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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스 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 (잭 웨더포드, 사계절, 2005.)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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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스 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 (잭 웨더포드, 사계절, 2005.)

Dog君 2015. 4. 19. 22:52



1-1. 일본 게임 제작사 중에서 '光榮'이라는 회사가 있다. 우리에게는 '코에이(KOEI)'라는 알파벳 표기로 더 잘 알려진 회사인데, 삼국지, 노부나가의 야망, 대항해시대 같은 시뮬레이션 게임이 대표적인 킬러 프랜차이즈 되겠다. 하도 오랫동안 시뮬레이션 게임에 집중한 덕분에 수호지, 에어 매니지먼트, 안젤리크 같은 마이너급 프랜차이즈도 꽤 많은 편인데 그 중에 '징기스칸' 시리즈라는게 있다. (일본어 원제는 '蒼き狼と白き牝鹿(푸른 늑대와 하얀 사슴)'.)



1-2. 징기스칸 시리즈 중에서 한국에 가장 잘 알려진게 3편인데, '원조비사: 고려의 대몽항쟁'이라는 제목으로 나왔다. 원래 시나리오 설정은 대몽항쟁기와 한참 차이가 있지만 국내 유통사에서 억지로 로컬라이징을 하는 바람에 뭔가 좀 뒤죽박죽이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이 게임이 유명한 것은 그 때문이 아니고 바로 후궁 시스템 덕분이지. 이름에서 벌써 느낌이 살짝 난다만은, 후궁들한테 선물 주고 아첨하고 뭐 암튼 온갖 감언이설로 왕비를 잘 구슬려서 2세를 만드는 시스템(;;;)인데 이게 그냥 설정상으로만 존재하는게 아니라 말이 잘 먹히면 점점 표현 수위가 올라가는지라 어린 마음에 쿠오오오오옹ㅗㅇ옹 하고 막 그랬던 시절이 있었다.


오늘 밤에 만리장성 함 쌓아봅시다!


2. 5월 초순에 몽골로 여행을 다녀오기로 해서 뭐 괜찮은 책 하나 없나...하고 서점을 뒤지다가 찾은 책이 이 책. 뭔가 재미없을 것 같은 제목이기는 하지만, 이거 말고는 서가에서 딱히 더 눈에 띄는 책이 없어서 일단 골라들었다. 그런데 테무진의 출생으로부터 몽골제국의 성립까지를 평이하게 서술하고 있는 처음 2/3 정도는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다. 이런 정도 이야기야 네이버고 다음이고 숱하게 널리고 널렸으니까. 후반 1/3도 아주 인상적이라거나 깊이 있는 분석을 하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딱히 대단한 분석이나 독특한 주장까지는 알고 싶지도 않고 그냥 간단하게 책 한 권으로 몽골제국을 훑고 싶은 사람에게는 이 책이 적합하겠다.


3-1. 저자가 보기에 몽골제국이 중요한 것은 테무진이라는 청년의 입지전적 성공스토리가 감동 만땅 영웅서사이어서라거나 세계사에 유례 없이 넓은 땅을 정복했다거나 하는 스펙타클스러움에 있지 않다. 그는 몽골제국의 등장을 동양과 서양 모두 그 이전 시기에 가지고 있던 폐쇄성과 고립성의 단절이라는 관점에서 본다. 중국이든 유럽이든 상업 활동을 천시하고 자급자족 경제를 높이 샀지만, 몽골제국은 제국 내의 교역로를 확장·유지하고 상업활동을 지원했다. 예컨대 기존의 중국 사회에서 상인층은 그저 "강도보다 겨우 한 단계 높은 지위" 정도였지만, 몽골제국은 상인을 모든 종교와 직업에 우선하는 지위로 보았다. (대신 유학자들은 매춘부보다 낮게 보았다;;;) 몽골인들은 초보적인 형태의 신분증, 대피소, 교역로 등을 이용해 상업활동을 제도적으로 지원했고, 지리학과 조선 기술 습득에도 힘을 쏟았으며, 외국 항구에 교역기지를 설치하는데도 관심을 기울였다. 제국 내 경제의 통일성을 위해 지폐를 사용했고, 다양한 언어를 표기할 수 있는 공통 문자를 개발했으며, 구어를 활용한 실용적 교육을 담당하는 공립학교를 대대적으로 건설했다. 각 지역의 법 체계를 존중했고, 종교와 문화의 다양성을 해치지 않았다.


3-2. 이런 식으로 구축한 시스템 덕에 화약과 종이와 나침반이 유럽으로 건너갔고 그것들이 르네상스와 대항해시대를 자극했다는 사실은 굳이 새삼스럽게 강조할 필요가 없겠다. 이븐 바투타나 마르코 폴로 같은 이들이 오갔던 길들도 몽골제국이 구축한 연결망의 이부였다.


4. 몽골제국의 이런 시스템은 그저 땅 넓히다보니 생겨난 부수적 효과가 아니었다. 몽골은 점령한 도시를 무차별적으로 파괴한 것처럼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중요성이 떨어지거나 접근이 어려운 길에 있는 도시를 파괴했고 몽골군의 감독과 통제가 쉬운 경로로 교역이 이뤄지도록 했다. 그러니까 몽골 쌀람들,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말이나 타고 다니던 무식한 유목민족이 아니란 거다.


5. 물론 땅이 넓다는 것과 교역 시스템이 발달했다는 것이 반드시 인과관계로 연결될 이유는 없다. 땅 넓어도 자급자족하면서 알아서 잘 살 수 있잖아? 저자에 따르면 몽골제국이 그렇게 상업과 무역을 중시했던 것은 걔네 핏속에 장사꾼의 피가 철철 흘러서가 아니고 몽골족 특유의 전통, 그러니까 부족 조직 내에 속하는 사람이라면 고아와 과부까지 전리품을 공평하게 나눠 가져야 한다는 쿠비(khubi) 전통에 따른 것이다. 다시 말해 제국 내에 사는 사람이라면 제국의 모든 물자를 누구나 평등하게 나눠 가질 수 있어야 하기에 이런 교역 시스템은 필수 중의 필수 아이겠냐 말이다. (근데 이거에 대해서 딱히 더 깊이 이야기를 안 해서 좀 아쉽긴 하다. 이거 쫌 중요한 얘기 같은데 말이지.)


6. 몽골의 세계체제에 균열이 간 것은 흑사병 때문이었다. 흑사병 하면 유럽을 떠올리기 쉽지만, 실제로 흑사병 때문에 가장 많은 사람이 죽은 것은 중국이었다. (정확한 수치를 제시하지는 않지만 대충 6~7000만 정도 정도 죽은 것 같다. 유럽의 3배 정도 된다;;;) 이 때문에 몽골의 세계체제는 흔들리고 다시 지역엘리트가 일어나는 시대가 열리게 되는데, 몽골제국이 무너지고 나서도 티무르 칸이니 무굴제국이니 하는 몽골의 후예를 자처하는 애들이 이어지고, 심지어 명나라도 1600년대 중반까지는 서양으로 보내는 외교서한을 몽골어로 썼다고 하니, 몽골이 남긴 흔적은 꽤 오래 이어지는 것 같다. 아니, 요새 한창 나오고 있는 '일대일로'니 유라시아 뭐라뭐라 하는 이야기들을 보면 지금까지도 그대로 아닌가 싶기도 하다. 몽골제국은 진즉에 사라지고 없지만, 그 몽골제국으로부터 이어지는 '세계체제'는 지금 우리에게도 여전히 관전포인트 맞는 거 같다.


쿠오오오오옹ㅗㅇ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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