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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청제국에 무엇이었나 (왕위안충, 너머북스, 2024.)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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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청제국에 무엇이었나 (왕위안충, 너머북스, 2024.)

Dog君 2025. 1. 23. 11:14

 

  청-조선 관계를 다룬 이 책은 제목부터 독자의 관심을 끕니다. 한국사를 더 많이 배운 한국인은 '청나라는 조선에게 무엇이었나'라고 묻기 마련이지만, 이 책은 그와 반대로 묻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단지 시선 방향을 바꾸는 것만으로도 전혀 의외의 역사상이 보이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마침 이 책의 번역자인 손성욱 선생님의 『사신을 따라 청나라에 가다』가 좋은 예입니다. 그 책의 3부에서는 숙종 대에서 영조 대까지의 왕세자(왕세제) 책봉 문제를 다루는데요, 여기서는 이 문제를 청나라 내부의 사정을 포함하여 다룹니다. 이렇게 되니 조선의 책봉 문제가 단순히 조선 내부의 정치 문제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중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세계질서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죠.

 

  여진족이 흥기하여 대조선관계를 재정립하는 시점부터 시작하는 이 책도 그런 점에서 흥미롭습니다. 그간 우리는 이 시기를 명청교체기의 상반된 외교정책과 두 번의 호란으로 이해했지만, 이 책에 따르면 청나라의 입장에서 조선의 사례는 향후 그들이 만들었던 중화질서의 첫 단추였다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했습니다. 명나라를 제압하기 전에 거쳤어야 하는 전채요리 정도가 아니었다는 거죠. 이러한 관점이 신청사(新淸史) 패러다임에 대한 반론 격으로 제기된 것이라는 사실까지 염두에 두면 이 책은 훨씬 더 흥미진진하게 다가옵니다.

 

  ...라는 정도가 애초의 제 느낌이었습니다만, 방송을 하면서 약간 다른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저는 거시적인 관점에서 역사를 말할 때 종종 등장하는 '민족성'이니 하는 말들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역사가 지금 우리에게 미치는 직접적인 영향은 매우 제한적이기에, 현대의 문화 현상이나 국제관계를 설명하면서 수백수천 년 전의 경험을 근거로 가져오는 것은 무망하다고 봅니다. 예컨대 한류를 말하면서 수백년 전의 전통예술이나 '한국인의 민족성', '한恨의 정서' 같은 것을 들먹이면 저는 일단 믿음이 안 갑니다. 지금과 전혀 다른 사회와 문화를 가졌던 시기를 가지고 21세기의 현상을 설명하는 것이 과연 온당한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현대 한국 문화산업의 구조와 자본의 동향을 이야기한다면 또 모를까, 한참 전의 역사에서 근거를 찾는 건 그저 결론에 꿰어 맞추기 위한 궤변 아닐까요.

 

  그런데 이 책을 읽고 이야기할 때는, 역사가 과연 과거의 유산에만 불과한지 심각하게 다시 생각하게 됐습니다. 물론 현대 중국이 대외정책을 수립할 때 전근대의 중화질서를 주요한 참고 자료로 삼지는 않겠지요. 하지만 최근의 역사 연구에서 특정한 경향이 새삼스럽게 계속 강조된다면 그러한 관점들이 단순한 역사 연구에서 그치지 않고 향후의 동북아 국제질서에 대한 강력한 암시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게 무엇인지 제가 구체적으로 정리해서 말할 깜냥은 안 되는 것 같군요;;) '조선은 청제국에 무엇이었나'라는 한국어 제목도 충분히 흥미롭지만 'Remaking the Chinese Empire'라는 영어 제목이 훨씬 더 인상깊게 다가오는 것도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역사 연구라는 것도 결국에는 그것을 둘러싼 사회적 맥락과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이 책은 우리에게 더 의미심장하게 다가옵니다. 향후의 중국학 연구에 대해 신경을 쓸 필요가 있는 것도 물론입니다. 그러니 이 책(의 관점)에 대해서도 좀 더 많은 사람들이 토론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은 또 그것대로 큰 공부가 되겠지요. ^^

 

