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g君 Blues...
그리스인 조르바 (니코스 카잔차키스, 열린 책들, 2000.) 본문
1. 조르바에 대해서는 '자유'가 어떻고 등등의 이야기가 더 많지만 소설 잘 못 읽는 나는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고, 그냥 뭐랄까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고 아낀다는 것이 뭔지, 인간답다는게 뭔지 하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사람들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설명하기 위해서 지식이나 이념이나 논리나 신앙 같은 것들을 사용하곤 하지만, 글쎄 꼭 그게 그렇게 해야만 가능한 걸까. 그냥 좋은 건 좋은 걸로만 남겨둬도 괜찮겠지. 우리에겐 좋은 게 왜 좋은지 설명해야 할 의무는 없으니까. 좋은 건 그냥 좋은 거다.
2. 암튼, 조르바는 돈 키호테 만큼이나 재미있는 캐릭터 맞는 것 같다. 물론, 나는 이런 사람을 상당히 싫어하고, 내 성격에 이런 사람이랑 같이 다니라고 하는 것도 절대 사양이다. ㅋㅋㅋ
「두목 말씀이 옳으신지도 모르지. 모든 건 생각하기 나름이거든요. 현명한 솔로몬 대왕도 어쩌지 못한 경우가……. 봅시다, 어느 날 나는 조그만 마을로 갔습니다. 갔더니 아흔을 넘긴 듯한 할아버지 한 분이 바삐 아몬드 나무를 심고 있더군요. 그래서 내가 물었지요. 〈아니, 할아버지 아몬드 나무를 심고 계시잖아요?〉 그랬더니 허리가 꼬부라진 이 할아버지가 고개를 돌리며, 〈오냐, 나는 죽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란다.〉 내가 대꾸했죠. 〈저는 제가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살고 있군요.〉 자, 누가 맞을까요, 두목?」
그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째 꼼짝 못 하시겠지?」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두 갈래의 똑같이 험하고 가파른 길이 같은 봉우리에 이를 수도 있었다. 죽음이 존재하지 않는 듯이 사는 거나, 금방 죽을 것 같은 기분으로 사는 것은 어쩌면 똑같은 것인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해 왔다. 그러나 조르바가 물었을 때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이번에는 조르바가 나를 놀렸다. 「자, 내 말에 반박하지 못한다고 너무 꽁하게 생각하지 맙시다. 우리 딴 이야기 합시다. 지금 나는 닭고기와 계피 뿌린 육반(肉飯)을 생각하고 있어요. 내 머릿속은 갓 쪄낸 육반처럼 김이 무럭무럭 납니다. 먼저 먹읍시다. 먼저 배를 채워 놓고 그다음에 생각해 봅시다. 모든 게 때가 있는 법이지요. 지금 우리 앞에 있는 건 육반입니다. 우리 마음이 육반이 되게 해야 합니다. 내일이면 갈탄광이 우리 앞에 있을 것입니다. 그때 우리 마음은 갈탄광이 되어야 합니다. 어정쩡하다 보면 아무 짓도 못 하지요.」 (pp. 53~54.)
「하지만, 조르바, 당신은 아무것도 안 믿는다고 하지 않았어요?」 나도 대들었다.
「안 믿지요. 아무것도 안 믿어요. 몇 번이나 얘기해야 알아듣겠소? 나는 아무도, 아무것도 믿지 않아요. 오직 조르바만 믿지. 조르바가 딴 것들보다 나아서가 아니오. 나을 거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어요. 조르바 역시 딴 놈들과 마찬가지로 짐승이오! 그러나 내가 조르바를 믿는 건, 내가 아는 것중에서 아직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조르바뿐이기 때문이오. 나머지는 모조리 허깨비들이오. 나는 이 눈으로 보고 이 귀로 듣고 이 내장으로 삭여 내어요. 나머지야 몽땅 허깨비지. 내가 죽으면 만사가 죽는 거요. 조르바가 죽으면 세계 전부가 나락으로 떨어질 게요. (p. 82.)」
이런 생각이 들었다. ……조르바는 학교 문 앞에도 가보지 못했고 그 머리는 지식의 세례를 받은 일이 없다. 하지만 그는 만고풍상을 다 겪은 사람이다. 그래서 그 마음은 열려 있고 가슴은 원시적인 배짱으로 고스란히 잔뜩 부풀어 있다. 우리가 복잡하고 난해하다고 생각하는 문제를 조르바는 칼로 자르듯,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고르디아스의 매듭을 자르듯이 풀어낸다. 온몸의 체중을 실어 두 발로 대지를 밟고 있는 이 조르바의 겨냥이 빗나갈 리 없다. 아프리카인들이 왜 뱀을 섬기는가? 뱀이 온몸을 땅에 붙이고 있어서 대지의 비밀을 더 잘 알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렇다. 뱀은 배로, 꼬리로, 그리고 머리로 대지의 비밀을 안다. 뱀은 늘 어머니 대지와 접촉하고 동거한다. 조르바의 경우도 이와 같다. 우리들 교육받은 자들이 오히려 공중을 나는 새들처럼 골이 빈 것들일 뿐……. (p. 94.)
