 농업경제가 해체되고 농촌 인구가 대거 도시로 이동하게 되면서 농민의 자녀들은 도시의 노동자가 되었고, 결혼하여 가정을 꾸렸다.
  농촌경제에서는 일터와 가정이 시간적·공간적으로 분리되지 않았다. 반면 산업화된 도시에서 임금노동은 시간과 공간의 차원에서 가정과 완전히 단절된 영역에 있었다. 농민 부부는 함께 노동하는 동료였으나 도시의 부부는 서로가 현저하게 이질적인 역할을 요청받았다. 농천경제에서 자녀가 가진 의미와 도시에서의 의미 역시 판이하게 달랐다. 농업사회에서 자녀들은 그 자체로 노동력이고 자산이었으며 노후를 의지하는 친족공동체의 중요한 구성원이었기 때문에 다산은 장려할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산업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녀는 오랜 기간에 걸쳐 많은 노력과 비용을 들여야 비로소 성인 단계로 진입하여 가구경제에 기여하게 되는 존재였다. 도시 부부들에게 많은 자녀는 결코 축복이라고 할 수 없었다. 성인기에 도달할 때까지 어떤 경제적 기여도 없이 오직 비용을 들여 교육시켜야 하는 대상이 된 자녀를 위해 임금노동에 헌신하는 것은 도시의 결혼한 남성들의 책임과 자부심이 되었다. 시간적·공간적으로 일터와 완전히 분리되어버린 가정에서 도시의 결혼한 여성들은 배우자를 위한 정서적 헌신과 자녀를 훌륭하게 교육시키는 것을 자신의 삶의 성취로 꿈꾸게 되었다.
  1960~70년대 산업화는 가족생활의 여러 측면, 생활조건의 향상과 출산율 및 가족규모의 감소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근대 자본주의 산업화에 대한 많은 연구들은 노동자계급의 형성과정에 대해 천착해왔지만, 자본주의 산업화가 가져온 사회변동을 이해하기 위하여 임금노동자 계급의 형성과정에만 주목하는 것은 일면적인 것이다. 여성들 대다수가 전업주부가 된 것이야말로 산업혁명이 가져온 가장 극적인 결과의 하나였다. 여성들 대다수가 전업주부를 이상적인 삶의 모델로 상정하게 된 것은 그것의 실현 여부와 무관하게 산업화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 것이었다.
  산업자본주의 사회에서 임금노동자의 존재는 사회적 재생산(social reproduction)을 전담하게 된 근대가족의 출현 없이는 근원적으로 불가능한 것이었다. 이것이 이른바 생산과 재생산의 근대적 분리의 결과였다. 사회적 재생산 없이는 임금노동자들이 생산노동을 지속할 수 없다. 따라서 임금노동자 계급의 형성은 근대가족, 특히 근대적 주부 집단의 창출과 결합하는 과정이었다. 이것이 바로 "산업사회의 봉건적 중핵", 즉 생래적인 성별에 기반한 임금노동과 가사노동 사이의 분업이다.
  이런 의미에서 성별 역학의 규정은 전통의 잔재가 아니라 산업사회의 토대에 뿌리내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246~249쪽.)

 

  공교롭게도 한국 현대사에서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기르며 저축하고 소비하는 구체적인 세속의 삶을, '시민'이나 '지배', '주권'의 문법과 전혀 다른 차원에서 '통치'되어야 할 '인구'로 정치적 장에 도입한 것은 쿠데타와 유신, 군사독재로 점철된 박정희 정권이었다. (...) 박정희 정권은 평범한 사람들이 살아가며 결혼하고 노동하는, 아이를 낳고 기르고 삶을 구상하고 사고하고 실천하는 모든 과정을 인구의 통치와 관리라는 차원에서 정치권력의 장에 도입했다. 이런 점에서 1960년대는 이전 시대와의 질적 단절이었다.
  가족계획사업은 바로 이 질적 단절을 보여준다. 한국의 가족계획사업은 광범위한 피임의 보급과 계획된 출산의 규범화를 통해 여성의 출산조절을 보편화하고 재생산 행위의 양상을 질적으로 변화시킨 가장 강력하고 중요한 역사적 계기였다. 그뿐만 아니라 가족계획사업을 통해 무수히 많은 평범한 사람들의 욕구(desire)를 파악하는 일이 통치의 장에 진입했으며, 인구에 대한 각종 지식의 공적 확립이야말로 통치의 중요한 실천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가족계획사업은 군림하고 복종시키는 것이 아니라 면밀히 관찰하고 처방하는 권력, 그럼으로써 지배의 새로운 양식, 새로운 차원의 종속(subjugation)을 창출하는 권력의 작동을 보여준다. (263~26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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