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g君 Blues...
대구 (마크 쿨란스키, 알에이치코리아, 2024.) 본문
특별히 똑똑하지도 성실하지도 못했던 탕수육에게 대학원 생활은 결코 녹록치 않았습니다. 매주 반복되는 수업 진도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벅찬 나날이었습니다. 그러고도 결과물은 남들에 크게 못미치는 것들이어서 자괴감도 심했구요. 그럼에도 대학원 생활 내내 신선한 지적 자극에 노출될 수 있었던 것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큰 즐거움이었습니다. 일상사, 트랜스내셔널 히스토리, 캘리포니아 학파 등, 각 분야의 최전선에서 활동하시던 교수님들로부터 받았던 다양한 지적 자극과 충격은 대학원 생활의 어려움을 상쇄할만큼 컸습니다. (지금의 팟캐스트도 어쩌면 그때의 경험 덕분입니다 ㅋ)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그런 지적 자극들은 '전형적이고 정형화된 서사를 넘어서기 위한 노력'이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여기서 '전형적이고 정형화된 서사'라 함은, 장기적으로 꾸준히 우상향하는 생산력 그래프를 밑바탕에 깐 위에 신분/계급 투쟁을 거쳐 근대적인 민주주의로 귀결되는, 그런 서사를 말합니다. 학부 4년 동안 (물론 공부를 열심히 하지는 않았지만) 배워서 저에게 너무 익숙해졌던 서사이기도 하죠. 그렇게 만들어진 전형을 대학원에 와서 하나씩 뜯어고칠 때의 지적 희열이란, 아 진짜...
방송에서도 말씀드렸던 것처럼, 마크 쿨란스키의 『대구』는 이미 2000년대 초반에 이미 그 이름을 들었습니다. 계급이나 민족 같은 전형적인 주체가 만드는 전형적인 서사가 아니라 대구라는 비인간 주체를 중심에 놓았을 때 만들어지는 서사가 얼마나 흥미로울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고 해서, 역사학자의 저술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읽어볼만한 책이라고 교수님께서 추천하셨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XXX의 역사' 같은 글은 흥미 위주의 '소재주의'라는 비아냥을 듣기 십상이었고 진지한 역사학자가 쓸 글은 아니라는 인식이 팽배했지요. 하지만 2024년 지금의 역사학이 비인간 주체에 대해 갖는 관심이 어디 그러한가요. 대표적으로 과학기술과 생태환경에 대한 역사학의 관심은 역사 서술의 주인공이 반드시 인간이 될 필요는 없다고 역설力說하는 중입니다.
당장 이 책 『대구』부터가 꼭 그러합니다. 대구를 중심으로 다시 그려낸 미국의 독립과 아프리카 노예 사냥의 역사는 익숙하면서도 새로운 레시피로 우리에게 다가오지요. 그간 잘 알려지지 않았던 '대구 전쟁' 이야기는, 그 자체로도 흥미로울 뿐 아니라 냉전 질서 하 NATO 내에서 벌어진 은근한 다툼이라는 면에서도 눈길이 가구요. (게다가 '대구 전쟁'은 오늘날 배타적 경제수역의 범위가 200해리로 설정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하니, 지금의 우리와도 무관하지 않죠.) 그러니 어떤 면에서 『대구』는 1990년대에 이미 역사학 연구의 어떤 측면을 선취했다고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책을 읽고 나면 대구 말고 다른 걸로도 비슷한 작업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실 겁니다. 그런 분께는 이은희의 『설탕, 근대의 혁명』을 권해드립니다. 설탕으로 대표되는 '단맛'과 '좀 더 건강하고 과학적인 식생활'이 우리의 삶을 어떻게 바꾸었는지를 중심으로 근대 한국과 동아시아의 제당업을 다룬 책입니다. 아차, 그러고보니 (우리 방송에도 게스트로 나오신 적 있는) 마구로님도 아주 오래 전에 '참치의 세계사'로 짧은 글을 쓰신 적이 있습니다. 마구로님, 혹시 이 글 보고 계시다면 15년 만에 다음 글 써주시면 안 됩니까?
