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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마리 새끼 돼지 (스티븐 제이 굴드, 현암사, 2012.)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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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마리 새끼 돼지 (스티븐 제이 굴드, 현암사, 2012.)

Dog君 2015. 4. 29. 12:49



1-1. 몰락한 유학자 집안에서 태어나 사회진화론에 깊이 경도되었다가 환빠극단적 민족주의자를 거쳐 아나키즘에 다다른 신채호의 지적 여정은 매력적이다. (그래서 내 학부졸업논문 주제가 신채호.) 그랬던 신채호가 사회진화론과 진작에 결별할 수 있었던 것은 사회진화론이 사회의 질서를 설명하는 설명틀이 아니라 실은 침략과 폭력을 정당화하는 논리였기 때문이다. 적응 잘 해서 힘 센 놈이 적응 못 해서 약한 놈 좀 뜯어먹겠다는데 그게 뭐 어때서?라고 되물으면 할 말이 없으니까. 그런 식으로 말하면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 아니 올바른 일이기까지 하니까. 구한말 일군의 지식인들이 항일과 부일로 갈라진 것은 사회진화론에 대한 입장의 차이였다고 봐도 대체로 맞는 말 아닐까.


다들 그런 줄로 알았지.


1-2. 신채호의 시대로부터 100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인문학자들이 사회진화론을 비판하는 근거들이, 효과적인 반식민주의 투쟁을 할 수 없게 만든다는 점 말고 딱히 더 나아간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 물론 그게 제일 중요한 문제이기는 하지만은... 혹시 사회진화론이 그거하고 있는 진화론 그 자체에 대한 이해를 다르게 하는 방식으로 사회진화론을 전복시킬 수는 없을까...하는 생각, 누구나 한번쯤은 다 해봤을기다. 스티븐 제이 굴드라는 진화생물학자는 그런 분들께 아주 그냥 딱이에요.


2.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진화의 개념이란 '진화=진보'인 것 같다. 어렸을 때 읽던 고생물학 서적, 그러니까 공룡 막 나오는 그런 책에서 진화는 늘 그런 식이었다. 단세포생물이 다세포생물이 되고 거기서 어류가 나오고 어류가 뭍으로 나와서 양서류와 파충류가 되고 파충류에서 다시 조류가 갈라지고, 포유류가 나왔는데 그 진화의 끝에 인간이 있다는 식.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다음 질문. 아니 그럼 진작에 도태되었거나 다세포생물로 진화했어야 할 짚신벌레나 아메바는 왜 여태 살아 있는 거지?


부분적으로 좀 거시기하지만 대략 이런 식으로 그린 그림들.


3. 거기에 대한 스티븐 제이 굴드의 대답은 간단하다. 진화란 단선적인 '진보'가 아니라 '다양성의 증가'이고, 정해진 진화의 방향이란 건 없다는 것이다. 각각의 생물이 처한 조건이 다 다른만큼 그들 각각이 각각의 환경에 적응한 무수히 많은 사례들이 있을 뿐 그 자체에 우열을 매겨서 더 진화된 (우수한) 놈과 덜 진화된 (덜 떨어진) 놈을 구분하는 건 말이 안 된다는 거지. 도리어 복잡한 기관 구조가 생존에 방해가 되는 경우도 있고.


이것도 좀 거시기하지만 대략 이런 식?


4. 이런 대강의 결론을 다시 인간사회에 대입해보면, 꽤 많은 상식들이 깨져나간다. 진화라는 것이 사실은 정해진 방향 없이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이고, 그마저도 가장 잘 적응한 단 하나만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어떤 식으로든 도태되지만 않는 정도만 되어도 충분하다는 점을 생각하면 사회진화론은 전제부터 와르르 무너지는 셈이다.


5. 결과적으로 생존에 유리하게 작용한 몇 가지 진화도 사실은 알고 보면 생존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라 그냥 어쩌다가 얻어진 특징에 불과하다고 인정하면, 인간 사회의 발전이라는 것도 결국 그와 비슷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지나고나서 보기에야 인간사회라는 것이 멈추지 않고 나아가며 진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서 일어났던 작고 작은 변화들도 과연 그러했을까. 종국에는 역사적 변화로 이어졌던 그 작은 변화들도, 정작 그 변화들 옆에서는 그냥 일어나고 일어난 작은 사건과 일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하나씩 고칠 땐 몰랐지. 지금 와서 연결하려니 쉽지 않지?


6-1. 뭐 꼭 대단한 역사나 사회 이야기가 아니고, 개인에 대한 이야기로 읽어도 재미있는 책이다. 가장 재미있었던 부분은 날개의 진화에 관한 부분. 지금 와서 보면 날개는 날기 위한 필수적인 기관이었지만, 과연 날개가 진화해온 중간과정에서 날개는 왜 있었던 걸까. 발이 퇴화하고 그 자리에 대신 깃털이 달린 날개 같은 것이 진화하고는 있는데 정작 '본래 목적'인 비행에는 쓰이지도 못할 날개. (갑자기 고등학교 때 악명을 떨쳤던 '마다 아리' 선생님이 떠오르는구나.) 아니 그러면 지금의 조류는 비행을 위해서 수억만년을 참아가며 날개를 키워온 거였니?!


6-2. 날개의 '본래 목적'은 비행이 아니었다. 추정컨대 날개에 깃털이 달린 것은 기실 보온을 위한 것이었을테다. 더 큰 보온효과를 위해 깃털이 달린 '발'은 점점 커졌을테고, 그것이 어느 순간 충분한 크기 이상으로 커졌을 때 그것은 비행을 위해 '전유'된 것이다. 글타. 지금에야 날개는 나는 용도로 쓰이지만, 처음 날개가 생겨나기 시작했을 때 그것은 날기 위한 기관이 아니었던 거다.


6-3. 우리 인생도 글타.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들, 지금 내 모습, 지금 네 모습 중에서 처음부터 그러하려고 목표를 딱 정해놓고 달려온 결과가 아이지 않니. 살다 보니 여자도 만나고, 만나다 보니 섹스도 하고, 하다 보니 애도 생기고, 생겼으니 키우게 됐고... 뭐 그러다가 여기까지 온 거 아니니. 우리가 어디로 갈지는 아무도 모른다. 무슨 변수가 생길지 모르고 무슨 변심이 들지 모르는 거.


7. 그래서 오늘의 결론은 내 카톡 알림말처럼 "하루하루는 성실하게, 인생전체는 되는대로". (며칠 동안 쓰다말다 하다가 다시 2주 가까이 더 묵혀놓고 쓰니까 글이 기승병병이 되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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