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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죄 (이언 매큐언, 문학동네, 2003.)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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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죄 (이언 매큐언, 문학동네, 2003.)

Dog君 2014. 12. 25. 19:37



1. 이렇게 읽다가 '헉' 소리 나는 소설도 참 오래간만이다. 흔히 쓰는 의미의 '재미'라는 점에서 근래 읽은 책 중에서 제일 낫다. 성탄절 연휴를 꼬박 투자한 보람이 있다.


2. 소설 쓰기에 대한 메타 소설 같은 느낌도 있는데, 텍스트를 만들어 낸다는 점에서 역사 쓰기도 이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역사가에게 텍스트 만들기의 윤리성은 무엇일까.


3. 문장은 섬세하고, 구성은 치밀하며, 화두는 묵직하다.


  빨리 세실리아와 이야기를 해야 한다. 마침내 로비는 욕조에서 일어서서 몸을 떨면서 자신에게 커다란 변화가 닥쳐오고 있음을 느꼈다. 그는 벌거벗은 채로 서재를 지나 침실로 갔다. 어질러진 침대, 아무렇게나 나뒹구는 옷들, 바닥에 던져진 수건, 적도처럼 뜨거운 열기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관능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그는 침대 위에 길게 엎드려 베개에 얼굴을 묻고 신음했다. 사랑스럽고 섬세한 그녀, 어릴 적 동무. 이제 그녀는 그의 손이 닿을 수 없는 곳으로 가려 하고 있다. 그렇게 옷을 벗다니. 그랬다. 괴상하게 보이려는 그녀의 사랑스러운 시도와 과감해 보이려는 노력에는 과장되고 서투른 면이 있었다. 지금쯤 후회로 몸부림치고 있겠지. 자신이 그에게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지도 못한 채 말이다. 그렇지만 그의 손에서 떨어져 깨져버린 꽃병 때문에 그에게 엄청나게 화가 난 것만 아니라면 일이 잘 풀릴 수도 있다. 어떻게든 되돌릴 가능성은 있다. 그는 그녀의 분노까지도 사랑했으니까. 그는 둥글게 몸을 구부리고 옆으로 누워 한 곳을 응시하기 시작했지만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눈앞에 영화 같은 영상이 펼쳐졌다. 그녀는 그 작은 주먹으로 그의 가슴을 때리더니 작게 흐느끼며 굳건한 그의 팔에 안겨 얌전히 키스를 받았다. 그를 용서한 것이 아니라 저항을 포기해버린 것이다. 이 장면을 몇 번이고 떠올리며 탐닉하던 그는 마침내 현실로 돌아왔다. 그에게 화가 나 있는 현실의 그녀는 그가 저녁식사에 초대받은 걸 알면 불같이 화를 낼 것이다. 그는 난폭한 햇빛 아래에서 제대로 생각을 할 수가 없어 레온의 초대를 거절하지 못했다. 얼떨결에 가겠다고 말해버렸으니, 이제 화난 그녀를 대면해야 하는 운명에 처했다. 그가 보고 있는 앞에서, 마치 그를 어린아이 취급하듯 스스럼없이 옷을 벗던 그녀의 모습을 떠올리며 그는 다시 한번 신음소리를 냈다. 아래층에 들리든 말든 상관없었다. 물론 지금은 그녀가 왜 그랬는지 알 것 같았다. 그에게 굴욕감을 주려 한 것이다. 분명하다. 그가 굴욕감을 느끼길 바란 것이다. 그녀는 더이상 사랑스럽고 상냥하기만 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는 이제 그녀에게 짐짓 어른인 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행동할 수 없었다. 그녀는 그를 깊은 곳에서 끌어올려 아무렇게나 내동댕이칠 수 있는 강력한 힘을 가졌기 때문이다. (pp. 117~118.)


