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g君 Blues...
정결한 집 (정찬, 문학과 지성사, 2013.) 본문
1-1. 정찬 소설 속에서 '현재' 혹은 화자가 몸담고 있는 시간/공간은 늘상 부정적이다. 주변 인물들은 하나같이 억압적이고 이해심이 없으며 둘러싼 조건들은 사람들을 억누르기만 할 뿐이라서, 그 모순된 현실은 언제나 부정되거나 극복되어야 할 대상인 것처럼 보인다.
1-2. 정찬 소설 속에는 대개 시간/공간이 하나쯤 더 등장한다. 액자식 구성 혹은 단순하게 병렬하는 식으로 배치되는 그것은 현재의 부정적 결과를 초래한 원인이거나 화자가 놓인 시간/공간을 해석하기 위한 레퍼런스인 경우도 있다.
2. 최근 몇 권의 책에서 정찬은 부쩍 현실에 대한 이야기가 늘었다. '광야'에서 5월 광주를 다룬 것 정도를 넘어서, 이번 소설집에서는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나 용산참사, 굴뚝농성 등을 직접적으로 끌어온다. 꽤 오래 전에 발표했던 '로뎀나무 아래서' 같은 데서 현재를 짓누르는 것은 사랑이나 영적 구원 같은 것이었지만은, '정결한 집'에서 현재를 짓누르는 것은 훨씬 더 구체적이고 육화된 억압과 폭력들이다. 그러고보면 우리가 최근 몇 년간 겪어야 했던 퇴행적인 변화들은, 예술적 가치를 탐미하던 한 명의 소설가를 지상의 세계로 끌어내려 사회적 가치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3. 소설을 읽을 수록 현실은 답답하다. 탈출구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정결한 집'에서 소년은 자기를 집어삼킨 "거대한 괴물"이었던 어머니를 자기 손으로 제거했지만, 그래도 집은 정결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시체 썩어가는 냄새 때문에 틈에 본드를 듬뿍 칠해야 했고, 시체 썩는 냄새는 다시 본드 냄새로 대체되었을 뿐. '흔들의자'에서도 높은 타워크레인에 올랐던 남편은 시신이 되어 돌아왔고, 타워팰리스의 고층은 흔들림의 공포를 주었다. 그래서 쫓기듯 밀려난 반지하방에서 주인공은 죽음의 위기에 내몰리기도 한다. 아니, 고통스런 현실을 탈출하기 위한 자발적 죽음 아니고,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마지막 선택으로서의 죽음 아니라, 그냥 객사. 우짜노. 이 암담한 현재를 '정결'하게 만들 방법은 없는 걸까.
4-1. 정찬은 결국 다시 구원의 문제로 돌아간다. 여기서 구원은 현실의 질곡을 단숨에 벗어버리기 위한 죽음을 통해 성취되기도 하고, 인간적인 사랑을 통해 성취되기도 한다. '정결한 집'에서 소년은 진짜 시체가 되었고, '모과 냄새'와 '녹슨 자전거'에서는 자신의 (행복한) 기억을 끄집어냈다.
4-2. 물론 나는 이런 식의 결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사람 세상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하느님 세상 이야기하는 것 같기도 하고, 뭐랄까 그냥 멀쩡하게 세상을 초월해버리는 건 너무 쉬운 해결책 아닌가 해서 그렇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한테 딱히 다른 해법이 있냐 하면 그것도 아니고. 모르긴 몰라도, 정찬 역시 그 방법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스스로와 주변과 세상에게 묻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몇 편이든 몇 권이든 더 쓰고 더 내다 보면 뭐라도 답을 찾아내지 않을까. 그가 내릴/들려줄 (대)답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그녀의 가족이 10년 가까이 살았던 사원 아파트에서 쫓겨났을 때 받은 돈은 340만 원이었다. 임차료였던 그 돈으로는 거처할 데가 없었다. 집을 비우라는 내용의 등기우편이 온 것은 부당해고 구제신청이 기각되고, 법원이 노조원 퇴거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인 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그녀의 가족이 집을 불법점거하고 있다고 했다. 당시 남편은 고공농성을 하고 있었다.
남편이 올라간 곳은 공장 굴뚝이었다. 높이가 100미터라고 했다. 겨울이었고, 차가운 바람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회사 경비원과 경찰은 최소한의 물품과 음식만 올려 보내는 것을 허용했다. 체온 저하로 언제 목숨을 잃을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늘도 아니고 땅도 아닌 곳에 있는 남편을 쳐다보고 있노라면 적막이 몸을 에워싸면서 귓속에서 알 수 없는 소리가 났다. 바람 소리 같기도 했고, 새 울음소리 같기도 했다. 눈앞이 흐려지고, 숨이 가빠졌다. 간혹 바람에 휩쓸리는 새가 보였다. 필사적인 날갯짓에도 새는 바람의 힘을 이기지 못했다. 날이 저물고 노을이 지면 굴뚝이 가늘어 보였다. 바람에 뚝 부루질 것 같기도 했고, 모래처럼 스르르 허물어질 것 같기도 했다. 노을이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노을이 무서워진다는 것이 삶을 얼마나 무섭게 만드는지, 미처 몰랐다. (<흔들의자> 中, pp. 41~42.)
