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g君 Blues...
아픔이 길이 되려면 (김승섭, 동아시아, 2017.) 본문
저자가 어떤 사람인지, 이 책이 어떤 문제의식으로 쓰여졌는지는 굳이 더 말을 보탤 필요는 없겠지요. 책 좀 읽으시는 분이라면 저자의 이름을 이미 알고 계실 겁니다. 그리고 책의 내용도 충분히 짐작이 가실 겁니다.
그래서 김승섭의 책은 동어반복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아우, 또 이 얘기야?' 하고 말이죠. 새로 나온 책을 읽을 때마다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차별이 무엇인지 내가 어디에 무신경했던 건지를 조금씩 더 알게 되긴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의식과 메시지는 책이 거듭되어도 그다지 다르지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기회가 날 때마다 김승섭의 책을 읽는 것은, 그의 글이 제가 처음 공부를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던 이유를 새삼 되새기게끔 하기 때문입니다. 처음 대학원에 가기로 마음 먹었을 때만 해도 저 나름대로는 막연하게나마 다짐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때까지 제가 겪었던 좌절과 실망과 희망 같은 것들의 끝에 만들어진 것이었죠. 똑똑하지도 성실하지도 못한 대학원생이라 하루에도 몇 번씩 자괴감에 시달렸지만 그럴 때마다 그 다짐을 되새기며 스스로를 다독였던 기억이 납니다.
시간이 지나 지금의 저는 그저 보통의 직장인이 되었습니다. 그 때의 그 다짐을 굳이 되새기지 않고도 살아가는 데 딱히 부족함이 없지요. 그래서 그 다짐은 많이 흐릿해진 것 같고 또 어떨 때는 그런 다짐이 있었는지조차 까먹기도 합니다. 김승섭의 글은 그런 저를 새삼 깨우는 알람시계 같다는 생각을, 2024년 마지막 휴일에 집 근처의 북카페에서 이 책을 읽으면서 했습니다.
며칠 뒤에, 역사학 연구에 갓 발을 들인 초학(初學) 분들 앞에서 몇 마디 말씀을 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이 책과 저자를 권할 생각입니다.
(...) 가난한 사람들의 시체만 해부되고 시록되면서 해부학의 역사에는 여러 오점이 남습니다. 왜냐하면 가난은 인간의 몸을 변화시키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가난이, 또는 경제적 결핍이 사회적 폭력이 인간의 몸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만성적인 스트레스가 혈중 코르티솔cortisol을 높이고, 그 결과 심장병, 고혈압, 당뇨와 같은 만성병 발생의 위험이 증가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과학적 사실입니다. 코르티솔을 분비하는 신체기관은 신장 위에 있는 부신adrenal gland입니다. 운동을 해서 근육을 많이 사용하면 근육세포가 커지는 것처럼, 가난한 사람들의 몸에서 일상적으로 코르티솔이 더 자주 더 많이 분비되면서 부신이 비정상적으로 커지는 것이지요. 1930년대까지 이러한 사실을 학자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가난으로 인한 스트레스로 부신이 비정상적으로 커져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지요. 대부분의 시신에서 부신은 커져 있었으니까요.
몇몇 해부학자는 간혹 드물게 고소득 계층 사람의 몸을 해부하다가 평소와 다르게 '비정상적으로' 부신이 작은 경우를 발견했습니다. 이상하다고 생각한 학자들은 이유를 알 수 없지만 부신 조직이 축소되는 질병이 있다고 보고합니다. 그때 사용한 질병이 '특발성 부신 위축증idiopathic adrenal atrophy'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발견은 당황스러운 에피소드로 끝나게 되지요. 부유한 사람들의 부신 크기가 인체의 정상적인 부신 크기였던 것이고, 그동안 해부용으로 사용된 가난한 사람들의 시체에서 발견된 부신이 비정상적으로 컸던 것이니까요. (53~54쪽.)