  그는 화이트홀 버스 정류장을 향해 그녀와 함께 걸었다. 이 소중한 마지막 몇 분 동안 그는 딱딱한 약자와 숫자가 나열된 새 주소를 그녀에게 써주었다. 그리고 기본 훈련이 끝날 때까지는 휴가가 없지만, 훈련만 끝나면 이 주간의 휴가를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그녀는 그를 바라보면서 화가 난다는 듯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고, 그제야 그는 그녀의 손을 꼭 쥐었다. 말로 하지 못한 모든 것을 담은 행동이었다. 그녀도 손에 힘을 줌으로써 그의 마음에 화답했다. 버스가 왔지만 그녀는 손을 놓으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서 있었다. 그가 그녀에게 키스를 했다. 처음에는 가볍게 시작했지만 점차 서로 몸을 끌어당기면서 열정적인 키스로 변해갔다. 혀가 맞닿았을 때 그의 영혼은 절망적일 정도로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다. 이 순간의 기억을 고이 간직하여 앞으로 몇 달간을 그 기억에 의존하여 살게 되리란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깊은 밤 프랑스의 한 농가 헛간에 누워 그는 바로 그때의 기억을 끌어내 힘을 얻는 것이었다. (후략) (p. 291.)


  (전략) 그런데 요즘 같은 때에 죄란 과연 무엇인가? 별 의미가 없었다. 누구나 다 유죄이기도 하고, 무죄이기도 했다. 모든 증인들의 진술을 받아 적고 증거를 모으기에는 인력도, 종이나 펜도, 그리고 인내심과 평화도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증언을 번복하는 일 따위로 명예를 회복할 수는 없을 것이다. 증인들도 죄가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매일 서로의 죄를 목격하면서 살고 있다.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고? 그렇다면 죽게 내버려둔 적도 없는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게 내버려두었나? 이곳 지하실에서 우리는 그런 질문에 대해서 계속 침묵할 거야. 잠으로 다 떨쳐버릴 거야, 알겠니, 브리오니? (후략) (pp. 368~369.)


  지금 그녀에게 가장 시급한 일은 울지 않는 거였다. 이 순간에 울음을 터뜨리는 것보다 더 수치스러운 일은 없을 것이다. 안도감인지 수치심인지 아니면 자기 연민인지, 도대체 무엇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부드러운 물결이 가슴에서부터 서서히 올라오더니 목구멍을 꽉 메워 말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러나 입술을 꽉 깨물고 한참 가만히 있으니 물결이 다시 가라앉으면서 고요해졌다. 눈물은 없었다. 그러나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애처로울 정도로 작았다. (pp. 477~478.)


  지난 오십구 년간 나를 괴롭혀왔던 물음은 이것이다. 소설가가 결과를 결정하는 절대적인 힘을 가진 신과 같은 존재라면 그는 과연 어떻게 속죄를 할 수 있을까? 소설가가 의지하거나 화해할 수 있는, 혹은 그 소설가를 용서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 소설가 바깥에는 아무도 없다. 소설가 자신이 상상 속에서 한계와 조건을 정한다. 신이나 소설가에게 속죄란 있을 수 없다. 비록 그가 무신론자라고 해도. 소설가에게 속죄란 불가능하고 필요 없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속죄를 위해 노력했다는 사실이다. (p. 521.)


  그건 소설가의 윤리 문제와도 맞닿아 있는 것 같은데요, 어떤 사람이 이야기를 하나 만들어냈어요. 그런데 그 이야기가 누군가를 죽일 수 있다면 과연 그 이야기가 재미있다는 이유만으로 면죄부를 받는 것이 가능한가. 이 질문에는 답도 없고 답을 내릴 수도 없죠. 결국 소설가뿐만 아니라 이야기를 갈구하는 모든 사람에게 당신이 하는 그 이야기가 어떤 의미인지 정확히 알고 있는가라는 묵직한 질문입니다. 오르한 파묵의 책 《소설과 소설가》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읽었는데 말하자면 이런 내용이에요. 예를 들어서 드라마에서 악역을 연기한 배우를 실제로 보고 저 나쁜 놈 하고 손가락질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에게 왜 드라마와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냐고 하겠죠. 그런데 소설가들한테 그거 실제로 겪은 일이냐고 묻는 일이 많아요. 그렇게 허구와 현실을 구별하지 못하고 혼동한다는 것, 그것이 사실 이야기의 핵심이라는 거예요. 독자들은 어떤 소설을 읽으면서 이것이 완전히 허구일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마찬가지로 정말 일어났던 일일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는 거죠. 바로 그 성격이 소설이 가지고 있는 엄청난 힘이 아닐까, 거기에 윤리적인 문제도 포함되구요. (이동진·김중혁, 「숭고하고 윤리적인 속죄 : 《속죄》, 이언 매큐언」, 『우리가 사랑한 소설들』, 예담, 2014, p. 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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