<참치로 보는 세계사 1. 참치로 지구의 넓이를 재는 방법>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437610
<참치로 보는 세계사 2. 신선한 참치 대뱃살이 20세기의 발명품?>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455423
(...) 바스크인이 숱한 압력과 전쟁 속에서도 이처럼 고집스럽게 독립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던 까닭은 이들이 여러 세기에 걸쳐 강력한 경제력을 유지해 왔기 때문이다. 바스크인은 목자일 뿐만 아니라 선원이기도 했으며 특히 상업 분야에서의 성공으로 유명했다. 중세 내내 유럽인이 막대한 양의 고래고기를 먹을 때, 바스크인은 머나먼 미지의 해역으로 나가 고래를 잡아 왔다. 이들은 엄청난 대구 어족을 발견했고, 그걸 잡아서 소금에 절였다. 그래서 긴 항해에도 불구하고 상하지 않고 영양가도 높은 식품을 먹을 수 있었다. (42쪽.)
그렇다면 바이킹은 초록이라곤 없는 초록의 섬이나 흙이라곤 없는 돌의 땅에서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
바이킹들은 그처럼 멀고 황량한 바다까지 여행할 수 있었던 까닭은 대구를 보존하는 방법을 배웠기 때문이다. 이 물고기를 추운 공기 속에 매달아 놓으면 무게가 5분의 1로 줄어들면서 나무처럼 딱딱한 판자 형태가 된다. 이를 잘게 부숴서 씹으면 마치 건빵처럼 먹을 수 있다. 에이릭이 살던 시대보다 더 앞선 9세기에 이미 스칸디나비아인은 말린 대구를 가공하는 공장을 아이슬란드와 노르웨이에 세웠으며, 남는 물건은 북유럽에 가져가 무역하기도 했다.
바이킹과 달리 바스크인에게는 소금이란 것이 있었다. 소금에 절인 생선은 말린 생선보다 더 오래갔기 때문에 바스크인은 바이킹보다 더 멀리까지 여행할 수 있었다. 이는 또 다른 이득을 가져왔다. 더 오래가는 제품일수록 무역도 더 쉽기 마련이다. 1000년경 바스크인은 대구 시장을 크게 확장했고 이 시장은 대구의 북부 서식지에서 멀리 떨어진 곳까지 미침으로써 진정 국제적인 규모가 되었다. (...) (45쪽.)
대구는 10개 과(科)에 걸쳐 200개 이상의 종(種)으로 분류된다.
그 대부분은 북반구의 차가운 바닷물 속에 살고 있다. 대구가 지금과 같은 형태로 발달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1억 2000만 년 전에 테티스해에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테티스해는 과거 지구에서 동서 방향으로 펼쳐지며 다른 모든 바다와 연결되었던 열대 바다를 말하는데, 결국에는 북쪽의 바다와도 합쳐져 대구는 북대서양에 사는 물고기가 되었다. 나중에 아시아와 북아메리카를 잇는 육교가 끊어지자 대구는 북태평양으로도 진출하게 되었다. (65쪽.)
북대서양에서는 농업과 어업이 전통적으로 결합되어 있었다. 뉴펀들랜드와 마찬가지로 경작이 가능한 땅이 거의 없고 식물의 성장기간이 매우 짧은 아이슬란드에서는 사람들이 어업과 농업 또는 최소한 어업과 목축업을 결합시킬 수 있었다. 농부가 할 일이 거의 없는 어두운 겨울이면 아이슬란드의 해안으로 대구가 몰려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20세기가 시작된 지 한참이 지났을 무렵에도 아이슬란드인 가운데 자신을 어민으로 여기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대부분은 농업을 자신의 주업으로 간주했다. 반면 뉴펀들랜드에서는 여름에 대구가 몰려들다 보니, 어민이 짧은 계절 동안 나쁜 땅에서 농장을 운영하고 있다고 해도 농사짓는 계절과 고기 잡는 계절이 겹칠 수밖에 없었다.
(...)
버지니아 북쪽에 있는 아메리카의 공동체 중에서 가장 번창했던 뉴잉글랜드는 무역에 최적인 완벽한 위치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곳에는 유럽과 유럽의 식민지들이 원하던 상품인 대구가 있었으며, 이 대구 덕분에 유럽산 상품을 열망하며 상당한 소비력을 보유한 인구가 생겨나게 되었다. 그로 인해 생겨난 도시가 바로 훗날의 보스턴이다.
