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g君 Blues...
대운하 시대 1415~1784 (조영헌, 민음사, 2021.) 본문
19세기 이후 서구가 거둔 성공과 그 외 지역의 정체停滯 이유가 무엇인가라는 꽤 오래된 질문이 있습니다. 이들 질문에 대한 그간의 답변은 대체로 서구인의 자아도취 퍼레이드였던 것 같습니다. 서구에는 있는 무언가가 다른 지역에는 없었기에 그랬다는 식의 답변들이었으니까요. (좀 더 노골적이냐 아니냐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요.)
조영헌의 '대운하시대 1415~1784'는 그 오래된 질문에 대한 또 하나의 답변입니다. 방송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이 책의 접근법에 대해 저는 무척이나 호의적입니다. 무엇보다 주어가 '서구'가 아니라 '아시아'라는 점이 마음에 들고, 중간 과정을 우연이나 행운이 아닌 의식적인 판단과 정책으로 해석하는 것도 좋습니다. 이런 식으로 문제에 접근해야만, 비로소 지금의 우리가 무엇인가를 할.수.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세상 일을 우연의 결과로만 해석하면 지금의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겠죠.)
다만 이 책을 미리 판단하실 때, 언론에 소개된 서평 기사는 가급적 참고하시지 않기를 바랍니다. 대부분의 서평 기사가 그러하듯, 이 책에 대한 서평 기사도 대체로 제목과 목차만 대충 훑어보고 쓴 것 같은 느낌입니다. 기사에서는 대부분 이 책의 제목인 '대운하시대'에 꽂혀서 이게 마치 서구의 '대항해시대'와 정확히 쌍을 이루는 것처럼 소개합니다. 물론 '대운하시대'가 '대항해시대'를 의식한 조어인 것은 맞지만 그 의미까지 정확히 1:1로 조응하지는 않습니다.
즉, '대항해시대'가 15세기 무렵 시작된 유럽인의 대양 진출을 지칭한 것과 정확히 반대로, '대운하시대'는 중국인이 대양 진출을 포기하고 운하에만 집중했다는 뜻...이 아니라는 겁니다. 저자가 부제와 서문에서 계속 중국이 해양 진출을 '주저'했다고 ('안했다'가 아닙니다) 강조한 것이나 항구의 개항과 운하의 운영에 대해 청조가 취했던 입장이 이윤과 안보를 적절히 절충한 것이라고 한 것을 생각하면, '대운하시대'의 의미를 그렇게 단순하게 해석할 수는 없겠습니다.
언론사 서평 기사도 그렇고, 고전이 어떻고 독서가 어떻고 거들먹거리는 아재들도 그렇고, 그거랑 똑같이 하나마나한 소리나 늘어놓는 SNS 셀럽들도 그렇고, 제목과 목차만 대충 훑어보고 쓰는 '구라'와 '썰'은 이제 좀 그만 보고 싶습니다 ㅎㅎㅎ
그런데 정화 원정단의 결말과 그 이후의 비연속성이 정화의 원정 규모와 이를 가능케 했던 중국의 힘에 매혹된 우리를 당황스럽게 만든다. 정화가 사망한 1433년 이후, 선원들은 모두 해산되었고 선박들은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썩어 갔다. 더 이상의 해상 원정단은 기획조차 되지 않았다. (...) 왜 중국은 정화 원정단의 규모와 경험을 지속시키고 발전시키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위험한 것으로 여기고 숨기려 했는가? 이는 중국 역사의 필연이었을까, 아니면 기막힌 우연일 뿐인가?
바로 이 시기에 발생했던 또 하나의 극적인 스토리를 우리는 너무도 잘 기억한다. 이른바 '대항해시대(Age of Exploration)'로 알려진 유럽인들의 바다 진출과 경쟁의 이야기다. (...)
정화 원정단에 대한 기억이 점차 사라질 무렵 유럽이 해양 무역을 접수하여 중국을 둘러싼 바다에 포진하기 시작한 것이다. 15세기에서 16세기로 넘어가는 순간에 발생한 대조적인 현상이었다. (...) 그렇다면 당시 동아시아 해역의 새로운 지배자는 정말 유럽인이었는가? 결국 바다를 제대로 지배하고 이용하지 못했기 때문에 중국은 19세기에 유럽과 일본으로부터 굴욕적인 패배를 당했던 것인가? 정화의 원정단을 파견하던 15세기 전반기와 아편전쟁 및 청일전쟁에서 패배하던 19세기 중후반 사이에 무슨 변화가 중국과 그 주변에 발생했던 것인가?
지금까지 이 변화에 대한 주된 동인을 '유럽의 팽창' 혹은 '유럽의 성공'에서 찾는 것이 지배적인 담론이었다. 이는 '유럽 중심주의'의 산물이다. 대체로 16세기부터 본격화된 유럽의 팽창에는 '군사혁명(military revolution)'으로 강화된 군사력 및 항해 기술의 진보와 관련된 해양력(sea-power)이 그 추진력이 되었다고 설명되었다. 여기서 이른바 '대항해시대'라 부를 만한 대외적인 팽창이 해상으로 진행되었고, 이것이 결국 유럽을 세계사의 주역으로 만들었다는 담론의 배경이 되었다. (...) 하지만 이는 19세기에 전개된 결과를 가지고 그 원인을 설명하려는 시도처럼 보인다.