인간은 사회 속에서 살아갑니다. 우리 몸에서 나타나는 병리적인 변화는 항상 유전적인 요소와 환경적 요소가 함께 상호작용하며 나타나고 진행됩니다. 공동체와 완전히 분리되어 독자적으로 살아가는 개인은 존재할 수 없기에, 사회적 환경과 완전히 단절되어 진행되는 병이란 존재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인간을 개개인으로만 바라볼 때 그런 사실은 쉽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지난 100년간 거대한 혁신을 이뤄낸 현대의학으로도 알기 어려운 내용입니다. 병원에 찾아오는 개개인을 진단하고 치료하는 병원의 임상진료 과정에서는 환자 개개인의 몸에 새겨진 사회구조적 원인을, 현상 너머에서 작동하는 정치·경제적 구조와 역사를 이해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미국 매사추세츠 지역에서 금연하지 못하는 건설노동자도, 남아프리카공화국 콰줄루나탈 시골 지역에서 AIDS로 사망한 여성도, 동유럽의 IMF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이행하던 나라에서 결핵에 걸린 어린이도, 개개인만을 바라본다면 특정 질환을 가진 환자일 뿐이니까요.
그러나 한 걸음 뒤에서 바라보면 이들을 아프게 했던 '원인의 원인'이 보입니다. 그 원인은 개인의 것이 아닙니다. 위험한 작업장을 방치했던 일터가 금연율을 낮췄고, HIV 치료약 공급을 전적으로 민간보험에 맡겨둔 지역사회가 AIDS 사망률을 높였고, 경제위기 속에서 공공보건의료 영역의 투자를 줄이기로 한 국가의 결정이 결핵 사망률을 증가시켰습니다.
공동체는 그 구성원들이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책임을 지니고 있습니다. 건강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추구하기 위한 기본 요건이기 때문이지요. 건강은 인권을 지켜내기 위한, 정치·경제적인 기회를 보장받기 위한 조건입니다. 건강해야 공부할 수 있고 투표할 수 있고 일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으니까요. (70~72쪽.)
과학자가 연구를 하고 교육을 한다는 것은 합리성의 힘을 믿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당장은 누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결국에는 가장 합리적인 가설이 채택될 것이라는 믿음, 지금이 아무리 혼란스럽고 좌절되는 상황이라 할지라도 장기적으로는 나은 길로 가리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한국사회에서 진행되는 의사결정 과정을 지켜보면 안타까울 때가 많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지 중에서 어떤 것이 보다 합리적인 것인가에 대한, 결론에 도달하는 과정이 정당했는가에 대한 논의가 실종된 사회에서, 앞서 이야기한 과학적 합리성의 세 가지 요소에 대한 고민은 더 깊어집니다.
하지만 몇 번을 다시 생각해도 결론은 같습니다. 학자인 제가 걸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무엇이 더 합리적이고 올바른 길인가를 곰곰이 따져보고 발언하는 것뿐입니다. 제 연구가 이 세상을 마주하는 저의 방식이라면, 그 무대를 제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 (83쪽.)
2010년 미국에서 박사과정 학생으로 공부하던 시기, 보스턴 보건대학원에 있는 클랩 교수의 사무실을 찾아간 적이 있습니다. 오래전부터 학자로서 교도소 재소자에 대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원자력 발전소나 석유 공장 근처 주민의 건강을 계속 연구하고 사회적 발언을 계속해왔던 그에게 묻고 싶은 질문이 있었습니다.
"당신처럼 나도 데이터를 분석해서 질병의 원인을 이해하는 역학자가 되고자 한다. 그런데 내가 관심이 있는 사회적 약자의 건강에 대한 데이터는 찾기가 힘들다. 그들의 삶이 불안정하고, 정부와 기업은 정치적으로 힘이 없는 그들에 관심이 없다. 그렇다면 역학자로서 나는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데이터가 만들어질 때까지 계속 그들이 병들고 다치는 것을 지켜봐야 하는 것인가?"
아래 문장은 무작정 약속을 잡고 찾아와 예민한 질문을 던지는 동양인 학생에게 들려준 리처드 클랩 교수의 답변입니다.