  (...) 엄밀히 말하면 이 책은 일반적 의미의 청대 중한관계사가 아니라 중한관계의 관점에서 본 청대 중국사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에서 다루는 시기도 청과 조선이 종번관계를 맺은 1637년이나 청이 입관한 1644년이 아닌 1616년 만주정권이 일어난 때부터 양국의 종번관계가 종식된 1895년이나 한국이 일본에 강제로 병합된 1910년까지가 아니라 1911년 만주정권이 몰락할 때까지다. 이 책의 영문 표제에 '중화제국(the Chinese Empire)'이 들어가고, 부제에 일반적으로 쓰는 '중한관계(Sino-Korean relations)'가 아닌 '만한관계(Manchu-Korean relations)'를 쓴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다. (11쪽.)

 

  1637년 청-조선 종번관계의 수립은 청이 스스로 재정의하고 중화세계를 재편하려는 거대한 사업의 역사에서 전환점이 된 사건이다.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명청 교체를 1644년 만주족이 북경을 점령한 시기로 보지만, 만주 정권은 적어도 10년 전부터 종번 구조에 내재된 정치-문화적 담론을 활용하여 '중국'의 지위를 확보하려고 노력했다. (...)
  1637년부터 1643년까지 청은 조선과 빈번히 교류해 양자 간 새로운 정치 제도를 강화하고, 새로 정복하거나 예속된 다른 국가들과의 관계를 관리할 성숙한 모델을 개발했다. 나는 이를 '조선 모델(朝鮮事例)'이라고 한다. 1부에서 설명하듯 이 모델은 다른 국가나 정치체가 조선을 따라 청으로부터 책봉을 받고, 청의 연호와 역법을 채택하며, 청에 정기적으로 사신을 파견해 조공하면서 청 중심의 종번체제 안으로 들어오도록 만들었다. 이 모델의 이면에는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들이 청을 중화로 받아들이게 하고, 정치적·문화적으로 청의 최고 위상을 확립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1644년 이후 서쪽으로 진격하여 중국 내륙을 정복하면서 소프트파워를 앞세운 청은 다른 나라와 정치적 관계를 관리하고 천하의 중심이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공고히 하고자 조선 모델을 활용하였다. (26~27쪽.)

 

  나는 청의 중화제국을 영토 제국과 정치-문화 제국이라는 두 가지 차원에서 해석한다. 영토적 중화제국은 주로 만주 조정, 직성(直省), 이번원(理藩院)의 관리를 받는 외번의 제I그룹으로 이루어진 대청(大淸)과 동일하다. 외번은 차하르(Cahar Mongols, 察哈爾), 티베트, 몽골, 신강(新疆)의 회부(回部) 부족을 포함한다. 한문으로 이번(理藩)은 '번의 사무를 관리하는 부서'라는 뜻이며, 만주어로는 툴러르기 골로 버 다사라 주르간(Tulergi golo be dasara jurgan)으로 '바깥 지역을 담당하는 기구'라는 뜻이다.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이를 영어로 'Court of Colonial Affairs' 또는 'Mongolian Superintendency'라고 번역했는데 이 책에서는 후자를 택했다. 정치-문화적 중화제국은 이러한 정치체뿐만 아니라 예부를 통해 중국과 교류하고 중국의 천자를 세계 최고의 군주로 여기는 인식을 공유하는 제II그룹의 외번도 포함한다(표 I.1). (31쪽.)

 

  종번 구조 안에서 주권, 국경, 신민은 청과 외번 사이에 복잡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1860년대 국제법과 그 안에 내재된 주권, 종주권 등 규범이 동아시아에 전파되고 독립의 촉매제 역할을 하면서 논쟁적 문제가 되었다. 중국과 외번 모두 수입된 법적 용어로 재고되고 재정의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책 2부에서 보여주듯이 '중국'과 외번으로 연결된 정치-문화적 중화제국은 당시에도 변함이 없었다. 국제법은 양측에 필요한 정치적 정통성을 부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1883년 베트남에서 프랑스와 벌인 청프전쟁, 1894년 조선에서 일본과 벌인 청일전쟁에 중국을 끌어들인 것은 영토적 중화제국이 아닌 정치-문화적 중화제국이었다. 1895년 일본이 패배시킨 것도 드러나지 않는 영토적 중화제국이 아니라 실재하는 정치-문화적 중화제국이었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청의 중화제국이 지닌 이중적 표상의 복잡성, 특히 청과 조선이 일본과 서양 국가에 조청관계를 법적으로 정의하려고 노력한 19세기 후반의 복잡성을 드러낸다. 1895년 이후 정치-문화적 제국은 번 속에 확장된 변경에서 중국의 지리적 국경으로 후퇴하기 시작했고, 결국 영토적 제국과 동일해졌다. 정치-문화적 제국의 쇠퇴로 중국 근대국가가 등장했다. (37쪽.)

