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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 그 사이의 한국 (앙드레 슈미드, 휴머니스트, 2007.)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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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 그 사이의 한국 (앙드레 슈미드, 휴머니스트, 2007.)

Dog君 2008. 7. 11.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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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이 블로그에 글을 쓸 때마다 의문이 생기는 것 중 하나는 글을 쓰는 족족 이올린에서 '자세히보기' 히트수가 꽤나 올라간다는 것. 실제로 방문자 수가 그렇게 되는 것 같지도 않은데, 되지도 않는 글 후려갈겨도 대충 20히트를 넘기는 수준. 이미지가 포함되어 있거나 서평 같은걸 쓰면 좀 더 올라가는 편인데, 그 덕에 가끔씩 이올린에 최근 추천글로 올라가곤 한다.

0-2. 운이 좋았던지 지난번에 썼던 '조선/한국의 내셔널리즘과 소국의식' 서평은 무려 70히트 돌파. ㅡㅡa 근데 이건 최근 추천글에 안 올라가더라. 왜일까 생각해보니 아마도 본문에 섞어쓴 쌍시옷과 욕설 때문이 아닌가 싶다만은... 아, 그러고보니 나도 어느새 히트수에 집착을... 아아아. 어쨌든 이번 리뷰에는 최대한 정갈한 언어로다가...

1. 주변환경이 그래서인지 그 놈의 내셔널리즘에 대해서 진짜 허벌나게 고민과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뭐 자세한 고민 내용은 바로 아래의 '조선/한국의 내셔널리즘과 소국의식' 서평을 보시면 되고... 암튼 이 책도 근대 한국의 내셔널리즘에 대한 또 하나의 이야기.

2. 저자인 앙드레 슈미드가 근대 한국의 내셔널리즘을 포착하기 위해 선택한 수단은 '신문'이다. 당대 최고 지식인들의 담론이 총집결된 신문은 그 시기의 최첨단 사상들과 논의들이 오고가는 장場이었다. '민족' 혹은 '국민'이라는 낯선 개념으로 사회를 재편해야 했던 지식인들의 욕망과 의식들이 신문에 녹아있는 것은 자명한 이치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민족 형성이라는 주제에 집중하여 방대한 자료를 꼼꼼하게 독해한 저자의 노력에는 일단 박수를 보낸다.

3-1. 근대 내셔널리즘의 형성을 탐구하는 것은 사실 연구자로 하여금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만든다.

  민족주의와 식민주의는 서로 모순되는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근대 자본주의를 승인한다는 점에서 민족문화에 대한 역사적 이해와 접근에서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일본이 생산한 한국 관련 지식은 대부분 한국 지식인들이 민족을 사유하며 사용한 바로 그 단어, '문명화'라는 틀 속에서 형성되었다. (중략) 다만 한국으로서는 '계몽과 문명화'에 대해 일본과 동일한 약속을 공유하는 것이 주권을 공고히 하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에서 생산한 지식이 한국의 판단처럼 악의 없는 것만은 아니었다는 것이 곧 밝혀지게 되었다. (p. 72.)

  오늘날 민족주의와 세계화는 종종 서로 반대되거나 배타적인 과정으로 인식되지만,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한국에서는 그 두 개념이 상호 보완적인 개념이었다. 즉 민족주의는 한반도가 세계 자본주의 질서와 세계화의 조류에 포함되는 것을 가속화시키는 수단이었다. 특히 신학문은 민족과 그 정체성에 대한 근본적인 사고의 전환을 촉진시켰다. 이 시대에는 '글로벌리즘과 내셔널리즘의 결합도가 얼마나 높은가'에 다라 문명화의 수준이 결정되었다. 문명개화라는 개념을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널리 퍼뜨림으로써 한반도의 시공간적 정의가 역사적으로 크게 변화했다. 이제 네이션이라는 개념을 수용함으로써 한국은, 마치 원래부터 세계사의 과정에 참여해온 것처럼, 전 세계 모든 민족 공동체의 일원으로 보일 수 있게 되었다. (p. 110.)

  전자의 인용문이 내셔널리즘의 음험한 통합의 의도 혹은 근대가 던져주는 독배와 같은 성질을 나타낸다면, 후자의 인용문은 이미 네이션-스테이트라는 단위로 큰 틀거리가 짜여져버린 세계 속에서 현실적으로 정치적, 이념적 독립성을 가지기 어려운 피억압 민중들이 내셔널리즘을 선택할 수 밖에 없는 불가피성을 나타낸다 하겠다.

