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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드 인 공장 (김중혁, 한겨레출판, 2014.)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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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드 인 공장 (김중혁, 한겨레출판, 2014.)

Dog君 2014. 12. 2. 06:54



1. '공장'이라는 단어는 내게는 무척 친숙하다. 나의 가장 오래된 기억 속에서부터 이미 아버지는 '공장'에서 일하고 계셨고, 좀 더 철이 든 다음에도 아버지와 어머니는 늘 '공장'에 계셨다. '공장' 덕분에 우리 가족은 부족하나마 먹고 살 수 있었기 때문에, '공장'은 우리 가족이 가장 많이 입에 올리는 단어 중 하나였다. 그러고보면 이미 나 스스로가 '메이드 인 공장'인지도 모르겠다.


2. 공장의 이미지는 무엇보다 냄새로 각인되어 있다. 지금도 그 이름을 알지 못하는 커다란 기계 속에서는 연신 쇳덩어리들이 고속회전하고 있었고, 그 쇳덩어리보다 더 단단한 커터가 쇳덩어리에 닿으면 꼭 무슨 도자기처럼 어떤 모양이 깎여 나왔다. 그리고 거기에는 하얀 우윳빛깔의 윤활유들이 쉼 없이 끼얹어졌다. 그 윤활유 냄새가 그렇게 강했다. 일하는 사람 손에도 냄새가 배었고, 공장 벽에도 배었고, 사무실 집기에도 배어 들었다. 지금도 어디든 공장 근처에서 그런 냄새가 나면, 당장 '공장' 생각이 난다.


3. 바야흐로 공산품의 시대...라고 말하던 건 한 40년 전쯤 일이고, 지금의 한국경제에서 공장이 할 일이 그렇게 많지는 않은 것 같다. "제조업 하는 사람은 다 애국자"라는 말에는 절반 정도의 칭찬과 절반 정도의 낙담이 섞여 있는 것처럼, 지금 한국에서 제조업 공장을 한다는 건 살짝 시대에 뒤처진 느낌이 있다. 그래서 메이드 인 공장에 나오는 '공장'의 이미지는, 약동하는 한국 경제의 생생한 현장...이 아니고, 약간 낡아버린 것들에 대한 향수와, 이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된 것들에 대한 애정 같은 게 있는 것 같다.


4. 그나저나 김중혁의 글은 언제 읽어도 참 재미있다. 출근길에 집어 들었는데, 버스에서 읽고, 전철에서 읽고, 일하다 잠깐 짬내서 읽고, 점심시간에 읽고 하다보니 금방 다 읽었다. 읽는 내내 입꼬리 쫙쫙 찢어가면서, 때로는 낄낄대면서 잘 읽었다. 온돌방에서 배 깔고 엎드려 읽는 만화책만큼 재미있다. 정색하고 '깨달음의 산' 같은 곳을 한 걸음 한 걸음 차곡차곡 걸어올라가는 글들도 좋지만, 이렇게 롤러코스터 타듯이 정신줄 놓고 있다가 어느 순간 뭔가 탁, 하고 느낌이 오는 책도 좋은 것 같다.


  공장 천장에 달려 있는 기계는 거대한 종이 두루마리를 연신 이리저리 옮기고 있었다. 공장 바닥에도 수많은 두루마리가 뒹굴고 있었다. 하얗고 거대한 두루마리를 보고 있으니 안쓰럽기도하고, 무섭기도 했다. 저게 다 나무란 말이고, 우리가 저 큰 두루마리에다 하염없이 계속 그리고 쓴단 말이지. 거인의 화장실용 두라마리라고 하면 딱 좋을 것 같은 크기의 종이를 전부 우리가 쓰고 있다는 말이지. 그 종이로 우리는 신문과 잡지를 만들어 서로 정보를 공유하고, 연애편지를 써서 사랑을 완성하고, 화장실에서 볼일을 완성하고, 소설을 쓰고 읽으면서 울고 웃는다.