뉴펀들랜드와 노바스코샤의 경제는 뉴잉글랜드의 경제와 발맞춰 성장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로 인해 고갈되어 버렸다. 인구와 내수 시장이 없어 결국 보스턴의 어업 기지 노릇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뉴잉글랜드 사람들은 상업 전문가가 되었다. 이들은 독립적이고도 부유했으며 독점을 싫어했다. 서인도 제도의 설탕 생산업자들이 보호 시장에 의존하여 부유해졌던 것과 달리, 뉴잉글랜드인은 자유무역 자본주의에 의존하여 부유해졌다. 이들의 신조는 '개인에 대한 존중'이었으며 상업은 뉴잉글랜드의 종교가 되다시피 했다. 심지어 어민조차도 개인 사업가들이었고 봉급을 받고 일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세계 대부분에서 그렇게 하는 것처럼) 어획량에 따라 배당을 받았다. 18세기 경제학자인 애덤 스미스는 자본주의에 관한 초창기 저서인 《국부론》에서 뉴잉글랜드의 어업을 격찬했다. 스미스가 보이게는 어업이야말로 개인에게 무제한적인 상업 환경이 주어질 경우 경제가 어떻게 번영할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흥미진진한 사례였다.
영국 정부는 이런 자유를 부여할 의도가 전혀 없었으며, 식민지는 더 이상 종주국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다. 이것이야말로 제국의 한가운데 있는 위험한 선례였다. (109~112쪽.)
뉴잉글랜드의 최고 고객 일부는 바로 생도밍그(아이티), 마르티니크, 과들루프 같은 프랑스 식민지들과 수리남(네덜란드령 기아나) 같은 네덜란드 식민지였다. 이런 식민지에는 거대한 플랜테이션 경제가 있었으며 프랑스의 식민지는 극도로 수익성이 높았다. 1680년대 이후로 프랑스인은 매년 평균 1000명의 아프리카인을 사들여 마르티니크로 데려갔다. 18세기에 생도밍그에는 매년 8000명을 데려갔다. 이들의 상당수는 일만 하다가 결국 죽음을 맞이한 다른 노예를 대체했다. 가격이 저렴한 소금에 절인 대구를 주식으로 삼은 아프리카 출신 노예들의 인구는 급속히 증가했다. (122쪽.)
머지않아 대영제국은 뉴잉글랜드산 대구를 소비하는 시장으로서는 물론, 뉴잉글랜드의 증류소에 공급할 당밀의 생산자로더소 너무 규모가 협소해지고 말았다. 영국령 서인도 제도 전체에서 생산하는 당밀의 양은 로드아일랜드 한 곳에서 수출하는 럼주의 제조에 필요한 당밀 양의 3분의 2도 충족시키지 못할 정도였다. 때마침 프랑스 식민지들은 뉴잉글랜드산 대구를 필요로 했고, 뉴잉글랜드는 프랑스산 당밀을 필요로 했다.
결국 영국 정부는 한 세기 넘도록 뉴잉글랜드인들이 자유무역을 맛보도록 방치하다가 1733년에 가서야 비로소 상업에 대한 자국의 통제를 재차 확립하기 위한 조치로서 당밀을 규제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이 방법은 대영제국의 해체로 나아가는 최초의 부주의한 조치가 되고 말았다. (127쪽.)
식민지의 독점을 재차 확립하기 위한 영국의 첫 번째 중요한 시도는 1733년의 '당밀 조례Molasses Act'였다. 이 법률은 영국령 카리브해를 제외한 다른 지역에서 생산된 당밀에 대해 무거운 수입 관세를 물렸기 때문에, 이 제품의 무역을 사실상 없애버리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예상되었다. 이는 프랑스령 서인도 제도산 당밀의 구매에서 수익을 거둘 수 없게 해서 뉴잉글랜드인은 대구를 판매할 시장이 줄어들 뿐만 아니라 럼 산업도 덩달아 위축될 것이라 예상되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둘 중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뉴잉글랜드인과 함께 일하고 싶어 안달이 난 프랑스인이 밀수 계약을 맺어 여전히 수익을 창출했기 때문이다. 뉴잉글랜드와 프랑스령 카리브해 사이의 대구와 당밀 무역은 오히려 당밀 조례 이후에 더 성장했다.
이 사건은 한 번의 실패로 끝나지 않았다. 그로부터 한 세대 뒤에 영국은 똑같은 방법을 재차 시도했다. 1760년의 '설탕 조례Sugar Act'를 통해 당밀에 대해 1갤론(약 4.5리터)당 6센트의 세금을 매겼다. 또다시 뉴잉글랜드인들은 밀수라는 방법을 이용해 버텼다. (...)