「……내가 뭘 먹고 싶고 갖고 싶으면 어떻게 하는 줄 아십니까? 목구멍이 미어지도록 처넣어 다시는 그놈의 생각이 안 나도록 해버려요. 그러면 말만 들어도 구역질이 나는 겁니다. 이 이야기면 설명이 되겠군. 어렸을 때 말입니다, 나는 버찌에 미쳐 있었어요. 하지만 돈이 있어야지요. 돈이 없어서 한꺼번에 많이는 살 수 없고, 조금 사서 먹으면 점점 더 먹고 싶어지고 그러는 거예요. 밤이고 낮이고 나는 버찌 생각만 했지요. 입에 군침이 도는 게, 아, 미치겠습디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화가 났습니다. 창피해서 그랬는지도 모르지요. 어쨌든 나는 버찌가 날 데리고 논다는 생각이 들어 속이 상했어요. 그래서 어떻게 한 줄 아시오? 나는 밤중에 일어나 아버지 주머니를 뒤졌지요. 은화(銀貨)가 한 닢 있습디다. 꼬불쳤지요. 다음 날 아침 나는 일찍 일어나 시장으로 달려가 버찌 한 소쿠리를 샀지요. 도랑에 숨어 먹기 시작했습니다. 넘어올 때까지 처넣었어요. 배가 아파 오고, 구역질이 났어요. 그렇습니다, 두목, 나는 몽땅 토했어요. 그리고 그날부터 나는 버찌를 먹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보기만 해도 견딜 수 없었어요. 나는 구원을 받은 겁니다. 언제 어디서 버찌를 보건 내겐 할 말이 있습니다. 이제 너하고는 볼일이 없구나 하고요. 훗날 담배나 술을 놓고도 이런 짓을 했습니다. 나는 지금도 마시고 피우지만 끊고 싶으면 언제든지 끊어 버립니다. 나는 내 정열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고향도 마찬가지예요. 한때 몹시 그리워하던 적이 있어서 그것도 목젖까지 퍼 넣고 토해 버렸지요. 그때부터 고향 생각이 날 괴롭히는 일이 없어요.」
「여자는 어떻습니까?」
「여자 차례도 올 겁니다. 에이, 빌어먹을 것들. 올 겁니다, 와요. 내 나이 일흔이 되면!」
조르바는 자기가 생각해 봐도 일흔은 너무 임박해 있는 것 같았던지 재빨리 고쳐 말했다.
「……여든으로 합시다. 두목, 우습겠지만 웃을 필요는 없어요. 이게 사람이 자유를 얻는 도리올시다. 내 말 잘 들어요. 터질 만큼 처넣는 것 이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금욕주의 같은 걸로는 안 돼요. 생각해 봐요, 두목. 반쯤 악마가 되지 않고 어떻게 악마를 다룰 수 있겠어요?」 (pp. 284~285.)
「처음 이야기로 되돌아갑시다. 제우스 이야기가 왜 나왔어요?」
「아, 그 양반…… 그 양반의 고민을 알아주는 건 나밖에 없습니다. 그 양반 물론 여자 좋아했지요. 그러나 당신네 펜대잡이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차원이 달라요. 다르고말고. 그 양반은 여자들의 고통을 이해하고 그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시킨 겁니다. 언젠가 시골 구석을 다니다 이 양반은 욕망과 회한으로 인생을 낭비하고 있는 노처녀, 혹은 아리따운 유부녀를 보았습니다(꼭 아리따운 여자일 필요는 없습니다. 괴물이라도 상관없습니다). 남편은 멀리 떠나고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이 양반은 성호를 척 긋고 변장합니다. 여자가 좋아할 모습으로 말입니다. 그러고는 그 여자 방으로 들어갑니다.
그저 적당하게 애무만 바라는 여자는 상대는 하지 않았어요. 턱도 없지. 녹초가 될 판인데도 최선을 다해 주지요. 당신도 무슨 말인지 알 겁니다. 이 암양들을 어떻게 일일이 다 만족시켜요? 오, 제우스, 저 가엾은 숫양, 귀찮은 내색 한 번 하는 법이 없었어요. 좋아서 그 짓 한 것도 아닐 겁니다. 암양을 네댓 마리 해치우고 난 숫양 본 적 있어요? 침을 질질 흘리고 눈깔에는 안개와 눈곱투성입니다. 기침까지 콜록콜록 해대는 꼴을 보면 그거 어디 서 있을 성싶지도 않습니다. 그래요, 저 불쌍한 제우스도 그런 고역을 적잖게 치렀을 겝니다.