 

  만주 정권은 새로 채택된 중국의 정치 담론을 이용하여 중국의 정치 철학인 종번 질서를 서서히 흡수하고, 정치적 틀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재조정했다. 명을 제외한 다른 나라달은 중국 황제와 비슷한 지위를 점한 칸에게 공물을 바쳐 후금의 외번 역할을 하였다. 이 준종번 제도는 1636년 후금의 통제 아래 있던 몽골의 16개국 왕공 49명이 조선에 보낸 한문 서신에서 자신들을 '금국외번몽고(金國外藩蒙古)'라고 부를 정도로 발전했으며, 이는 만주어로 툴러르기 골로이 몽고(tulergi goloi monngo, 외번으로서 몽골)와 같다. 같은 해 후금은 중국의 행정 개념에 근거하여 몽고아문(만주어 Monggo jurgan)을 세웠다. 이 부서는 예부와 유사한 기구로 정권이 몽골과의 관계를 변화시키고 신흥제국을 건설하여 통치하는 데 일조하였다.
  이러한 준종번 담론의 구축은 주로 후금 국경 안에서 이루어졌지만, 후금은 조선을 담론의 변혁을 뒷받침할 수 있는 최고의 외부 자원으로 여겼다. 양국 관계에서 후금은 최고 권력의 역할을 맡았고, 조선을 동생에서 속국 또는 외번으로 전환했다. 한중관계 연구자들은 만주족이 조선에 명확한 종번 조건을 부과한 1637년 제2차 만주족 침공[병자호란] 이후 위계 담론을 채택했다고 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실제 그 과정은 훨씬 이전에 시작되었다. 1630년대, 후금 학자들은 후금의 중화성을 확립하려고 중국 역사에서 화이지변을 조작할 수 있는 사상적 자원을 발굴하였다. (61~62쪽.)

 

  1401년 공식적으로 제도화된 명-조선 관계를 대체한 청-조선 종번관계의 수립은 청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주대 종번제도에 대한 명의 열렬한 지지는 청에서도 이 제도가 고전적이고 이상적인 교리와 직접 연결되어 있음을 의미했다. 1644년 이후 정치적 담론이 점차 발전하면서 만주 조정은 주대 종번제도와 관련된 좀 더 정교한 언어를 사용하여 조선과 관계를 규정하기 시작했다. 1649년 순치제는 효종을 책봉하는 고명(誥命)에서 '왕실'을 위한 '외번(外藩)'으로서 조선을 강조했다. 1659년 순치제는 현종 책봉 고명에서 주대 종번 책봉을 비유하는 전통적 용어인 '분모(分茅)'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한편 만주 조정은 조선을 전통적인 주대 오복(五服)론에 따라 조선을 '후복(候服, 만주어 jecen i golo)'으로 규정했다. 이러한 정의는 국왕의 지위를 중국의 모든 왕대신(王大臣), 각 성 총독과 순무의 지위와 동일시했다. 같은 맥락에서 청 황제와 관리들은 모두 조선 사신을 '외번 배신(外藩陪臣)'으로 간주했다. (72~73쪽.)

