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百의 그림자 (황정은, 민음사, 2010.)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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百의 그림자 (황정은, 민음사, 2010.)

Dog君 2014. 7. 10. 14:12



1. 황정은 소설 속의 세계는 더할 나위 없이 차갑고 냉정하지만, 그 속의 사람들은 여리고 착하고 순하다. 세상에 대해 비관하고 아무런 기대도 걸지 않지만, 그래도 사람들에 대해서만은 희망하고 낙관하고 싶어하는, 그런 악착 같은 고집 같은 것이 느껴진다.


2. 이런 식의 소설/글을 읽다보면, 늘 한 가지 질문이 공통적으로 떠오른다. '대체 어디까지가 자기 자신의 경험일까?'


3. 책을 읽다가 표현이 좋다거나, (별 이유 없더라도) 인상에 남거나 하는 식으로, 어떻게든 어딘가에 정리해두고 싶은 부분을 블로그에 갈무리해둔다. 다른 때는 안 그랬는데, 유독 황정은의 글은 일단 인용하면 두세 페이지씩 길게 인용하게 된다. 뭔가 이유가 있을 터인데, 왜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


이 경우엔 다른 사람의 종이에 이름을 적어 준 대가로 얻은 빚입니다. 빚의 규모가 너무 커서 빚보다는 빚의 이자를 갚느라고 힘든 노동을 하는 와중에 아홉 식구의 생활비도 버는 생활을 하다가 소년 무재의 아버지의 그림자가 끝끝내 일어서고 말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느 비 오는 금요일 밤이었습니다. 소년 문재는 마루 끝에 앉아서 빗물이 좁은 마당으로 떨어져 바닥을 오목하게 뚫어 놓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때 소년 무재의 아버지가 구두에 진흙을 잔뜩 묻힌 모습을 하고 마당으로 들어왔습니다. 소년 무재는 아버지에게 인사를 건네지만 그는 창백한 얼굴로 다만 소년 무재를 바라보고 있다가 방으로 들어가서 눕습니다. 누가 말을 걸어도 뭐라 말하지 않고 밤이 될 때까지 천장을 바라보며 누워 있던 그는 이내, 그림자가 일어섰다고 말합니다. 선술집 앞에서 우산을 펼치다가 그도 모르는 틈에 일어선 그림자를 목격하고 말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림자를, 하고 어머니가 두려움에 질려서 숨을 들이마시고 말하는 것을 소년 무재는 듣습니다. 그림자가 일어서고 말았다니 그래서 그림자를 따라갔나요, 당신, 그림자를 따라갔나요, 라고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소년 무재의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입니다. 얼마, 얼마나 따라갔나요, 라고 소년 무재의 어머니가 묻자 그는 조금 따라갔어, 아주 조금만 따라갔어, 라고 대답합니다. 소년 무재의 어머니는 자식들을 향해 돌아앉아서 눈물을 닦습니다. 소년 무재의 아버지가 그녀를 돌아보며 말했습니다. 당신 그렇게 울지 마요, 조심할게요. 조심할 건가요. 다음번에 일어서도라도 깊이 따라가지는 않도록 조심할게요. 깊거나 말거나 따라가지를 말아야죠, 애초에 따라가지를 말아야요. 따라가지 않을게요. 약속해 줄 건가요. 약속할게, 이렇게 약속할게요, 라고 말했지만 그날 이후로 소년 무재의 아버지는 아무래도 남몰래 그림자를 따라가거나 하는 듯 별로 먹지도 않고 말하지도 않으면서 나날이 핼쑥해지는 것이었습니다. 어딘가에서 다름없는 자신의 모습을 목격했다면 그것은 그림자, 그림자라는 것은 한번 일어서기 시작하면 참으로 집요하기 때문에 그 몸은 만사 끝장, 일단 일어선 그림자를 따라가지 않고는 배겨 낼 수 없으니 살 수가 없다, 는 등의 이야기를 아무 곳에서나 불쑥 말하곤 하다가 그는 귀신 같은 모습이 되어 죽고 맙니다. (pp. 18~20.)


여 씨 아저씨가 말을 이었다.