"데이터가 없다면, 역학자는 링 위로 올라갈 수 없다. 그러나 역학자가 적절한 데이터를 가지고 있다면 싸움이 진행되는 링 위에서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
그의 이야기는 이후 제게 중요한 지침이었습니다. 한국에서 교수로 일하며, 콜센터 상담사, 소방공무원, 병원 인턴/레지던트, 해고노동자, 그리고 성소수자의 건강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 항상 데이터를 먼저 수집했습니다. 그 데이터를 분석해 학술 논문을 쓰고, 그 근거에 기초해서 어떠한 사회적 변화가 필요한지 말했습니다. 그것은 학자인 제가 '링 위에 올라가는' 방법이었습니다. (108~109쪽.)
결국 원진레이온은 직업병 문제를 감당하지 못하고 도산하게 됩니다. 한국 정부는 민간기업 중에 인수업체를 찾지 못했고, 1993년 공장 폐쇄를 결정합니다. 그리고 그 기계들은 1994년 중국 단둥시 화학섬유공사에 팔려 갑니다.
1966년 일본에서 합법적으로 넘어온 기계가 한국에서 900명이 넘는 노동자들의 삶을 망가뜨리고, 이제는 중국으로 넘어가 얼굴을 알지 못하는 누군가의 삶을 망가띄게 된 것입니다. 이를 막고자 한국의 노동자들은 수차례 모여 집회를 열었습니다. 그러나 기계는 끝내 또다시 합법적으로 국경을 넘습니다. 50명의 중국 노동자들은 한국의 공장에 찾아와 기숙사에 머물며 기계를 다루는 기술까지 전수받다 갔습니다.
그 이후, 기계의 행방은 알 수 없었습니다. 일본의 이황화탄소 중독 전문가인 호흡기 내과 요시나카 다케시는 《교토보험의신문》에 기고한 칼럼에서 이 기계가 현재는 북한으로 넘어가서 가동 중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확인이 필요하지만, 이게 사실이라면 일본, 한국, 중국을 거치며 각국 노동자의 삶을 망가뜨렸던 이 기계가 이제는 북한 노동자의 몸을 망가뜨리고 있는 것입니다.
(...)
그렇다면 1971년 일본석면이 한국에 세운 제일화학 석면공장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제일화학은 '제일 파잘Jeil Fajar'이라는 새 이름을 얻었습니다. 1990년, 인도네시아로 이전한 것입니다. 1971년 일본석면이 합작회사 제일화학을 한국에 세운 것과 1990년 한국의 제이로하학이 인도네시아로 이전한 것, 이 두 사건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1971년 일본에는 작업장의 석면 노출을 측정할 수 있는 기술이 있었고 한국에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1990년 한국은 비로소 그 기술을 가지게 되었지만, 새로 공장을 세운 인도네시아는 그렇지 못합니다. 원진레이온의 기계가 반복해서 팔려 갔듯이, 석면 산업에서도 1971년에는 피해자였던 한국이 1990년에는 가해자가 된 겁니다. (113~116쪽.)
고통은 근본적으로 개인적인 것입니다. 타인의 고통을 나눈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고통이 사회구조적 폭력에서 기인했을 때, 공동체는 그 고통의 원인을 해부하고 사회적 고통을 사회적으로 치유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합니다. "트라우마에 대한 사회적 인식 공유를 통해, 명예회복-보상-처벌을 거쳐 사회관계 회복개선"으로 나아가는 사회적 치유작업이 함께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기억해야 합니다. 5·18 광주민주화 항쟁 사망자의 유가족이, 77일 옥쇄파업에 참여했던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가, 세월호 유가족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진단을 받고 아프고 괴로워한다고 해서, 그러한 진단과 의학적 치료만으로 그들의 상처 입은 몸이 겪는 고통을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요. '빨갱이' 낙인으로 인해 오랜 기간 죽음에 대해 말할 수조차 없었던 그 사회적 낙인이, 회계조작에 따른 폭력적인 정리해고가, 풀리지 않는 의문들로 가득 찬 가족의 죽음과 은폐된 진실이 그들의 고통을 이루는 핵심이니까요. (176~177쪽.)