 

  여기서 이 책이 흔히 사용되는 영어 표현인 '조공체제(tribute system 또는 tributary system)'보다 한문 용어인 '종번(宗藩)'을 선호하는 이유를 더 설명할 필요가 있다. (...) '조공체제'라는 용어의 근본적 문제점은 종번체제에 함축된 의미의 일부만을 전달한다는 것이다. 중국에 조공 또는 공물을 바치려고 사절을 팍녀하는 것은 청과 번의 정기적인 의례 교류에서 지속된 활동으로 종번체제의 가장 가시적이고 과장된 부분이다. '조공체제'라는 용어는 전체 메커니즘을 중국 중심의 무역 구조로 축소한다. 피터 퍼듀(Peter C. Perdue)가 청-준가르 관계 연구에서 지적했듯이 "청의 '조공체제'를 과도하게 일반화하는 것은 청의 무역에서 발견되는 다양한 의례적·경제적·외교적 요소의 거대한 다양성을 무시하고 하나의 무역 관계를 정통적·규범적 관계로 단정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조공을 전체 구조와 핵심적 성격을 나타내는 만능 개념으로 느슨하게 사용해서는 안 된다. 물론 '조공체제'라는 용어가 개념적 해석 도구로 분석적 유용성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이는 중화질서의 관례가 명·청대에 그랬던 것처럼 성숙하고 제도적이며 체계적이었는지에 대한 논쟁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74~76쪽.)

 

  (...) 청의 첫 번째 유교적 외번인 조선은 만주족 정복자에게 청이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 표명하는 자원을 제공하는 데 독보적 역할을 했다. 1650년 초, 조선 국왕이 순치제에게 올린 표문에서는 청을 청 조정도 쓰길 꺼리는 '천조'로 불렀다. 청 중심의 종번 세계에서 조선의 본질적 역할은 1637년부터 1643년까지 7년과 1644년부터 1894년까지 251년의 두 부분으로 역사적 단계를 구분할 수 있다. 첫 단계에서 조선은 명과 조선 사이에서 2세기 이상 작동해 온 중한 종번체제를 분명하게 공식화하고, 제도화된 원칙을 준수함으로써 청의 외번 역할을 시작했다. 1장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청은 중한관계의 틀에서 명의 자리를 차지해 정체성을 전환하는 중요한 움직임을 만들어 갈 수 있었고, 조선의 조공 사신이 심양을 자주 방문하면서 청은 중심성을 대외적으로 강조하고 실천하는 기회를 마련했다.
  1644년 이후, 청은 명나라식의 전국적 정권으로 급부상했고, 영토를 광범위하게 확장하면서 명의 번속으로 역할을 했던 안남, 유구, 남장(南掌, 라오스), 섬라, 소록(蘇祿, 필리핀), 면전(緬甸, 미얀마) 같은 여러 주변국과 관계를 관리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명으로부터 종번을 물려받은 청이 이제 해야 할 일은 종전 제도를 자신의 기준에 따라 재개하고 재구성하는 것이었다. 이 점에서 청은 1630년대부터 조선과의 제도화된 교류로 귀중한 경험을 쌓았고, 청 중심의 성숙한 종번체제 모델을 개발했다. 조선 모델은 주변 국가나 정치체가 청으로부터 책봉을 받고, 청의 책력과 연호를 채택하고, 청에 조공 사신을 파견하여 조선을 따라 청 중심 체제에 편입되는 길을 제시했다. 조선 모델은 의례를 중심으로 한 것이었다. 청-조선 종번관계는 1637년 만주족의 군사적 정복으로 시작되었다. 그 결과 세자와 또 다른 왕자, 고위 관원의 아들이 심양에 인질로 억류되었지만, 1644년 청이 인질을 풀어주면서 불편한 상황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또한 청은 조선에 요구하는 공물을 점차 줄여 1730년대 말에는 공물이 1630년대 말의 10분의 1도 되지 않았다. 이제 공물은 정치적 종속의 상징에 불과했다. 공물과 함께 위계화된 종번질서와 청의 새로운 정체성을 드러내는 고도화되고 점점 정교화된 의례로 이행하는 것이었다. (91~92쪽.)

