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g君 Blues...
콰이강의 다리 위에 조선인이 있었네 (조형근, 한겨레출판사, 2024.) 본문
종종 강의를 나갑니다. 대학뿐 아니라 고등학교나 기업체 등 불러주기만 하면 거의 거절하지 않고 다 갑니다. (심지어는 아침 라디오에서 고정 코너를 몇 달 정도 맡았던 적도 있죠. 8분 생방송 하려고 해도 안 뜬 새벽에 왕복 3시간 거리를 매주...) 이 때 청중은 역사에 대해 특별히 관심이 없거나 역사와는 무관한 삶을 사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탕수육은 그런 청중 앞에 설 때마다 고민합니다. 역사를 몰라도 먹고 사는데 아무 지장이 없는 청중에게 두어 시간을 꽉꽉 채워서 갑오농민전쟁 주도세력의 사회경제적 지향이나 평안도 우물 갯수를 말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고민 말이죠. 간단한 사실관계는 손 안의 스마트폰으로 수월히 검색하게 된 것은 벌써 한참 전의 일이고, 이제는 DBPia에서 논문 내용도 AI가 뚝딱하고 요약해주는 시대까지 됐는데, 이런 이야기를 애써 강의장까지 와서 들어야 하는 이유가 있을까요. 약간의 언변과 시청각 자료 같은 것들로 청중의 눈길을 잠깐 잡아둘 수야 있겠지요. 하지만 강의가 끝나고 강의장을 나선 후의 삶에 역사가 대체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을까요.
저는 그래서 역사를 공부하는 이들이 단지 더 많은 사실관계를 밝혀내는 것 이상으로, 우리 삶의 자세를 달리 하는데 기여할 수 있는 철학적인 면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역사'라고 하는 거대한 세계 앞에서 응당 가져야 할 겸손이나, 역사 속에서 명멸한 인간군상을 되짚어보며 깨닫는 복잡한 인간성 같은 것들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한번쯤 고민해봄직한 인생의 화두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저도 강의에서는 사실관계를 잔뜩 늘어놓기 보다는 평소의 생각방식을 되돌아보게끔 하거나 두고두고 고민할만한 화두를 던지는데 더 많은 시간을 씁니다.
그런 저에게 조형근의 글쓰기는 가장 중요한 참고자료 중 하나입니다. 저는 '화두/철학으로서의 역사'라는 관점에서 조형근의 글쓰기야말로 최상의 결과물이라고 단언합니다. (더 큰 찬사가 떠오르지 않는 제 어휘력이 원망스러울 정도입니다.)
저자가 여러 권의 책을 통해 독자에게 던지는 질문은 일관된 것처럼 보입니다. 지금 당신이 하는 일의 의미가 무엇이고, 그것이 누구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며, 또한 역사에는 어떻게 기록될 것인지를 자각하고 있는가 하는, 윤리적·철학적 질문 말입니다. 거기에 더하여 심심풀이로 개구리를 때려죽이는 어린아이를 단지 천진하다고만 말할 수 없는 것처럼, 그저 몰랐을 뿐이라는 말이 과연 합당한 변명인가 하는 질문까지 말입니다.
물론 저자 스스로도 고백하는 것처럼, 이 책은 여러 지면에 따로 게재되었던 글들을 다시 모은 것이라 글 하나하나의 호흡은 다소 짧고, 주제들이 약간 중구난방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전작인 '우리 안의 친일'과 비교하면 더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만큼 더 많은 주제와 소재를 담고 있기에 참고자료로서는 더 유용한 것 같기도 합니다. 틈틈이 읽기에는 이쪽이 더 낫기도 하구요. 이 책 덕분에 다음 학기의 제 강의안은 또 더 풍성해질 것 같습니다.