Q_세월호를 생각하면 "가만히 있으라"라는 방송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A_학생들이 순진해서 가만히 있으라는 말을 '수동적'으로 따른 것이 아니다. 일반인이 아니라 항해 전문가인 선원이 가만히 있으라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학생들은 '내가 움직이면 구조가 늦어지고 상황이 안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공동체를 안전하기 지키기 위해서 학생들은 선실 내 가구를 붙들고 '필사적'으로 가만히 있었다. 하지만 결과는 참사로 이어졌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학생들은 해경을 만나 "저 뒤에 애들이 있어요"라고 말했다. 하지만 해경은 배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내가 위기에 처했을 때 국가는 도와주지 않았다. 학생들은 누구도 '구조'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 그것은 '탈출'이었다.
상처를 준 것은 국가만이 아니었다. 한 방송국 기자는 세월호 참사 당일 생존 학생에게 다가와 친구의 가족이라고 속이며 "어떻게 된 것이냐?"라고 물었다. 친구의 부모라고 생각해서 해줬던 이야기는 그대로 녹음돼 방송 전파를 탔다. 물에 빠진 휴대전화를 고쳐주겠다며 가져가 그 안에 있던 동영상을 허락 없이 방송에 낸 경우도 있었다.
참사 당일만이 아니었다. 언론이 앞다퉈 정확하지 않은 보상금액과 대학 특별전형 사실을 보도하면서 '단원고' 출신은 낙인이 되었다. '과도한 특혜'라는 수군거림은 피해자들의 옆구리에도 똬리를 틀었다. 생존 학생들의 부모는 주변에서 '운 좋게 (살아)나와서 저렇게 혜택을 받는다'라는 말을 수시로 들어야 했다. 그 순간은 "진짜 막 살을 잡아 뜯는 느낌"으로 남았다. (179~180쪽.)
1968년 4월 4일, 미국의 흑인 인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목사가 살해되었습니다. 미국사회는 충격에 휩싸였지만, 백인만 거주하는 아이오와의 작은 시골 마을 리치빌은 너무도 조용했습니다. 초등학교 선생님이던 제인 엘리엇Jane Elliott은 자신이 담임을 맡은 3학년 학생들에게 이 비극적인 죽음을 어떻게 전달할지 고민했습니다.
(...)
엘리엇은 눈에 띄도록 파란 눈을 가진 아이들의 목에 작은 목도리를 감아줍니다. 그리고 '우월한' 갈색 눈을 가진 아이들에게만 몇몇 특권을 부여합니다. 그들만 운동장에 새로 만들어진 정글짐을 이용할 수 있게 하고, 쉬는 시간을 5분 더 사용할 수 있게 했습니다. 갈색 눈을 가진 아이들은 교실의 앞자리에, 파란 눈을 가진 아이들은 교실의 맨 뒷자리로 밀려났습니다. 그리고 갈색 눈을 가진 아이들은 파란 눈을 가진 아이들과 놀면 안된다는 규칙도 생겼습니다.
이와 같은 규칙 몇 가지가 시행되고 며칠이 지나지 않아 아이들은 빠르게 변화했습니다. 한 번도 산수 문제를 어려워하지 않던 파란 눈의 여자아이가 간단한 더하기 빼기 문제를 틀리기 시작했고, 갈색 눈을 가진 아이들은 쉬는 시간에 얼마 전까지 친구였던 파란 눈을 가진 아이를 둘러싸고 말합니다.
"너는 열등한 아이니까 우리에게 사과해야 해."
발랄하고 당당했던, 실험 이전이라면 다른 아이들에게 주눅들 리 없었던 그 아이는 놀랍게도 자신이 잘못했다고 사과합니다. 일주일이 채 지나기 전에, 파란 눈의 아이들은 수업 시간에 자기 의견을 말하길 주저하며 매사에 소극적인 아이로 변했고, 갈색 눈의 아이들은 그렇게 변한 파란 눈의 아이들을 무시하기 시작했습니다.
인종차별이 인간의 삶을 어떻게 바꾸는지를 무서울 만큼 명확히 보여준 이 실험은 미국 전역에서 화제가 되었습니다. (...)