 

  홍대용은 1731년 한성에서 조선 세도가의 아들로 태어나 당시 최고의 학자인 김원행(金元行, 1702~1772) 밑에서 공부했다. 1765년 말 숙부가 북경으로 가는 연공사에 임명되자 홍대용으느 사신단의 자제군관으로 사행에 참여했다. 홍대용은 청을 오랑캐의 나라로 여겼지만, 사행에 대한 기대와 함께 중국인들과 교류하길 열망했다. 1766년 초 북경에 도착한 홍대용은 필담으로 중국 문인들과 교류하는 데 거의 모든 시간과 정력을 쏟았다. 이러한 대화에서 그는 청이 조선의 눈에 아무리 야만적일지라도 문명화된 '중국'이며, 조선이 아무리 마음속으로 우월하다고 생각하더라도 오랑캐의 범주에 속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홍대용은 다른 조선인들처럼 명나라 스타일의 옷과 모자를 착용하는 조선의 의관을 매우 자랑스러워했고, 만주족의 두발 모양과 예복을 경시했다. 그의 의관은 그가 중국 문화의 진정한 방식을 지키고 있다는 표식이었다. 북경에 체류하던 초반 몇 주 동안 홍대용은 중국 지식인들과 나눈 대화에서 청에 대한 조선의 문화적 우월성을 강조하고자 자신의 의관을 자주 활용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홍대용은 다른 청나라 지식인 특히 엄성, 반정균(潘庭筠, 1743~?)과 대화를 나누게 되었고, 잘 배운 문인들은 그의 시각을 극적으로 변화시켰다. (138~139쪽.)

 

  그러나 서양 국가들을 오랑캐로 간주하던 청의 오랜 관념이 무너졌다고 해서 만주 조정과 조선 조정을 연결하던 종번체제가 무너진 것은 아니었다. 국제법으로 재정의하거나 제한할 수 없는 공생적 정당성은 19세기 중반에도 여전히 대내외 정책과 행태에 강하게 영향을 미쳤다. 이런 의미에서 1842년부터 1860년까지 두 차례의 아편전쟁과 체결된 조약들은 동양과 서양의 이분법적 구분처럼 '구시대의 황혼'과 '새 시대의 여명'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외부로부터 강요된 조약항 네트워크와 청 내부의 오랜 전통인 종번제도가 공존하는 이중 체제를 형성했으며, 많은 학자가 소급하여 추정하듯 전자가 즉시 후자를 대체하거나 통합하기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1860년대 이후 조선과 서양 국가 사이에 접촉이 빈번해지면서 북경과 한성 모두 종번관계와 조선의 국제적 지위, 국가 주권을 규정하는 것이 점점 어려워졌다. 양국은 모두 조선을 자주의 권리가 있는 중국의 속국 또는 속방이라고 한목소리로 주장했지만, 중국과 조약을 맺은 상대국들은 조선을 중국과 단순한 의례적 관계를 유지하는 독립적 주권을 가진 국가로 다뤘다. (...) (180쪽.)

 

  1876년 3월 22일, 일본 외무성은 「강화도조약」의 내용을 공개하고 도쿄에 있는 각국 공사에게 영문판을 배포했다. (...)
  일문판의 첫 문장은 "朝鮮國ハ自主ノ邦ニシテ日本國ト平等ノ權ヲ保有セリ"(문자 그대로, 조선국은 자주권을 가진 국가로서 일본과 동등한 권리를 보유한다)로 이 문장의 한문판은 '朝鮮國自主之邦, 保有與日本國平等之權"으로 같은 의미이다. 외무성이 의도적으로 자주를 '독립'으로, 자주지방을 '독립국'으로 번역한 것이 분명하다. 더 중요한 점은 영어 번역이 한자 '권(權)'을 단순히 권리가 아닌 '주권'으로 번역했다는 사실이다. 문자 그대로 조선이 "일본과 동등한 권리를 보유한다"라고 기술된 문장의 뒷부분을 조선이 "일본과 동일한 주권을 가진다"로 주장한 것이다. 이 조항 뒷부분에서 외무성은 문자 그대로 '동등한 의례' 또는 '동등한 예의'라는 뜻의 '동등지례(同等之禮)'를 '평등과 예의'로 번역했다. 외무성은 '동등'이라는 용어를 형용사에서 명사로 바꿔 첫 문장의 번역에 내포된 주장을 강화했다.
  도쿄의 서양 공사들은 한문이나 일본어를 읽을 수 없었으므로 외무성은 영어 번역본에 조선의 주권과 독립을 정의하여 영어권 세계를 오도하고자 했을 것이다. (...) 물론 조선의 주권적 권리 또는 주권은 일본의 교묘한 영어 번역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조선은 항상 자신의 영토에서 주권을 누렸지만, 그 주권은 종번 세계에서 중국 황제의 통치권에 속했다. 조선이 미국과 조약을 체결한 1882년에 이르러서야 조선의 '주권'이 처음으로 한문과 영문으로 명확하게 정의되었다. 1876년 당시 북경과 한성 모두 조약의 영문 번역으로 발생할 문제를 예견하지 못했다. 일본은 조약으로 조선의 지위 문제를 성공적으로 해결했으며, 이 문제에 대한 논쟁에서 북경보다 우위에 있다고 믿었다. 모리는 북경에서 자신의 임무에 관한 최종 보고서에서 자축했다. 그는 "간단히 말하면, 총리아문은 내 주장을 납득했습니다. ...... 논쟁의 유일한 목적은 중국과 조선의 관계를 단절하는 것이었고, 나는 그것을 달성했습니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곧 자신이 너무 낙관적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209~211쪽.)

