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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 (구범진, 까치, 2019.)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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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 (구범진, 까치, 2019.)

Dog君 2021. 5. 20. 07:41

 

  설사 당시의 조선이 나름대로 전쟁을 준비했다고 하더라도, (...) 참담한 패전의 원인을 오직 조선 위정자들의 잘못에서 찾는 전쟁 서사에는 그런 준비에 대한 이야기가 비집고 들어올 틈이 존재하기 어렵다. 결국 무용지물이 된 전쟁 준비에 대한 이야기는 참담한 결과와 도무지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생사가 다 그렇듯이, 오직 최악의 전쟁준비만이 최악의 전쟁 실패를 낳는다는 보장은 없다. 최악의 준비가 최악의 결과를 낳는 것은 물론이겠지만, 최선의 준비에도 불구하고 최악의 결과에 봉착할 수 있다. (...) (13쪽.)

 

  홍타이지가 병자호란에 얼마나 많은 병력을 투입했느냐는 질문에 대한 지금까지의 고찰 결과를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홍타이지는 팔기만주·팔기몽고에서 약 1만 명을, 우전 초하에서 전 병력인 약 1만 명을 조선 침공에 투입했고, 천우병과 천조병에 대해서는 상례보다 많은 약 1,900명의 동원을 요구했다. (...) 여기에 더하여, 홍타이지는 외번몽고 각 집단에 합계 1만2,000명 남짓의 갑병을 출전시키도록 했다. 결론적으로, 동맹군으로 참전한 외번몽고 병력까지 합해서 병자호란 당시 청군의 병력 총수는 약 3만4,000명 정도였던 셈이다.
  (...) 조선에 출병한 청군의 총인원은 정규 병력 약 3만4,000명과 쿠툴러 약 1만1,000명을 합한 약 4만5,000명 정도로 잡을 수 있다. (...)
  (...) 청군 병력의 많고 적음에 대한 판단은 당시 홍타이지의 동원 가능 병력을 기준으로 내려야 한다. (...) 홍타이지는 동원 가능 병력 총수의 약 70퍼센트를 조선 침공에 투입한 셈이 된다. (...) 이러한 요인을 감안하면, 홍타이지가 국내의 가용 군사 역량을 거의 전부 조선 침공에 투입하는 총력전을 준비했다고 해도 전혀 지나치지 않다. (56~59쪽.)

 

  지금까지의 고찰을 통해서 '홍타이지는 왜 병자호란을 일으켰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과 더불어 그가 굳이 친정과 총력전을 선택한 까닭이 드러났다. 애초에 자신의 정치적 야심이자 어젠다(agenda)였을 따름인 '칭제' 문제를 조선과의 외교 문제로 비화시킨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홍타이지였다. (...) 홍타이지로 하여금 조선을 상태로 한 전쟁, 그것도 친정과 총력전 발동을 결심하게 만든 직접적인 계기는 사월 11일의 ‘황제 즉위식’에서 조성되었다. 조선 사신들이 일으킨, 말하자면 '신성모독'적인 '소동'으로 인해 그날의 '황제 즉위식'이 사실상 '미완'으로 끝났기 때문이다. 이제 홍타이지는 형제 맹약의 화이 체결로 끝난 정묘호란과 차원을 달리하는, 글자 그대로의 '조선 정복'을 명실상부하게 실현해야만 비로소 자신의 '칭제'를 정당화할 수 있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과업은 다른 사람의 손을 빌려서가 아니라자기 자신의 손으로 직접 달성해야 했다. 반드시 성공을 거두어야 했음은 물론이다.
  이처럼 애초에 궁극적으로 전쟁이 아니면 해소할 수 없는 갈등의 씨앗을 뿌린 장본인은 홍타이지였다. 엄청난 공을 들여 준비했을 '황제 즉위식'이 '미완'에 그침으로써 발생한 '칭제'의 정당화라는 정치적 과제도 홍타이지 본인의 몫이었다. 병자호란은 '잉태' 당초부터 다른 누구도 아닌 홍타이지 본인의 정치적 야망과 어젠다를 군사적 수단으로 달성하는 '홍타이지의 전쟁'이었다. (70~71쪽.)

 

(...) 평안도와 황해도의 조선군이 산성 거점 방어전략을 충실히 실행한 결과, 은밀히 압록강을 건너 안주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 로오사 선봉대의 앞길에 무인지경의 대로가 훤히 열리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펼쳐졌던 것이다. (...) (105쪽.)

 

  사실 여진인 기병의 전투력은 매우 뛰어났다. 예컨대 1126년 송의 수도 개봉을 포위한 금군과 송나라 간에 화의가 성립한 직후 금군 기병 17명이 이 사실을 본국에 알리기 위해 길을 떠난 일이 있었다. 이들 금군 기병은 도중에 송나라 장수 이간(李侃)의 군사 2,000명과 조우했다. 금군은 이미 화의가 성립했으므로 싸울 필요가 없다고 했지만, 이간은 그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 결국 전투가 벌어지자, 금군 기병 17명은 송의 군사 2,000명을 간단히 격파해버렸다. (126쪽.)

 

  그러나 정월 17일 상황의 일대 반전이 일어났다. 청군이 단 하루 만에 태도를 180도 바꾸어 먼저 적극적으로 협상을 걸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이날 그들은 갑작스럽게 남한산성으로 사람을 보내서 사신 파견을 요구했다. 전날의 만남에서 확인한 잉굴다이의 태도로 볼 때 실로 뜻밖의 일이었다. (...) (244쪽.)

 

(...) 홍타이지가 정축년 정월 후반에 생산 왕·버일러들과 함께 피두에 들어갔으리라는 추정을 뒷받침하는 사료상의 결정적인 증거가 존재한다. 서울을 떠난 지 약 다섯 달이 지난 시점인 정축년 칠월 5일, 홍타이지가 조선에서의 전쟁 기간 청군의 기율 문란을 문제로 삼아 왕·버일러들을 꾸짖은 일이 있었다. 이때 그는 지나가는 말로 조선을 평정한 직후 자신의 조기 귀국 사실을 가리켜, "마마를 피해 먼저 귀국[避痘先歸]"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 (...) (280쪽.)

 

  결국 홍타이지는 '미완'에 그쳤던 병자년 사월의 '황제 즉위식'을 정축년 정월 삼전도에서 '완성', 그것도 좀더 고차원적으로 '완성'하고자 했다고 볼 수 있다. (...) 이처럼 병자년 사월 11일 '황제 즉위식'의 '미완'으로 인해 '잉태'된 병자호란이 정축년 정월 30일 '황제 즉위식'의 고차원적인 '완성'으로 종결되었다면, 병자호란이라는 전쟁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리고 철저하게 '홍타이지의 전쟁'이었다고 성격을 규정하지 않을 수 없다. (...) (30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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