생각해보면 호기심만큼 큰 힘도 찾기 어렵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자동차 내비게이션이나 스마트폰 속 지도 애플리케이션에 쓰이는 GPS 기술에 이론적 토대를 제공했다. 아인슈타인이 이런 실용적 기술을 만들겠다고 연구를 했을까? 아닐 것이다. 물리학이 재미있어서, 우주의 이치를 알고 싶어서 연구하다가 상대성이론이 탄생했을 것이다. 몇 년 안에 연구 성과를 산출해야 하고, 당장 경제적·사회적 효과도 내야 한다는 한국식 풍토에서는 상대성이론 같은 업적은 난망하다. 나와 세계를 이해하고 싶다는 앎의 의지가 존중받는 세상에서 지식은 풍성해진다. (7쪽.)
어떤 면에서는 피해자인 사람이 다른 면에서는 가해자인 경우도 적지 않다. 조선인 포로감시원들은 형식상으론 자원하여 간 것이었지만 실질은 강제 동원된 것에 가까웠다. 그들은 일본군에게 맞고 학대받았다. 잘 때리라고 맞았다. 그리고 포로들을 때리고 학대했다. 어떤 이들은 이런 유형의 사례들을 근거로 한국도 일본과 같은 전범국이라고 주장한다. 같은 전범국이니 일본의 책임을 묻지 말라는 우익적 주장의 변형일 뿐이다. 그렇다면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 조선인 포로감시원에게는 아무 책임도 없을까? 무엇보다 당사자들 자신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일본과 동일시하지 않으면서 우리가 져야 할 몫의 역사적 책임을 인식해야 한다. 그렇게 자신을 역사에 연루시키는 자만이 윤리적 주체가 될 수 있다. 연루됨의 윤리다. (10쪽.)
(...) 2017년 문재인 대통령이 현충일 추념사에서 베트남전쟁 참전 군인에게 경의를 표하자 베트남 외교부가 항의를 했다. 전몰자를 추념하는 것은 국민국가의 당연한 권리라며 한국 여론이 들끓었다. 일본 총리가 야스쿠니신사에 참배를 하거나 공물을 바치면 한국 정부와 여론은 단호하게 비판한다. 그에 대한 일본의 대응 논리와 똑같은 논리를 한국 정부와 사람들이 내세웠다. 일본에게 이런 것까지 배웠다. 그 전쟁이 어떤 전쟁이었는지는 한사코 외면하면서.
참전으로 고통받은 이들을 연민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힘들고 가난하던 시절, 먹고 살려고, 가족을 도우려고 많은 젊은 이들이 그 전쟁에 나섰고 피를 흘렸다. 침략 전쟁이라는 걸 알고 간 이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사정을 몰랐다는 말이 변명이 될 수 있을까? 그들에 대한 연민으로 침략 전쟁을 정당화해도 좋을까? 그 무렵 한국의 인터넷 여론은 한술 더 떴다. "키워줬더니 베트남 따위가 건방지다"는 식의 혐오 댓글이 난무했다. 진보적이라는 커뮤니티들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타자에게 입힌 상처를 기억할 때만, 우리가 입은 상처도 보듬을 수 있다. 그 균형을 잡기 전까지 상처는 아물지 않는다. (145~146쪽.)
과학사학자 김영식은 현대 한국 과학기술의 가장 두드러진 특성으로 지나치게 실용적이고 공리주의적인 과학기술관을 꼽는다. 개화기 이래 과학기술이 주로 경제적 효용 달성이라는 도구적 측면에서 받아들여졌다는 것이다. 이 동도서기론적 입장에서 역설적이게도 일제시기 지식인들에게 과학주의적 태도가 널리 퍼졌다고 비판한다. 그렇다면 세상에 쓸모가 없는, 힘이 되지 못하는 과학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
이광수의 시대가 지나간 지 오래다. 심지어 선진국이 됐다는 21세기 한국인데 집단 열병처럼 과학 천재에 대한 숭배가 폭발하곤 한다. (...) 황우석 박사에 대한 열광적 지지를 살펴보면 그 근저에는 역시 힘에 대한 열망이 있었다. 그를 탄압하는 것으로 보이는 순간 보수든 진보든 모두 기득권 세력으로 규탄받았다. 서울대와 학계와 전문가들, MBC, 《한겨레》 등 진보언론이 동시에 타깃이 되었다. 서구의 무기인 연구 윤리 따위나 앞세우는 매국노가 됐다. (...)