 

  (...) 1882년 7월 23일, 한성에서 임오군란이 일어났다. 극심한 가뭄으로 군대에 쌀을 불공평하게 배급했다는 이유였다. 무위영 소속 군인 수백 명은 일본공사관을 공격하여 1881년부터 조선의 별기군을 가르치던 호리모토 레이조(掘本禮造) 중위를 비롯해 일본인 여러 명을 살해했다. 궁궐을 점령한 반란군은 국왕[고종]을 포로로 잡고 조정에서 당쟁을 벌이던 민씨 가문의 주축인 고위 관리 여러 명을 살해했다. (...)
  북경은 즉시 가부장적 권한을 행사하기로 결정했다. 광서제는 총리아문과 장수성에게 마건충과 정여창의 지휘로 조선에 군대를 보내 "작은 나라를 소중히 여기고[字小]" "일본의 음모"를 저지하며 "일본이을 함께 보호하라"라고 지시했다. (...)
  청으로서는 속국에 군대를 파견하는 것이 합법적이고 필요한 일이었다. (...) 여서창은 요시다에게 보낸 문서에서 이 점을 되새기며 중국의 행동은 '자소 원칙'을 따른 것이라고 말했다. 청은 "속방을 위해 반란을 진압함"과 동시에 한성에 있는 일본공사관을 보호해야 했다. 여서창은 청의 작전 근거를 설명하려고 비유를 활용했다. '가장'은 '아들이나 형제 집(子弟家)'에서 '타인'의 소유물이 왜 도난당했는지 조사할 의무가 있었다. 가장은 중국이고 아들이나 형제 집은 조선이며 타인은 일본이다. 이 비유는 종번의 세계 안에서 조선에 대한 청의 역할을 구체화했다. 또한 반란에 대한 청의 이해와 조선 파병 결정이 국제법과 무관하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줬다. (231~234쪽.)

 

  청은 조선과 장정을 체결함으로써 1882년 봄 조선 국왕이 요구했던 사항을 대부분 이행하여 1637년 이래 245년 동안 지속되어온 어떤 관례를 변경하거나 영구적으로 폐지했다. 권력정치 이론을 수용하는 학자들은 지정학적으로 우세한 청이 이 조약을 조선에 대한 통제권과 종주권을 강화하고 한반도에서 상업적 이익까지 추구하는 또 다른 제국주의 열강이 되는 도구로 삼았다고 해석하는 것을 선호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중국은 서양으로부터 수용한 개념과 동일한 방식으로 조선에 '다자 제국주의(multilateral imperialism)'를 도입한 것이다. 그러나 1880년대 중국의 만주 조정은 대조선 정책에서 여전히 전통적인 종번 규범과 선례를 주로 따랐으며, 이는 종종 국제법은 물론 중국 지방 관리들의 청과 조선 간 교류에 대한 실질적 우려를 자아내고 모순을 빚기도 했다. (...)
  젊은 광서제는 1882년 「중국조선상민수륙무역장정」을 승인하면서 전형적인 유학적 어조로 "조선은 우리의 속국이며 저 멀리 동방 오랑캐로 존재한다(朝鮮爲我屬國, 僻在東夷)"라고 강조했다. 화이지변의 전통적 담론은 적어도 핵심 지도자들의 마음속에 확고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 이런 의미에서 중국의 근대국가 전환은 보편적인 정치-문화적 중화제국과 복잡하게 얽혀 이루어졌다. (240~242쪽.)