당시 유럽의 팽창을 아시아 없이 설명할 수 있을까? 이 변화의 주도권을 유럽이 독점했는가? 유럽의 '성공'에는 그럴 만한 고유한 역사적 필연성이 있었던 것일까?
(...)
실제로 아시아에 진출한 유럽의 선박은 아시아 각국과 현지인들의 협조가 없다면 장기간 체류는 물론 교역에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가 대단히 어려웠다. 특히 유럽의 우세가 확실해지는 19세기 이전까지 아시아 교역의 장에서 유럽의 독단적인 결정은 불가능했다. (...) 일본 도쿠가와(德川) 막부 시대를 연구했던 매리어스 얀선(Marius Jansen) 역시 "대체로 우리들이 편협하게 '유럽의 팽창'이라고 생각하는 각종 활동의 대부분은 동아시아의 팽창에 유럽인들이 참여한 것"이었다고 해석한 바 있다. (25~29쪽.)
(...) 이 책은 해양사에 기여하는 책이 아니다. 오히려 그보다는 이러한 해양의 교류가 중국을 둘러싼 바다, 도서 지역, 좀 더 구체적으로 해양 세력이라 자타가 공인하는 유럽인들의 전유물이 아니었음을 강조하려고 한다. 대운하는 앞으로 읽게 될 본문에서 두드러진 위치를 차지하지만, 이 책은 본질적으로 해양과 전혀 관련이 없을 것 같은 중국 내지의 벼노하, 특히 대운하를 둘러싼 이해관계와 정책 혹은 북경 조정의 안보 우선 정책(security-first policy)이 중국을 둘러싼 해양에서의 변화 추세를 자극하고 규정해 왔음을 밝히려고 한다. (32~33쪽.)
중국사에 익숙한 독자라면, 여기서 의문이 생길 것이다. 대운하는 15세기에 처음 생긴 것이 아니라 고구려를 침공했던 수양제(隋煬帝) 시대, 즉 7세기 초반의 작품이 아닌가? 그렇다면 대운하 시대의 시점은 15세기가 아니라 7세기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
(...) 이 책에서는 '대운하 시대'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수·당(隋唐) 이후 19세기 이전까지를 아우르는 광의(廣義)의 '대운하 시대'와 15~18세기의 약 4세기를 지칭하는 협의(狹義)의 '대운하 시대'를 구분하고, 후자에 논의를 집중하고자 한다. 광의의 '대운하 시대'는 남과 북의 경제적 통합을 통해 그 물자 유통의 규모를 확대한 결과 거대 제국이 출현했다는 특징을 보여주었다. (...)
나는 광의의 개념과 차별되는 협의의 대운하 시대를 제시하면서 그 시점을 1415년으로, 그 종점을 1784년으로 잡았다. (...)
이 시대는 이전 시대와 차별되는 두 가지 물류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 내부적으로 수도로의 국가적 물류 체계인 조운이 북경과 항주를 남북으로 연결하는 경항 대운하(京杭大運河)로 일원화되었다. 즉 조운에서 해운이 철저하게 금지되었다.(1장과 3장 참조) 둘째, 대외적으로 해외와의 교역이 조공과 해금이라는 외피 아래에 통제 가능한 소수의 거점 지역으로 제한되었다. (...) 요약하자면, 조운이라는 국가적(national) 물류에서는 철저히 해금의 정책적 기조를 유지하면서도, 국제적(international) 물류에서는 통제된 거점과 암묵적인 밀무역을 허용했던 시대가 바로 '대운하 시대'였다.
(...) 대운하는 중국 내지의 수로 교통로이지만, 해양 혹은 해안에 대한 중국의 장악력 여부를 반영하는 바로미터가 된다. 이 점에서 중국의 동남 해안 지역은 단순히 해양 세계와의 접선이 아니라 내지의 광활한 배후지로 둘러싸인 '이해관계의 최전선'이었다. 본문에서 보여주듯, 대운하를 둘러싼 일견 모순적인 구조와 특징은 사실상 북경의 안보(security)를 최우선 가치로 이루어지는 제국 경영을 공통 기반으로 삼아 연동되어 있었다. 전근대에 끊임없이 건설했던 만리장성이라는 경제와 빈 요새(empty fortress)는 '싸우지 않고도 이길 수 있는' 전략, 즉 강력한 유목 세력에 맞서 최소의 비용으로 거대 제국의 안보를 유지하는 전략이었다. 해금 정책은 해양 세력에 대처하는 '보이지 않는 장성(invisible Great Wall)'이라 할만했다. 따라서 해양을 완전히 차단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개방을 자신있게 표방하지도 못하는 상태는 이미 지구적인 세계 체제에 포섭된 거대한 제국의 안보와 이윤 모두를 저비용으로 확보하기 위한 나름의 전략이었다. (...) (35~37쪽.)