그 실험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실험이 시작되고 일주일이 지나서, 엘리엇 선생님은 말했습니다.
"얘들아, 선생님이 확인해보니까 우월한 사람들은 갈색 눈이 아니라 파란 눈을 가지고 있었어요. 규칙을 바꾸도록 하자."
두 집단의 위치는 역전되고 갈색 눈을 가진 아이들에게 부여됐던 특권이 고스란히 파란 눈의 아이들에게 전달된 것입니다.
그런데 신기한 현상이 나타납니다. 한 번 피해자의 경험을 가진 파란 눈의 아이들은 '우월한' 집단이 되어서도 '열등한' 갈색 눈의 아이들에게 훨씬 더 너그러웠습니다. 제인 엘리엇은 그 경험 속에서 이 실험이 중요한 교육이 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차별받는 소수자가 되어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특권에 대해 더욱 조심할 줄 알았던 것입니다. (...) (231~234쪽.)
간혹 신문기사를 통해 '경제 활성화'를 명분으로 앞서 언급한 화학물질 규제를 느슨하게 만들기 위해 여러 단체가 적극적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이야기를 접하곤 합니다. 현장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반영하지 못한 법이 적절히 수정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지만, 그런 논의를 볼 때마다 한국사회에서 만병통치약처럼 통용되는 '경제 활성화'를 이유로 국민의 안전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규제를 포기하는 것은 아닐지 두렵습니다. 국민의 생명을 담보로 진행되는 경제 활성화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원인 미상 간질성 폐질환'이라는 낯설고 무력했던 진단명으로 사라져간 수많은 갓난아이와 임산부들의 죽음으로부터도 우리가 배우지 못한다면, 한국사회에서 이 참사는 또 다른 형태로 반복될 것입니다. (285쪽.)
개인적인 이야기인데요. 저는 20세기의 역사를 공부하면서 '혁명'이라는 단어에 매력을 느끼지 않게 되었어요. 사회를 전체적으로 바꾸어내는 '혁명'의 전망 없이 나는 어떻게 해야 진보적으로 살 수 있을까, 그리고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라는 고민이 제게는 20대 내내 큰 화두였어요. 좀 더 근원적으로 말하면, '꽃이 필 것이라는, 열매가 맺힐 것이라는 기대 없이 어떻게 나는 계속 씨앗을 뿌릴 수 있을까'라는 고민이었어요. 그 고민이 마지막에 닿았던 지점이 그런 거였어요. 사회가 급격하게 바뀔 수 있다는 꿈이 없다면, 남은 길은 자신의 삶에서 가능한 한 오랫동안 진보적인 실천을 하도록 하고 그럴 수 있게 준비를 하자는 생각이었어요. 그런 거 있잖아요. 80년대 민주화운동에 그토록 적극적이었던 많은 사람들 중에서 그 절반만, 아니 그 반의반만이라도 그때 열정의 10퍼센트를 가지고, 좀 더 구체적으로 자신의 소득과 시간의 10퍼센트를 소외된 약자를 위해 쓰고 있다면, 사회가 지금보다는 훨씬 낫지 않을까라는 생각이에요. 그래서 학생 시절에 했던 다짐이, 지금의 공부와 활동은 앞으로 수십 년간 '스스로를 망치는 일과 싸우기' 위해 준비하는 시간이라고, 중요한 것은 졸업 이후에 내가 살아가는 모습이라고 생각했어요.
저는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넉넉지 않은 집안의 장남인 제가 시민단체나 노동운동단체에서 일하는 전업 활동가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경제적인 이유를 떠나서 정신적으로도 전업활동가로서 그 활동을 지속해나갈 자신이 없었어요. 졸업 후의 진로에 대한 고민 끝에 저는 학자가 되기로 결정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무엇보다 공부를 좋아하고, 또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나 책을 통해서 기존에 생각하지 못했던 무언가를 알게 되는 순간을 좋아했으니까요. 임상의사로 일하는 동기들처럼 경제적으로 넉넉하게 살 수는 없겠지만, 열심히 한다면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연구를 하면서 경제적으로도 지속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 (299~3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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