딸이 화장실 환기창 바깥에서 빨리 나오라고 소리치고 잇었을 때 그녀의 가슴에서 사랑의 감정이 일고 있었다. 남편이 죽은 이후 처음으로 인 감정이었다. 영원히 잃어버린 줄 알았는데, 황폐한 가슴에서 새싹이 돋듯 피어올랐다. 그녀는 손을 뻗어 딸의 뺨을 어루만졌다. 봄의 햇살이 느껴졌다. 수선화를 흔들고 있는 바람의 감촉도 느껴졌다. 수선화 사이에서 어슴푸레한 빛에 싸여 눈부시게 웃고 있는 여자아이가 어쩌면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검은 비닐봉지를 움켜쥐고 어디론가 걷고 있는 아이와 수선화 사이에 있는 아이가 구분이 되지 않았다. 그러자 딸이 왜 자신을 그토록 악착스럽게 창 앞으로 끌고 왔는지, 알 것 같았다. 수선화가 피어 있는 마당 한 귀퉁이가 떠오르면서 남편이 보였다. 그는 무언가를 만들고 있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남편이 만들고 있는 것은 교수대가 아니었다. 흔들의자였다. 늙은 그녀의 몸이 열네 살 아이의 몸으로 변한 것은 흔들의자를 본 순간이었다. 아이의 몸을 가진 그녀는 물고기처럼 날렵하게 환기창을 빠져나왔다.
핸드폰을 닫고 벽에 세워둔 청소기를 다시 돌리려 하는데 바닥이 흔들렸다. 주방의 그릇들이 덜컥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그녀는 가만히 서서 몸 안으로 스며드는 흔들림을 느꼈다. 그전처럼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았다. 남편이 만들어준 흔들의자 때문이었다. 흔들의자는 그녀를 감싸며 고요히 움직이고 있었다. (<흔들의자> 中, pp. 62~63.)
아내의 말은 정확했다. 그는 언젠가부터 딸의 혼사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곳은 그가 서 있을 자리가 아니었다. 구경꾼이 서는 자리였다. 그를 구경꾼으로 밀어낸 것은 마음의 상처였다. 딸의 결혼식에 대한 소망이 그토록 어이없이 허물어질 줄은 까맣게 몰랐다. 허물어지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그의 오랜 소망이 허물어졌는데도 누구도 알지 못했다. 아내도 몰랐고, 딸도 몰랐다. 딸만은 알았으면 했다. 곰곰이 생각하면 딸이 알아야 할 의무는 없었다. 그것을 모른다고 해서 딸이 효녀라는 사실이 변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아무도 그에게 상처를 주지 않았다. 상처를 입히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깊이 상처받았다. 그런 자신이 가련했다. 수치심까지 일었다. 되돌아가고 싶었다. 어딘지는 모르지만, 그 어딘가에 있는 어떤 곳으로 되돌아가고 싶었다. 참으로 막연한 생각이었다. 너무나 막연해 황당하기까지 했지만, 되돌아가는 출구가 어딘가에 있을 것 같았다. 그런 막연하고 황당한 생각 앞에서 그는 끊임없이 서성거렸다. (<모과 냄새> 中, p. 82.)
햇살이 말갰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었다. 하늘이 기우뚱하는 것 같았다. 어쩌면 내 몸이 기우뚱하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싿. 모과 냄새가 났다. 가까운 곳에 모과나무가 있는 모양이었다. 누군가가 모과를 달이고 있는지도 몰랐다. 어머니는 모과를 자주 달였다. 폐에 좋다고 했다. 모과를 잘게 썰어 약 달이듯 달이면 집 안이 모과 냄새로 가득 찼다. 눈을 감았다. 옛집 마당이 떠올랐고, 탐스럽게 익은 모과나무가 보였다. 비가 오면 모과 냄새가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 자신이 여기에 온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아내가 임신한 후 처음으로 함께 병원에 갔을 때였다. 의사의 방에서 모과 냄새가 났다. 책상 위에 오래된 모과 한 개가 놓여 있었다. 그는 의사에게 배 속에 있는 아이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고 말했다. 의사는 커다른 책을 가져와 펼치더니 사진 한 장을 가리키며 지금 이런 모습과 똑같다고 하면서 빙그레 웃었다. 그는 사진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털이 나지 않은 장밋빛 머리와 등뼈가 보였다. 덜 자란 두 팔이 날개처럼 느껴졌다. 그것이 딸의 모습에 대한 첫 기억이었다. 모과 냄새가 나면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딸이 태어난 지 열 달 만에 청므으로 일어섰을 때 모과 냄새와 함께 그 기억이 떠올랐던 것은 두 발로 선 딸의 몸이 금방이라도 날아갈 듯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빙긋 웃었다. 세월은 덧없이 흘러갔지만, 덧없는 세월 속에서 삶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세월의 갈피에 간혹 흰 빛처럼 끼어 있는 기억들이 사라진 삶을 잠깐이나마 되살려놓곤 했다. 그런 눈부신 기억이 없었다면 지나온 삶은 시간의 얼룩에 불과했을 것이다. 문지르면 지워지는, 이것만으로도 자신은 어머니와 딸에게 평생 갚지 못할 은혜를 입었다고 그는 생각했다.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모과나무가 어디에 있는지 궁금했다. 세상에서 가장 향기로운 냄새를 품고 있는 노란 과일이 보고 싶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그의 얼굴은 환히 빛나고 있었다. (<모과 냄새> 中, pp. 90~91.)