  종이가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보다 덜 현명한 사람이었을 것이고, 덜 낭만적인 사람이었을 것이고, 덜 아는 사람이었을 것이고, 덜 사랑하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우리의 가장 큰 과제는, 어떻게 하면 종이를 덜 사용하면서도 더 현명하고 더 사랑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인가이다. 어떻게 하면 지구를 덜 쓰면서 세계에 대해 더 많이 알 수 있을까. (<제지 공장 산책기> 中, pp. 26~27.)


  컵을 만드는 직원뿐 아니라 공장의 직원들 손놀림도 하나같이 예사롭지 않았다. 능숙하다 못해 눈을 감고도 모든 일을 처리할 수 있을 것처럼 부드러웠다. 컵을 덧씌우고, 어깨끈과 잇고, 와이어를 넣고, 컵이 눌리지 않게 포장하고 마무리하는 여러 가지 작업들이 조용하고 끊임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문득 돌아보니 젊은 여자 직원은 한 명도 보이질 않았다. 공장에서 가장 어린 직원은 37세였다. 예전에는 젊은 여자들이 주로 봉제 작업을 했는데, 그 여자들이 지금도 계속 작업을 하고 있다. ㄱ사장님의 설명에 따르면 '일본에는 예순 넘은 사람들이 돋보기 쓰고 봉제 작업을 한다는데, 우리나라도 똑같이 닮아가고' 있다. 창밖에서는 수많은 풍경들이 바뀌고, 벽에 걸린 세월의 시계는 빠르게 움직이지만 재봉틀 앞에서 일어서는 사람은 없고, 새롭게 들어오는 사람도 없으며, 재봉틀 앞에 앉은 사람들이 조금씩 늙어가는, 어쩐지 쓸쓸한 공장의 풍경이다. (<브래지어 공장 산책기> 中, pp. 56~57.)


  공장장님에게는 전설 같은 이야기도 전해져 내려온다. 공장장님이 입사 직후 연구원으로 일하던 시절, 일본의 간장 공장에 견학을 가게 됐다. 발효 기술이야 한국도 뒤떨어질 게 없었지만 간장의 대량생산을 일찍 시작했던 일본의 기술을 참고하기 위해서였다. 어떤 균을 이용해 간장을 생산하는지 궁금했지만, 간장 공장의 특급 비밀을 함부로 알려줄 리 없었다. 공장장님은 여기저기를 기웃거렸다. 궁금함을 참지 못한 공장장님은 마지막 작전을 시행했다. 우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콧속에 숨이 가득 찼을 때, 숨을 참았다. 서둘러 밖으로 나간 다음 화장지에다 코를 풀었고, 화장지를 비닐봉지에 잘 넣었다. 공장의 공기 속에 떠돌고 있던 균을 후점막에다 붙인 다음 화장지에다 옮긴 것이다. 이런 문익점 목화씨 빠지는 소리 같은 이야기가 가당키나 한가 싶지만, 실제로 가능하다고 한다. 공장장님은 한국에 돌아와 화장지에서 균을 검출해냈다. 하지만 일본에서 힘들게 데려온 균은 한국 간장에 적용하긴 힘들었고, 한국 간장에 사용하는 균이 훨씬 우월하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그리고, 공장장님의 이야기는 간장 공장의 전설이 되었다. (두둥!) (<간장 공장 산책기> 中, pp. 68~69.)


  어떤 점이 좋냐고 묻는다면, 딱 한 가지만 얘기해줄게. 어른이 되어서 된장찌개를 먹고 있으니 된장찌개가 아니라 시간을 먹고 있다는 생각이 든단다. 어쩌면 모든 식사란 시간을 먹는 일인지도 모르지. 그 음식을 만든 사람의 시간, 그 음식의 재료가 익어온 시간, 그런 시간을 먹는 일인지도 모르지. 한 끼 한 끼란 무척 소중한 시간이란다. 간장 공장에서 돌아온 나는 검고 투명한 간장을 보며 시간을 생각하고 있다. (<간장 공장 산책기> 中, p. 78.)