1764년에 평소 적극적인 '반골'로 알려져 있었던 보스턴의 상인 존 행콕이 마데이라 와인 밀수 혐의로 자기 범선인 리버티호에서 체포되었다. 분노한 보스턴의 폭도는 체포된 그를 풀어 주었다. 이듬해에는 '인지 조례Stamp Act'가 도입되어 사상 최초로 식민지인에게 관세 대신 직접세를 부과하게 되었다. 영국이 무역 관련 법률을 점점 더 많이 만들어 낼수록 식민지와의 관계는 점점 더 나빠졌다. (...)
영국인은 마치 최악의 수만 골라 두는 것 같았다. 인지 조례에 대한 식민지인의 저항에 직면하자, 이들은 또다시 '타운젠드 조례Townsend Act'라는 것을 내놓았다. (...) 그가 제안한 수입세의 목록에 대해 즉각적인 반발이 나오자, 그는 이를 철회하는 대신에 몇 가지 덜 성가신 품목 몇 가지에만 세금을 적용하려고 시도했다. 이때 선택된 품목 하나가 바로 차(茶)였다.
1773년에 있었던 '보스턴 티 파티'는 미국 독립 혁명의 성격을 잘 보여 주는 사건이었다. 이곳에서는 존 행콕과 존 로를 비롯한 상인들의 주도로 수입품에 대한 관세에 저항하는 봉기가 일어났다. 이때 대구 귀족 가문의 상속자들은 마치 모호크족처럼 차려입고 자기네 배에 올라가 상품을 항구에 내버렸다. 이와 유사한 '티 파티'가 다른 항구에서도 이어졌다. (...) (133~136쪽.)
(...) 1945년에 미국이 자국의 근해 석유 생산을 보호하려는 생각을 품으면서 국제법에도 새로운 개념이 등장했다. 해리 트루먼 대통령이 미국의 대륙붕에 있는 광물 자원에 대한 통제권은 자국에 있다고 선포한 것이다. 이전까지만 해도 대륙붕을 소유한 나라는 하나도 없었다. 여러 뱅크들만 해도 미국이나 캐나다에 속한 것까지는 아니었다. 영국도 자국의 대륙붕을 소유하고 있지는 않았다. 어느 국가도 북해를 소유하고 있지 않았다. 대구와 기타 상업적 물고기는 대부분 대륙붕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이 주장이 어업에 끼치는 함의는 막대할 수밖에 없었다.
(...) 1954년 이후로 아이슬란드의 대구 어획량은 극적으로 줄어들기 시작했다. 점차 중요한 상업적 어획물이 되고 있던 볼락이나 연어의 경우에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1954~1957년 사이에 아이슬란드의 해저 어류 어획량은 무려 16퍼센트나 떨어졌다. 영해선을 늘리는 조치에 대한 옹호는 해덕대구(해안으로 더 가까이 헤엄쳐 오는 어종으로, 따라서 4마일 영해선에 의해 보호받는다)와 넙치의 어획고가 같은 기간 동안에 늘어났다는 사실로부터 더욱더 지지를 받았다. 1958년에 이르러 아이슬란드는 자국의 영해선을 12마일(약 19.3킬로미터)로 더 확대했다.
(...)
그리하여 영국의 언론이 '대구 전쟁the Cod War'이라고 부른 사건이 시작되었다. 이 전쟁은 세 차례에 걸쳐 벌어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선전포고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으며, 사망자는 단 한 명도 나오지 않았다. 부상자가 없었던 이유는 오로지 양쪽 모두에게 상당한 행운이 깃들어 있었던 까닭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
그로부터 10년 뒤에 두 나라는 앞서와 똑같은 일을 반복했다. 1971년 3월 아이슬란드는 1972년 9월 1일자로 자국 영해선이 50마일(약 80.5킬로미터)까지로 확장된다고 선포했다. 당시 유럽경제공동체EEC의 가입국이었던 영국과 서독은 이에 거세게 항의했고, 아이슬란드의 주장이 국제법 위반이람녀서 국제사법재판소ICJ에 중재를 요청했다. 아이슬란드는 이 조치가 자국의 대륙붕에 대한 것이며, 따라서 국제적인 이슈가 아니기 때문에 국제사법재판소의 관할권을 인정할 수 없다고 대응했다. 국제사법재판소가 어떤 결정을 내리기도 전에, 이렇게 시작된 제2차 대구 전쟁은 결국 타협으로 끝을 맺었다.
(...)
1974년 아이슬란드의 대구 어족은 50마일 영해선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번 말썽을 겪는 것처럼 보였다. 어획물 중 커다란 대구의 비율이 극적으로 줄었떤 것이다. 10년 전만 해도 아이슬란드의 생물학자들은 연령이 18년쯤인 대구가 흔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1974년에 이르자 연령이 12년 이상인 대구를 찾아보기가 드물어졌다. 이는 어족의 번식 능력이 크게 감소했다는 의미였다. 심지어 영국 과학자들도 이런 발견에 동의했다.
