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g君 Blues...
총, 균, 쇠 (재레드 다이아몬드, 문학사상사, 2005.) 본문
1-1. 책 읽기를 즐기지만 막상 내 독서리스트를 살펴 보면 의외로 허술하기 짝이 없다. 역사학 전공자라면 대학교 1학년 1학기 때 진즉에 다 읽었을 것 같은 E. H. Carr의 '역사란 무엇인가'는 석사과정에 입학하고도 한참 있다가 읽었고, '한국사신론'은 여태 첫 페이지도 들춰보지 않았다. 뭐 그 외에 또 얼마나 많은 고전들을 안 보고 그냥 넘어갔는지 일일이 꼽기도 겁난다야.
1-2. 꽤 오래 전에 형의 책꽂이 꽂혀 있던 것을 처음 본 후로 '총, 균, 쇠'의 명성을 그렇게나 많이 들었지만 여태 사보지도 않았다. 지난 학기였나 환경사 수업을 들으면서 '이번엔 꼭 읽어야지'하고 마음 먹고 나서도 1년 가까이 지난 후에야 이 책을 읽었으니, 아 독서편식 이거 언제쯤 고칠 수 있을라나.
2. 광고문구에 따르면 이 책이 서울대 도서대출 1위라고 하고, 내가 다니는 대학교에서도 이 책이 꽤 높은 순위를 기록하고 있는 걸 보면 그만큼 유명하기도 하고 여러 분야의 사람들에게 꽤 도움이 많이 되는 책이기도 한 것 같다. (물론, 근10년째 이 책만 주구장창 읽고 있는 걸 보면, 새 책 보러 서점에 안 가는 건 확실한 것 같다.) 얼마 전에는 이동진의 빨간 책방에도 소개됐으니까...
3. 이 책의 주제는 널리 알려진 것처럼 '기후결정론'으로 간단히 요약할 수 있기는 한데, 또 그렇다고 700쪽 가까운 책을 읽고 나서 '기후결정론' 다섯 글자만 가져가는 것도 그닥 바람직하지는 않다. 이 책에는 그런 큰 그림 외에도 이런저런 소소한 의문들, 예를 들어 '비옥한 초승달 지대나 중앙아메리카나 기후는 비슷한데도 어째서 중앙아메리카는 비옥한 초승달 지대만큼의 급속한 문명 발전을 하지 못했을까?'라든지, '야생 상태에서 쓰고 떫은 맛이 나는 것은 똑같은데 어째서 아몬드는 작물이 되었고 도토리는 그러지 못했을까?', '여러 수많은 짐승들 중에서 어떤 것은 가축이 되고 또 어떤 것은 그러지 못했을까?' 같은, 뭔가 좀 궁금하기도 하고 유치원 다니는 아들놈이 한 번쯤 물어볼 법 하지만 쉽게 답해주기는 어려운 뭐 그런 질문들이 가득 담겨 있다. 그 덕분에 어마무시한 두께에 비해 비교적 잘 읽히는 편이라고 하겠다.
4-1. 이 책을 쓴 저자의 의도도 그렇고, 이 책이 읽히는 방식도 그렇고,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의 감상도 다 그렇듯이, '총, 균, 쇠'는 유럽중심주의에 대한 실증적인 반론의 텍스트로 이해되곤 한다. 인터넷에 떠도는 서평들도 다 그렇고 말이지. 근데 책을 읽다보니, 이 책을 과연, 정말, 진짜로 그렇게만 독해할 수 있을지는 확신이 안 선다.
4-2. 결론부터 말하자면, '총, 균, 쇠'의 논리를 그대로 받아들일 때 작금의 서구 문명이 누리고 있는 '우위'는 결코 뒤집어 질 수가 없다. 그게 뭐 우연의 결과든 뭐 어쩌구저쩌구의 결과든 간에 말이다. 인간의 문명이 자연 환경에 따라 결정된다면, 지구 자전축이 한 98도쯤 비틀리지 않는 한 아프리카와 아시아와 아메리카에에 사는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이 모양 그 꼴대로 살아야 된다는 말이 되니까. 절이 싫으면 중이 나가듯이, 이 구조가 싫은 사람의 선택은 딱 하나, 우주선 타고 안드로메다 가세요.
4-3. '문명과 문명 사이의 차이가 인종적 차이 때문에 빚어진 것은 아니다'라는 주장이 있으니 인종주의에는 반대할 수 있겠지만 암만 생각해도 이걸 유럽중심주의에 반대하는 텍스트로만 독해할 수는 없겠다... 뭐 이런 뜻도 포함되어 있수.
5-1. 사실 작금의 서구문명이 누리고 있는 우위는 트리컨티넨탈에 대한 가공할 착취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아메리카에서 쏟아져 들어온 은이 있었기에 비로소 유럽의 상업계는 요동치기 시작했고, 유럽은 아프리카와 아시아를 거대한 식민지 시장으로 만들고서야 그를 바탕으로 거대한 부를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제임스 M. 블로트가 '역사학의 함정 유럽중심주의를 비판한다'에서 지적했던 것처럼, '총, 균, 쇠'에는 근대 유럽이 저지른 이 어마어마한 과정들이 생략되어 있다. 대신 그 자리에는 '우연'이나 '기후' 같은, 인간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요인들이 들어서 있다.
5-2. '총, 균, 쇠' 식으로 말한다면, 서구 문명의 우위는 인간이 탄생한 이래부터 차곡차곡 쌓아올려진 장구한 역사로 설명된다. 그런데 그게 정말 그럴까. 작금의 서구가 누리고 있는 우위라는 것이, 인간의 장구한 역사 속에서 볼 때 그저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견해들이 여기저기서 봇물 터지듯이 밀려나오는 이 시절에, '총, 균, 쇠' 식으로 세상을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사실에 정합하는지 솔직히 난 잘 모르겠다.
6. 굳이 하나 더 얘기하자면. 아까 3.에서 던졌던 질문들에 대한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답변은 결국 '우연'으로 집약된다. 어쩌다보니 초승달 지대엔 작물화 가능한 식물이 많았을 뿐이고, 어쩌다보니 아몬드에는 쓴 맛을 좌우하는 유전자 조합이 단순했고 뭐 그런 식이다. 이렇게 모든 걸 우연에 떠넘기다보니 정작 책을 다 읽고 나면 핫바지 방구 새듯이 남는 게 뭐 하나 없는 것 같은 느낌도 든다. 서문에서는 필연이 어쩌고저쩌고 하더니만 결국 그게 그거네 뭐.
7. 물론 뭐 블로트의 의견에 대해서도 이견의 여지가 없는 건 아니지만은, 막상 '총, 균, 쇠'를 읽고 나니 블로트의 의견이 좀 더 맞는 거 아닌가... 싶어서 지금 살짝 혼란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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