  공장에 들어섰을 때 가장 재미있는 풍경은 수많은 지구들이 널브러져 있는 것이었다. 어딜 둘러봐도 전부 지구다. 반 토막 난 지구, 동그랗게 변모하기 이전의 종이 위에 인쇄된 평면 지구, 손질이 덜 끝나서 너저분한 지구, 깔끔하게 완성된 지구, 상자 속에서 출고되길 기다리는 지구. 이건 마치 우주의 모습 같기도 하다. 수많은 행성들이 사방에 널브러져 있고, 어떤 행성은 반 토막 난 채로 차곡차곡 엎어져 있다. 우주를 만든 하느님이 있다면 그 작업실의 풍경이 이렇지 않았을까. 하느님도 '우주 공장'이란 걸 만든 다음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가며 이토록 거대한 우주를 만든 것은 아닐까. (<지구본 공장 산책기> 中, p. 99.)


  공장이란 곳은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의 필요를 충족시켜주기 위한 '호의와 선의'에 의해 움직이는 곳이다. 또한 이익을 남겨야 한다는 '절박한 필요'에 의해 움직이는 곳이기도 하다. '절박한 필요'가 '호의와 선의'를 이길 때 음식물에다 이상한 물질을 때려 넣는, 말도 안 되는 일이 이어난다. '호의와 선의'가 '절박한 필요'를 이길 때, 안타깝지만 공장은 망한다. (<화장품 공장 산책기> 中, p. 214.)


  라면 공장에서도 속도가 중요했다. 방문한 공장은 한국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신라면의 고속라인이 있었는데, 속도 때문에 생긴 특이한 점이 하나 있다. 자, 몰라도 그만인 기이한 라면 상식. 라면의 상표가 있는 곳을 앞면, 조리법과 주의 사항이 적힌 곳을 뒷면이라고 해보자. 수프는 어디 들어 있을까. 다른 곳에서 생산되는 라면에는 앞면에 수프가 들어있지만 고속화 라인에서 생산되는 라면에는 뒷면에 수프가 들어 있다. (완성된 라면이 컨베이어벨트를 지나갈 때 그 위에 수프를 얹어야 하는데, 빠른 속도 때문에 수프가 계속 떨어지고 말았다. 결국 고속화 라인에서는 수프를 컨베이어벨트 아래쪽에서 공급해 함께 포장한다.) 신라면을 사서 포장을 뜯었을 때 수프가 앞쪽에 있으면 저속 라인, 뒤쪽에 있으면 고속 라인에서 생단된 것이다. 맛의 차이는 없다고 하지만, 어쩌면 고속 라인에서 생산된 라면이 시원한 바람을 더 많이 맞았을 테니 맛도 더 화통하지 않을까. 속도를 경험해봤으니 더 빨리 끓지는 않을까. 미안하다, 농담이다.

  너구리 라면의 공정도 재미있다. 너구리 라면에는 일반 라면의 수프에다 다시마를 추가로 투입해야 한다. 말린 다시마를 잘라서 투입하는 것인데, 기계로 처리하기가 불가능하다. 다시마 투입 기계가 있긴 하지만 성공률이 높지 않다. 하나하나 사람이 넣을 수밖에 없다. 다시마를 가루로 부순 다음 칩 형태로 성형하는 것도 고려했지만 다시마 형태가 사라지만 소비자들이 좋아할 것 같지 않다는 게 공통된 의견이었다. 너구리 라면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나 역시 반대한다. 다시마 기계화에 반대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의외성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너구리 라면을 자주 먹는 사람은 봉지를 열었을 때 두 개의 다시마가 짝 달라붙어 있는 '로토'를 경험한 적이 한 번쯤은 있을 것이다. (나는 한 번 경험했다.) 대단한 행운은 아니지만 어쩐지 기분이 좋아진다. 이게 다 수작업 때문에 생기는 즐거움이다. 공장 입장에서는 작은 손실이 어마어마한 손실로 이어진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런 식의 소소한 재미를 놓치고 싶지 않다. 누군가의 실수가 누군가의 기쁨으로 이어지는 일은 많지 않다. (<라면 공장 산책기> 中, pp. 242~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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