3-2. 내가 줄타기라고 표현한 것은 이 두 내용 간의 균형을 찾는 것이 근대 내셔널리즘 연구의 최대 난제 혹은 목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전자와 같은 입장에 투철하게 되면 당대의 현실적 불가피성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지나치게 현재적인 관점이 될 우려가 있다. (박노자 식의 탈민족 논의가 현실 사회에 대해 보이는 비교적 정확한 통찰력이 역사 연구 속에서는 전혀 그렇지 못하다는 점은 이를 반증한다.) 하지만 반대로 내셔널리즘의 불가피성만을 강조하게 되면 내셔널리즘이 궁극적으로는 지배 이데올로기로 기능하는 경우가 더 많다는 역사적 경험을 무시하는 한편 역사서술을 내셔널리즘의 내러티브에 가둬버리는 결과로 귀결될 수 있다. (박노자 식의 논의와 반대로 내셔널리즘 내러티브가 권력을 정당화하는 보수적 기제로 전화轉化하곤 했다는 점을 생각하자.)

4. 사실 이 책이 그런 점에서 양자의 건강한 접점을 도출했다고 보기는 조금 어려운 면이 있다. 결론은 확실히 전자 쪽으로 기울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다음의 글은 (여기서 말하는 로자 룩셈부르크 말고도) 근대 내셔널리즘 연구자들 또한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역사는 민족주의적 본능이 국제주의적 의식보다 훨씬 더 강력한 대중적 힘을 갖는다는 것을, 심지어는 사회주의 사회에서조차 그렇다는 것을 입증한 바 있다. 로자 자신 또한 "본능적 충동은 교육으로 얻은 모든 지혜보다 강하다"고 토로한 바 있지만, 정작 이 교훈을 민족문제에는 적용시키지 않았다. (임지현, 「로자 룩셈부르크와 민족문제」, 『역사비평』42, 역사비평사, 1998.)

  물론 여기서도 민족주의가 과연 '본능'이냐고 비판할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만은... 그 부분은 머리 아프니까 일단 패스하고 다음에 얘기하고.

5-1.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을 흔한 근대 내셔널리즘 비판서 정도로 격하시키고 싶은 생각은 없다. 내셔널리즘 형성이라는 일관된 관점에서 방대한 분량의 신문을 꼼꼼하게 분석했다는 점은 그 성실성은 물론이고 방법론의 측면에서도 (특히 한국의) 연구자들이 본받을 부분이 많다고 하겠다. 좀 더 참신하고 성실한 연구결과들이 더 많이 쏟아져서 근대 내셔널리즘에 대한 논의의 다양성을 더 넓혀주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5-2. 이 책 얘기를 하면서 꼭 하고 싶었던 얘기 중 하나가 번역의 충실함이다. 그렇게 많은 책을 읽은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지금까지 내가 읽어본 번역서 중에서 가장 훌륭한 번역이라고 주저없이 말하고 싶다. 저자의 오류를 일일이 바로잡은 것은 물론이고 함께 참고할만한 다른 신문내용까지 꼼꼼하게 추가한 번역자의 성실함에 감탄을 금할 수 없다. 위에 말한 내용의 성실함과 함께 번역의 성실함이라는 점에서 단연 탑클래스.

2012년 2월 21일 추가. 며칠 전에 이 글로 링크가 걸린 것을 확인했습니다. (티스토리에는 그런 기능이 있죠. 더욱이 방문자도 별로 없는 블로그라 바로 티가 납니다. ㅎㅎㅎ) 어느 세미나팀에서 이 책 관련하야 세미나를 진행하시면서 제 글을 링크하신 것 같습니다. 부족한 글을 좋게 평가해주신 것 같아 감사할 따름입니다만 이 글은 오래 전에 쓴 글이라 오류도 많고 잘못 지적한 부분도 꽤나 있습니다. 어차피 보는 사람도 없는 블로그라 굳이 고칠 필요를 느끼지는 못했는데 이 글을 참고하시는 분이 계시는걸 알면서도 그런 오류를 그냥 내버려두는 것도 양심상 해서는 안 되는 일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래에 첨부한 논문은 '제국 그 사이의 한국' 서평논문 중에서는 (제가 보기에) 가장 낫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짜임새도 짜임새이거니와 다른 서평논문에 대한 정리 및 평가까지 포함하고 있어서 여러모로 참고할 가치가 높다고 생각합니다. 찾아보니 RISS에는 안 나오길래 저자가 보내신 한글파일을 PDF로 변환하여 여기에 올려둡니다. 제가 별 고민없이 끄적거린 글보다는 이쪽이 더 도움이 될거라 생각합니다. (이 글을 보실지 어떨지는 모르지만) 세미나에 참고가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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