그러곤 새벽이면 이렇게 중얼거리며 집으로 돌아왔을 겁니다. 〈오, 하느님. 언제면 좀 편히 쉴 수 있을까요? 죽을 지경입니다.〉 이러고는 질질 흐르는 침을 닦았을 겁니다.
그때 문득 또 한숨 소리가 들립니다. 저 아래 지구 위에서 한 여자가 반라에 가까운 잠옷 바람으로 발코니로 나와 풍차라도 돌릴 듯이 한숨을 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제우스는 또 불쌍한 생각이 듭니다. 그는 끙 하고 신음을 토해 냅니다. 〈이런 니기미, 또 내려가야 하게 생겼구나! 신세타령하는 여자가 또 있으니 마땅히 내려가 달래 주어야 할 일!〉
이런 짓도 오래 하다 보니 여자들이 제우스를 한 방울도 남김없이 빨아 버리고 맙니다. 꼼짝도 할 수 없게 된 그는 먹은 것을 토하더니 지체가 마비되어 죽어 버립니다. 그의 뒤를 이어 그리스도가 이 땅에 내려옵니다. 그는 이 제우스의 꼴이 말이 아닌 걸 보고는 가로되. 〈여자를 조심할지니.〉」
나는 조르바의 천진난만한 상상력에 경탄하면서 웃음을 터뜨렸다. (pp. 315~316.)
조르바는 한숨을 쉬었다. 그는 담배에 불을 붙여 두어 모금 빨고는 던져 버렸다.
「……내 조국이라고 했어요? 당신은 책에 쓰여 있는 그 엉터리 수작을 다 믿어요? 당신이 믿어야 할 것은 바로 나 같은 사람이에요. 조국 같은 게 있는 한 인간은 짐승, 그것도 앞뒤 헤아릴 줄 모르는 짐승 신세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하느님이 보우하사, 나는 그 모든 걸 졸업했습니다. 내게는 끝났어요. 당신은 어떻게 되어 있어요?」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나는 조르바라는 사내가 부러웠다. 그는 살과 피로 싸우고 죽이고 입을 맞추면서 내가 펜과 잉크로 배우려던 것들을 고스란히 살아온 것이었다. 내가 고독 속에서 의자에 눌어붙어 풀어 보려고 하던 문제를 이 사나이는 칼 한 자루로 산속의 맑은 대기를 마시며 풀어 버린 것이었다. (pp. 328~329.)
우리는 함께 춤을 추었다. 조르바는 내게 춤을 가르쳐 주고 엄숙하고 끈기 있게, 그리고 부드럽게 틀린 부분을 고쳐주었다. 나는 차츰 대담해졌다. 내 가슴은 새처럼 날아오르는 기분이었다.
「브라보! 아주 잘하시는데!」 조르바는 박자를 맞추느라고 손뼉을 치며 외쳤다. 「……브라보, 젊은이! 종이와 잉크는 지옥으로나 보내 버려! 상품, 이익 좋아하시네. 광산, 인부, 수도원 좋아하시네. 이것 봐요, 당신이 춤을 배우고 내 말을 배우면 우리가 서로 나누지 못할 이야기가 어디 있겠소!」
그는 맨발로 자갈밭을 짓이기며 손뼉을 쳤다.
「……두목! 당신에게 할 말이 아주 많소. 사람을 당신만큼 사랑해 본 적이 없어요. 하고 싶은 말이 쌓이고 쌓였지만 내 혀로는 안 돼요. 춤으로 보여 드리지. 자, 갑시다!」
그는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팔다리에 날개가 달린 것 같았다. 바다와 하늘을 등지고 날아오르자 그는 흡사 반란을 일으킨 대천사 같았다. 그는 하늘에다 대고 이렇게 외치는 것 같았다. 「전능하신 하느님, 당신이 날 어쩔 수 있다는 것이오? 죽이기밖에 더 하겠소? 그래요, 죽여요. 상관 않을 테니까. 나는 분풀이도 실컷 했고 하고 싶은 말도 실컷 했고 춤출 시간도 있었으니……. 더 이상 당신은 필요 없어요!」
조르바의 춤을 바라보며 나는 처음으로 무게를 극복하려는 인간의 처절한 노력을 이해했다. 나는 조르바의 인내와 그 날램, 긍지에 찬 모습에 감탄했다. 그의 기민하고 맹렬한 스텝은 모래 위에도 인간의 신들린 역사를 기록하고 있었다. (pp. 415~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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