요즘도 이따금 일어서곤 하는데, 나는 그림자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야. 저런 건 아무것도 아니다, 라고 생각하니까 견딜 만해서 말이야. 그게 실은 아무것도 아닌 것은 아니지만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가끔은 아무것도 아닌 것 같고, 시간이 좀 지나고 보니 그게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이 맞는 것 같고 말이지. 그림자라는 건 일어서기도 하고 드러눕기도 하고, 그렇잖아? 물론 조금 아슬아슬하기는 하지. 아무것도 아니지만 어느 순간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닌 게 되어 버리면 그때는 끝장이랄까, 끝 간 데 없이 끌려가고 말 것 같다는 느낌이 들어서. (p. 46)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의 아는 사람을 통해서 여 씨 아저씨의 수리실에 일자리를 알아봐 준 것은 아버지였다. 나는 열일곱 살 때 학교를 그만두었다. 따돌림이 있었다. 아이들 일이라고 간단하게 말할 수는 없는 일들을 더러 겪었다. 괴롭히는 처지에서도 괴롭히는 것이 지루해지고 귀찮아지는 날이 올 거라고 생각하며 학교를 다니고 있었는데 어느 날 길에서 동급생과 마주쳤다. 길 저편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괴롭히는 무리 안에서도 괴롭힘이 유난했던 아이라서 나는 틀림없이 시비를 걸어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긴장한 채로 고개를 들고 걸어갔는데 막상 그쪽에선 쑥스럽다는 듯 고개를 숙이고 지나갔다. 그때는 그런가 보다, 하며 나도 지나갔으나 이튿날 무리 속에 섞여서 열심히 괴롭혀 대는 그녀를 보면서 뭔가가 맥없이 무너졌다. 이런 잇아한 악의를 무심한 듯 버티는 것도 무상해지고, 무리 틈에서 더는 애를 쓰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 가방을 가지고 학교를 나섰다. 바보들, 바보들, 하고 생각하고 있다가 이튿날부터 학교에 가지 않았다. 등교할 시간이 되었는데도 집에 머물러 있는 것을 보고도 아버지는 내게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런 날이 이어져 얼추 한 달이 되어 오히려 내 쪽에서 침묵을 견디다 못해 이제 더는 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말해도 그래, 하고는 그만이었다.

일을 해 보고 싶다고 말해도 그래, 하고는 그만이었고 근처에 방을 얻어서 짐을 먼저 보낸 뒤에 현관에서 갈게요, 라고 했을 때도 그래, 하고는 그만이었다.

먼 데서 찌이, 하고 한꺼번에 매미들이 울자 계단 쪽에서 끄...... 하고 따라 울었다. (pp. 82~84.)


오무사라고, 할아버지가 전구를 파는 가게인데요. 전구라고 해서 흔히 사용되는 알전구 같은 것이 아니고, 한 개에 이십 원, 오십 원, 백 원가량 하는, 전자 제품에 들어가는 조그만 전구들이거든요. 오무사에서 이런 전구를 사고 보면 반드시 한 개가 더 들어 있어요. 이십 개를 사면 이십일 개, 사십 개를 사면 사십일 개, 오십 개를 사면 오십일 개, 백 개를 사면 백한 개, 하며 매번 살 때마다 한 개가 더 들어 있는 거예요.

잘못 세는 것은 아닐까요?

저도 그렇게 생각했는데요, 하나, 뿐이지만 반드시 하나 더, 가 반복되다 보니 우연은 아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어느 날 물어보았어요. 할아버지가 전구를 세다 말고 나를 빤히 보시더라고요. 무너가 잘못 물었나 보다, 하면서 긴장하고 있는데 가만히 보니 입을 조금씩 움직이고 계세요. 말하려고 애를 쓰는 것처럼. 그러다 한참 만에 말씀하시길, 가지고 가는 길에 깨질 수도 있고, 불량품도 있을 수 있는데, 오무사 위치가 멀어서 손님더라 왔다 갔다 하지 말라고 한 개를 더 넣어 준다는 것이었어요. 나는 그것을 듣고 뭐랄까, 순정하게 마음이 흔들렸다고나 할까, 왜냐하면 무재 씨, 원 플러스 원이라는 것도 있잖아요. 대형 마트 같은 곳에서, 무재 씨도 그런 것을 사본 적 있나요.

가끔은.

하나를 사면 똑같은 것을 하나 더 준다는 그것을 사고 보면 이득이라는 생각은 들지만, 그게 배려라거나 고려라는 생각은 어째선지 들지 않고요.

그러고 보니.

오무사의 경우엔 조그맣고 값싼 하나일 뿐이지만, 귀한 덤을 받는 듯해서, 나는 좋았어요. (pp. 94~95.)