 

  (...) 청 측 대표 이홍장은 일본 측 대표 이토 히로부미, 무츠 무네미츠(陸奥宗光, 1844~1897)와 고통스러운 협상 끝에 일본 시모노세키에서 평화 조약에 서명했다.
  조약문은 한문, 일문, 영문으로 작성되었다. 일본이 작성한 초안의 제1조는 "중국은 조선국의 완전무결한 독립과 자주(完全無缺之獨立自主)를 확실히 인정한다. 따라서 이러한 독립과 자주를 훼손하는 중국에 대한 조선의 조공, 의례 등은 완전히 중단한다"라고 명시했다. 한문과 읾ㄴ만으로 작성된 1876년 「강화도조약」과 달리 영문판 「시모노세키조약」은 조선의 "완전무결한 독립과 자치"를 명시적으로 규정하여 한문판이나 일문판에서 조선의 지위에 대한 모호함을 제거했다. 또한 조약 용어는 지난 2세기 동안 청의 변화를 반영했다. 조약에서 '대청'은 'China'와 '중국(中國)'과 온전히 동일하지만, 일무판과 중문판의 서문 말미에는 청을 '대일본제국'에 대응하는 한자인 '대청제국'으로 표기했다. 일무판에서는 청을 '청국(淸國)'이라고 불렀지만, 중문판에서는 '중국(中國)'으로, 영문판에서는 'China'로 칭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조약으로 종결된 것은 1637년부터 이어져 온 청-조선 조공관계뿐만 아니라 기자(箕子)에서 시작된 일반적인 중한 종번 관계도 종언한 것이다. (294~295쪽.)

 

  실제로 한국(대한제국)과 그 군주를 어떻게 불러야 할지는 중국에 하나의 도전이 되었다. 종국에 광서제의 지시에 따라 「시모노세키조약」 제1조에 근거해 서수붕의 신임장 초안을 작성한 사람은 전 주미대사였던 장음환이었다. 1880년대 조선 문제에 깊이 관여했던 미건충은 몇 가지 수정을 제안했다. 신임장의 첫 문장은 "대청국의 대황제는 대한국의 대황제께 정중히 인사드린다"였다. '대군주'라는 용어는 중국의 '대황제'에 비해 국왕의 열등한 지위를 나타내며, 신임장 초안에서는 여전히 청을 한국보다 높인 전통적 존칭 형식을 수정하여 사용하였다.
  광서제는 장음환이 제안한 형식이 싫었지만, 그 자신도 한국과 그 군주를 어떻게 지칭해야 할지 난감했다. 황제가 장음환에게 우려를 표하자 장음환은 조선이 중국에 알리지 않고 '대한국'으로 국호를 바꿨기 때문에 신임장 초안은 조선의 국내 변화에 따른 것이라기보다는 「시모노세키조약」에 의거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후 황제는 당소의에게 영국, 일본, 러시아는 조선에 보내는 신임장에 '대군주'와 '대황제' 중 어떤 용어를 사용했는지 조사하라고 지시했다. 이는 중국의 신임장도 다른 나라들이 채택한 관례를 따르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황제의 개방적 태도 덕분에 최종본에서는 한국 군주를 '대황제'로 칭하고 '대청'과 '대한국'을 같은 줄에 배치했다. 1902년 초대 청국 주재 한국 공사가 광서제에게 제출한 신임장도 이와 같은 형식을 채택했다. 이러한 존칭의 변화는 1637년 이후 처음이었고, 청-조선 관계의 분수령이 되었다. (303~304쪽.)

 

교정. 제1판 1쇄

227쪽 밑에서2줄 : 팔궤를 -> 팔괘를

273쪽 4줄 : 1855년 -> 1885년

295쪽 8줄 : '대일본제국에' -> '대일본제국'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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