1975년 10월 15일 아이슬란드는 대구 어족의 감소에 대해, 그리고 환경보호 수단의 필요성에 대해 언급하면서 다시 한번 영해선을 확장했다. 이번에는 200마일(약 322킬로미터)까지였다. 또다시 모든 해외 트롤선은 새로운 영역 밖으로 나갔지만 영국과 서독은(이번에는 두 나라였다) 예외였다. 이들은 앞서 했던 일을 그대로 반복할 예정이었다.
(...)
실제로 그 당시에는 유럽경제공동체 전체가 200마일 영해를 곧 선언할 참에 있었다. 영국 정부는 자국의 영해에서만큼은 100마일 배타 수역을 유지하겠다고 고집했다. 1976년에 유럽경제공동체는 영국의 요구를 공개적으로 거부하고 200마일 영해를 선언함으로써, 당시 아이슬란드와 협상 중이었던 영국에 망신을 주었다. (213~225쪽.)
양식 물고기를 풀어 주어 자연산 어족과 섞이게 한다는 아이디어에 과학자들은 소스라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자연이 선택하는 방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질병에 대한 저항력도 없고 포식자를 피하는 방법도 모르며 사냥이나 먹이 수집 기술도 결여되었다면, 심지어 체내에 잘못된 온도계를 갖고 있어서 부동성 단백질을 만들어 내지도 못하고 산란을 위해 해안으로 옮겨 갈 때를 알려주는 수온 변화를 감지하는 능력조차 없다면 이런 대구는 야생에서 살아남을 수가 없다 이런 대구는 가두리 안에서 더 잘 살아남을 것이다. 나아가 양식장에서의 생활에 더 적합한 특징들을 많이 갖고 있다면 이렇게 결함투성이인 물고기가 오히려 번성하게 되고 심지어 우세해질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 물고기가 자연산 물고기와 만나 번식을 한다면 '나쁜 유전자'가 그 후손에게 전해지는 것을 막을 수 없다.
(...)
물론 물고기 양식이 가져올 유전적 겨로가는 아직까지도 확인되지 않은 상태다. (...)
더 큰 문제는 일부 부화장에서 자연산 어족의 회복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야생에 풀어 줄 치어를 만들어 내고 있다는 점이다. 뉴잉글랜드의 연어 부화장에서는 치어를 워낙 많이 야생에 풀어 주었기 때문에 1996년에 이르러 뉴잉글랜드에 서식하는 대서양 연어 가운데 야생종의 다양한 유전적 특성을 여전히 갖고 있는 것은 500마리 내외로 추산되기에 이르렀다.
한 종의 생존에서 핵심적인 이슈는 그 다양성을 어떻게 유지하느냐 하는 것이다. 한 종이 이 세상에서의 생애 동안 여러 가지 도전에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는 광범위한 유전적 특성들이 바로 다양성이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은 현재 살아남은 북부 어족의 크게 감소한 개체군에는 한때 수백만 마리의 개체군이 보유한 유전자 풀에서 표현되었던 모든 범위의 특성들이 들어 있기를 바라지만, 실제로 그런지는 아무도 모른다. (259~260쪽.)
교정. 2판 1쇄
095쪽 출처 : 낸터컷 -> 낸터킷
120쪽 밑에서1줄 : (들여쓰기 삭제)
198쪽 밑에서8줄 : 910년에 -> 1910년에
223쪽 밑에서2줄 : 수산업 전체가 붕괴할 (줄바꿈 삭제)
247쪽 9줄 : 내셔널시 -> 내셔널 시
297쪽 13줄 : 아버지와비슷한 -> 아버지와 비슷한
305쪽 11줄 : 보조금이 차지한다 (줄바꿈 삭제)
'잡冊나부랭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픔이 길이 되려면 (김승섭, 동아시아, 2017.) (0) | 2025.01.01 |
---|---|
한국 사회과학의 기원 (홍정완, 역사비평사, 2021.) (0) | 2024.12.31 |
역사문제연구 54호 (역사문제연구소, 2024.) (0) | 2024.12.24 |
역사비평 148호 (역사비평사, 2024.) (0) | 2024.12.24 |
역사비평 147호 (역사비평사, 2024.) (0) | 2024.12.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