그 속에서 전구를 파는 노인은 숱 많은 머리칼이 모두 하얗게 세어 버린 칠십 대 노인이었다. 그는 벽돌만 한 골판지 상자들이 빼곡하게 들어찬 선반을 등진 채로 나무 책상과 걸상을 놓아두고 앉아 있었다. 침침하게 머리 위를 밝히고 있는 알전구 불빛 속에서 그는 언제나 무언가를 들여다보며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다가 손님이 찾아와서 어떤 종류의 전구를 달라고 말하면 대답도 없이 서서히 걸상을 밀며 일어났다. 서두르는 법 없이 그렇다고 망설이는 법도 없이 선반의 한 지점으로 부들거리며 다가가서, 어느 것 하나 새것이 아닌 골판지나 마분지 상자들 틈에서 벽돌을 뽑아내듯 천천히 상자 하나를 뽑아내고 그것을 책상으로 가져와서 일단 내려 둔 뒤엔 너덜너덜한 뚜껑을 젖혀 두고, 이번엔 다른 선반으로 걸어가서 손바닥만 한 비닐  봉투 한 장을 가지고 책상으로 돌아온 뒤, 시간을 들려 정성껏 봉투를 벌려서 입구를 돟그랗게 만들어 둔 다음에, 오른손을 상자에 넣어서 손톱만 한 전구를 한 움큼 쥐고 나서, 왼손에 들린 채로 대기하고 있는 봉투 속으로 한 번에 한 개씩, 언젠가 내가 다른 손님들 틈에서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가 재미있게 얻어들은 바에 의하면, 제비 새끼 주둥이에 뻥 과자 주듯, 떨어뜨렸다.

바쁜 일로 서두르며 오무사까지 걸어갔어도 그거 주세요, 하고 난 뒤로는 오로지 그의 패턴으로만 시간이 흘렀기 때문에 오무사를 방문한 손님들은 입구에서 넋을 놓고 선 채로 가게 안을 들여다보거나, 근처 구멍가게에서 삶은 계란을 까먹으며 기다렸다가 전구를 받아 가곤 했다. 노인은 느릿해도 대단히 집중해서 움직였으며 그 움직임엔 기품마저 배어 있어서, 손님의 처지에선 재촉할 틈이 없었다. 대단히 성급한 사람 중에 몇 마디 투덜거리는 경우는 있어도 다른 곳으로 가 버리는 경우는 없었다. 오무사의 상자들이 워낙 오래전부터 쌓여 왔던 것들이라 어디서도 구해 볼 수 없는 전구를 거기서는 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잘 보면 볼펜으로 조그만 표시가 된 상자들도 있었지만 표시조차 없는 상자들이 더 많아서,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아는 사람은 그곳의 주인뿐이었고, 사실 오무사의 노인은 어떤 전구를 달라고 해도 헤매는 법 없이 곧장, 느릿느릿하기는 해도 그 전구가 담긴 상자가 있는 선반을 향해 걸어갔다.

할아버지가 죽고 나면 전구는 다 어떻게 되나. 그가 없으면 도대체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누가 알까. 오래되어서 귀한 것을 오래되었다고 모두 버리지는 않을까. 오무사에 다녀오고 나면 이런 생각들로 나는 막막해지곤 했는데, 수리실을 찾아오는 사람들 중엔 수리실과 여 씨 아저씨를 두고 이것과 비슷한 말을 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어서 나는 그때마다 수리실의 내력을 생각해 보고는 했다.

어느 날 전구를 사러 내려갔더니 노인도 선반도 없었다.

텅 비어서, 어두운 벽만 남아 있었다.

돌아가셨구나.

하고 생각했다.

수리실로 돌아가서 소식을 전하자, 오무사 노인이 돌아셨나 보다고 여 씨 아저씨도 한동안 착잡한 기색이었다. 사고자 했던 전구는 더는 재고가 없던 것이라 이 전구가 필요한 수리는 하지 못하고 돌려보냈다. 재고가 없고 나니 같은 전구를 필요로 하는 수리가 부쩍 늘어나서 여 씨 아저씨와 다는 이상하다고, 드는 자리는 몰라도 나는 자리는 이렇게 표가 나는 법이라고, 모든 게 아쉽다고, 말을 나누는 일이 종종 있었다. (pp. 102~105.)


밤길에


간 두 사람이 누군가 만나기를 소망


한다



모두 건강하고


건강하길 <작가의 말> 中 (p. 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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