(...) 과학의 진보는 그 자체로 좋은 일이다. GPS 기술에 군사적·상업적으로 응용되기 전에는 상대성이론이 무가치했을까? 그랬따면 세계가 상대성이론에 열광했을 리 없다. 상대성이론은 돈이 되고 경쟁력에 도움이 되어서가 아니라 우주에 대한 이해에 크게 기여했기 때문에 가치 있는 것이다. 과학은 그런 가치를 인정하는 곳에서 발전한다. 윤석열 정부는 2024년도 정부 예산을 짜면서 국가과학기술 연구개발 예산을 30퍼센트나 줄였다가 여론의 거센 역풍을 맞았다. (...) 개념 없는 정부 탓에 국가 경쟁력에 큰 타격을 입게 됐다고 걱정도 대단하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과학에 대한 인식과 논란이 오직 '경쟁력'을 둘러싸고만 벌어지는 것 같아 안타깝다. 과학에 대한 한국인의 태도는 식민지 시절 '힘의 숭배'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워진 것일까? (161~163쪽.)
(...) '절반짜리 왜놈'이라는 의심을 받던 경성의전 학생들이 만세운동에 더 열심이었다. 1919년 4월 20일 자 조선총독부 보고에 따르면, 구금된 학생 중 경성의전 학생이 가장 많아서 31명이었다. 경성고보 22명, 보성고보 15명, 경성공전 14명, 경성전수학교 12명, 배재고보 9명, 연희전문 7명, 세브란스의전 4명 등이었다. 1919년 동안 79명의 조선인 학생이 경성의전에서 퇴학 처분됐다.
지금도 그렇지만 변변한 전문직이라곤 찾기 어렵던 그 시절, 의사는 그야말로 특권층이었다. 보장된 미래를 마다하고 만세운동에 나선 청년의학도들의 피가 더웠다. 퇴학, 체포, 실형이 잇달았다. 어떤 이는 독립투쟁의 길에 투신했다. (...) 한위건은 상하이로 건너가 임시정부 내무위원으로 활동하다가 사회주의 독립운동가가 되었다. 그 처가 페미니스트 여의사로 유명한 이덕요였다.
3·1운동 이전에 독립운동에 뛰어든 의사들도 있었다. 세브란스의학교 1회 졸업생으로 세브란스연합의학교 교수로 재직하던 박서양은 1917년 간도의 연길현으로 떠났다. 거기서 독립군 군의 활동을 했다. 박서양의 동기 김필순은 105인 사건에 따른 체포 위협을 피해 1911년 말에 중국으로 떠나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그 아들이 중국에서 '영화황제' 칭호를 받기도 한 항일 배우 김염이다. 세브란스의학교 2회 졸업생인 이태준은 중국 난징을 거쳐 몽골로 가서 개업한 뒤 독립운동을 하다가 이후에는 장국 장자커우와 베이징 등지에서도 활동했다.
물론 의사의 길을 걸은 이들이 훨씬 많았다. (...) "장래에도 또 그런 소요에 가담하겠는가?"라는 경성법원 예심판사의 질문에 "가담하지 않겠다"고 대답한 (...) 백인제는, 10개월의 옥살이 이후 어렵사리 복교하여 수석으로 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경성의전 교수이자 조선을 대표하는 외과의사로 명성을 떨쳤다. 법정 진술을 지키기라도 하듯 다시는 소란스러운 일에 가담하지 않았다.
(...) 유상규는 상하이로 가서 임시정부에 참여했다. 도산 안창호 아래서 4년간 임시정부 교통국 조사원과 흥사단원으로 활동했다. 독립운동의 연락망 구축과 자금 조달 사업에 종사했으리라 추측된다. 임시정부 내 대립이 심해지자 도산이 귀국을 권했다. 1924년에 돌아와 조건부로 복학해 학업을 마치고 총독부의원 외과 부수, 경성의전 외과학교실 조수, 강사를 거쳤다. 흥사단 계열의 수양동우회와 기관지 《동광》에 참가하고, 조선의사협회의 창립 발깅니이자 서무부 간사로도 활동했다. 평생 도산의 무실역행 노선을 따랐다.