그날은 날씨가 흐렸다. 삼월인데도 바람이 무척 쌀쌀했다. 헌병들의 빨랫감을 세탁하고 돌아가는 이춘길과 장영규가 보였다. 헌병들은 한겨울에도 그들에게 빨랫감을 잔뜩 안기고는 찬물로 빨게 했다. 두 사람의 손이 얼어 있었다. 이춘길은 다리까지 절었다. 왜 다리를 저느냐고 물었다. 이춘길이 머뭇거렸다. 양말을 벗고 발을 들어보라고 했다. 발바닥이 홍시처럼 벌겋게 부풀어 있었다. 누군가가 곤봉으로 발바닥을 때린 모양이었다. 그는 물끄러미 이춘길을 내려다보았다. 이춘길이 장영규보다 더 많이 맞는 것은 시력이 안 좋고 동작이 느리기 때문이었다. 이춘길은 그의 시선이 불편한지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집총을 거부한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무의식중에 튀어나온 물음이었다. 그런 물음은 처음이었다. 그것에 대해서는 의문을 가지려고 하지 않았다. 빨갱이보다 더 지독한 놈들에게는 의문을 가질 필요가 없었다. 그의 물음에 이춘길이 당황해했다. 눈동자가 불안하게 움직였다. 이춘길이 당황해하자 정말 궁금해졌다. 무엇이 이춘길로 하여금 혹독한 고통을 견디게 하는지, 알고 싶었다. 이춘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것은 몇 초 후였다. 미소인 것 같기도 했고, 말을 하기 전에 짓는 버릇 같기도 했다. 그가 정말 알고 싶어한다는 것을 이춘길이 느낀 모야잉었다. 당황해하던 표정이 사라졌을 뿐 아니라, 기쁨의 표정이 얼굴에 감돌고 있었다. 순식간의 변화였다. 사람의 얼굴이 그토록 순식간에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이춘길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한층 궁금해졌다. 너무나 궁금해 가슴이 두근거렸다. 칼을 든 자는 칼로 망한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작고 낮았지만 또렷한 목소리였다. 그 말을 할 때 이춘길은 그를 보고 있지 않았다. 이춘길의 시선은 허공에 있었다. 그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맥이 탁 풀렸다. 대답이 너무 평범했다. 이춘길이 한 말은 그도 알고 있었다. 언제, 어디서, 누구로부터 들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여러번 들은 말이었다. 어쩌면 책에서 읽었는지도 몰랐다. 그가 듣고 싶었던 것은 그런 평범한 말이 아니었다. 혹독한 고통을 단숨에 보상하는, 신을 믿지 않는 그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어떤 말을 듣고 싶었다. 이춘길에게 조롱당한 기분이었다. 멱살을 움켜쥐었다. 멱살을 잡힌 이춘길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겁에 질려 있는, 무력하기 짝이 없는 얼굴이 아니었다. 이춘길은 가엾음과 멸시가 뒤섞인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뜨거운 덩어리 같은 것이 목구멍에 걸려 있는 듯했다. 그것을 뱉어내지 않으면 질식할 것 같았다. 그가 정신을 차린 것은 장영규의 울부짖는 소리 때문이었다. 이춘길은 눈에 흰자위를 드러낸 채 널브러져 있었다. 울부짖는 소리를 듣고 달려온 헌병이 양동이에 가득 찬 물을 이춘길에게 부었다. 움직이지 않았다. 한 양동이를 더 붓자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춘길이 일어나는 동안 그는 멍하니 서 있었다.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흰 먼지 같은 뼈가 바람에 흩날리다가 강물에 가라앉는 것이 얼핏 보였을 뿐이었다. (<녹슨 자전거> 中, pp. 112~114.)
'잡冊나부랭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칭기스 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 (잭 웨더포드, 사계절, 2005.) (0) | 2015.04.19 |
---|---|
내셔널리즘의 틈새에서 (야마시타 영애, 한울아카데미, 2012.) (0) | 2015.03.20 |
허삼관 매혈기 (위화, 푸른숲, 1999.) (0) | 2015.02.22 |
싱글맨 (크리스토퍼 이셔우드, 그책, 2009.) (2) | 2015.02.14 |
기발한 시골 양반 라 만차의 돈 끼호떼 1 & 기발한 기사 라 만차의 돈 끼호떼 2 (미겔 데 세르반떼스, 창비, 2012.) (0) | 2015.02.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