(...)
무지한 민중에 대한 유상규의 절망에는 역사와 유래가 있었다. 임정 활동을 마치고 귀국할 때 8개월간 일본 오사카에서 막노동을 했다. 근로 조건도, 생활 조건도 극악했다. 조선인 노동자들은 착취에 순응하며 술과 도박에 빠져 있었다. 우마나 돈견 이하로 무자각에 빠져 있었다. 퇴근 후의 시간을 돈 안 받는 왕진에 쏟았다. 민중을 불신하면서 민중에 봉사했다.
유상규는 이 정열과 분노, 불신을 고스란히 안은 채 1936년 7월 18일, 수술 중 걸린 연쇄상구균 감염증으로 급서했다. 만 38세였다. (...) 2년 후 그가 생전에 아버지처럼 따르던 도산 안창호가 옥고의 후유증으로 1938년 3월 10일에 세상을 떠났다. 도산은 이렇게 유언을 남겼다.
"나 죽거든 내 시체를 고향에 가져가지 말고... 달리 선산 같은데도 쓸 생각을 말고. 서울에다 묻어주오. 공동묘지에다가... 유상규 군이 누워 있는 그 곁 공동묘지에다가 묻어주오." 망우리 유상규 무덤 바로 위에 도산이 묻혔다. 민중에 절망하고 민중을 불신했지만, 또 민중을 뜨겁게 사랑한 유상규였다. 죽어 스승과 함께하니 외롭지 않았다.
몇 년 뒤 페니실린이 나왔다. 유상규를 수술한 친구 백인제는 "왜 기다리지 못하고 죽었느냐"며 회한에 잠겼다. 그는 해방 후 백병원을 설립하고, 서울시의사회 회장직을 맡는 등 활발히 활동하다 한국전쟁 때 납북됐다. 생사가 전하지 않는다. 중국공산당에 입당한 경성의전 출신 한위건은 좌경맹동주의 노선과 투쟁하다 숙청되었고, 이후 류샤오치에 의해 복권되어 하북성위원회 서기로 도약했지만, 이듬해인 1937년 장티푸스와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우리 나이 41세였다. (...) 흑룡강성에서 독립운동에 매진하던 한국 최초의 면허 의사 김필순은 1919년, 콜레라로 사망했다. 일제에 의한 독살설이 있다. 만 41세였다. 몽골로 간 의사 이태준은 의열단에 가입해 열심으로 독립운동에 매진했다. 그러다 일본의 사주를 받은 러시아 백위군에 의해 1921년 처형당했다. 만 37세였다. (171~176쪽.)
조선왕조의 몰락이 명확해진 일제시대에 독립을 꿈꾼다는 것은 조선왕조의 부활을 바라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단지 일본을 쫓아내고 새로운 군주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조선왕조와는 완전히 다른 세상을 만드는 문제였다. 그래서 도산 안창호는 다정한 사회가 "조선 민족의 사활에 관계되는 문제"라고 보았다. 군주와 사대부가 지배하던 세상에서 백성을 긍휼히 여기는 것은 지배자의 몫으로 간주됐다. 앞에서 본 군주들의 기사가 보여주는 것처럼. 이제 군주도 사대부도 없는 세상이 됐으니 백성이 서로를 긍휼히 여기는 수밖에 없었다. 도산은 "무정한 조선의 사회를 유정하게 만들어 무정으로 거꾸러진 조선을 유정으로 다시 일으키자"고 호소했다. "우리 사회를 개조하자면 먼저 다정한 사회를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조선 적부터 무정한 피를 받았기 때문인지 아무래도 더운 정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정의情誼를 기르는 공부를 하여야 되겠습니다. 그리한 뒤에야 참 삶의 맛을 알겠습니다. 일언일동一言一動에 우리 사이의 정의를 손상하는 자는 우리의 원수외다." (186~1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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