회통하는 원이 수도 대도로의 조운을 위해 기존에는 낙양까지 연결되었던 수·당 시대의 대운하 수로를 변경하기 위해 건립한 운하 구간이었다. 원은 강남과 북경을 직접적으로 연결하는 루트를 개발하려 했고, 이를 위해 회통하와 통혜하(通惠河)라는 운하를 새롭게 개착했다. (...)
하지만 말 그대로 '집결하고 통한다'는 뜻의 '회통(會通)'하라는 쿠빌라이 칸의 기대에도 불구하고, 원대에는 토목 기술의 부족으로 회통하의 유통이 원활하지 못했다. 문하(汶河)의 물을 끌어와 서른 개의 갑문(閘門)을 설치하여 수심을 일정하게 조절해야 했는데, "폭이 좁고 수심이 얕아 아무리 많이 날라도 매년 운송량이 수십만 석을 넘지 못하니 해운처럼 많지 못했다." 이 문제는 명 초까지 해결되지 못했는데, 1411년에서 1415년 사이에 공부상서 송례가 이 문제를 해결한 것이다. (61~63쪽.)
여기서 영락제의 북경 천도가 단순히 수도를 남쪽에서 북쪽으로 옮긴 정도에 그친 것이 아니라 명조의 성격을 크게 일변시켰음이 주목된다. 홍무제가 강남 경제력의 안정적 확보를 최우선 과제로 수도를 남경으로 결정했던 것과 달리, 영락제의 북경 천도는 '강남 정권'이라는 꼬리표를 떼어 낸 조치였다. 물론 이 때문에 정치 중심지와 경제 중심지가 분리되어 강남과 북경을 잇는 대운하 없이는 제국이 유지되기 어려운 사회적·경제적 구조가 탄생했고, 전 중국을 안목에 둔 정국 운영이 필수 불가결하게 되었다.
(...)
그런데 영락제는 1415년의 대운하 재건과 동시에 해운을 통한 조운을 중단시켰다. (...) (64~67쪽.)
(...) 왜 중국은 정화 원정단의 경험을 지속하고 발전시키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은폐하려고 했을까?
(...) 첫 번째, 미시적으로 볼 때, 당시로서는 정화의 원정에 대한 재정적인 부담이 컸기 때문이라는 해석이다. (...) 하지만 이 이유는 명이 안정기에 접어든 15세기 후반 이후, 즉 재정적인 부담이 완화된 이후에 왜 해양 원정단이 지속되지 못했는지에 대해서까지 설명해 주지는 못한다. (...)
두 번째, 정화를 비롯하여 황제의 비호를 받아 권력을 장악한 환관 세력에 대한 저항감과 이에 대한 문인 관료들의 대응 때문이라는 해석이다. (...) 하지만 과연 환관이 주도했다는 이유로 원정단 자체의 성과와 의미가 문인 관료들에게 무시되고 폐기의 대상으로까지 전락했는지는 아직 증명되어야 할 부분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게다가 3장에서 언급하듯 구준(丘濬), 양몽룡(梁夢龍), 왕종목(王宗沐: 1523~1951년), 서광계(徐光啓: 1562~1633년) 둥 문인 관료 중에서도 해양에 대해 개방적이고 적극적인 주장을 한 이가 적지 않게 등장했으므로, 환관 대 문관이라는 대결 논리로 정화 이후의 단절을 설명하기에는 충분하지 못한 듯하다.
세 번째, 거시적인 관점에서 볼 때, 정화의 원정 이전부터 반포되었던 명의 해금 정책이 정화 이후에 본격적으로 가동되면서 더 이상의 해상 원정 논의를 질식시켰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 명조의 해금은 연해 지역의 교역을 완전히 차단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전략적인 판단에 따라 연동되는 '선택적' 해금에 가깝다. 결국 국가의 안보와 이윤의 추구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한 종합적인 관점에서 해금 정책을 재평가할 필요가 있고, 이러한 해금 정책의 성격 규명이 전제되어야 정화 원정단의 시행과 단절을 큰 모순 없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네 번째, 이 설명은 세 번째 설명과 연동된 것으로, 동남 연해 지역에서 발생한 왜구의 밀무역과 폭력적인 약탈이 중국 조정의 안보 의식을 강화했고, 그 결과 해안을 봉쇄함으로써 해안 방어를 위해 들어가는 비용을 절약하고 그 대신에 '북로(北虜)'로 요약되는 북면 육상 방어에 집중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 하지만 이러한 설명을 반드시 한쪽을 살리기 위해 다른 한쪽을 희생해야 한다는 제로섬게임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다. 명조와 청조 모두 육로 방어와 해로 방어를 함께 고려하였으나, 당시 국제 정세('시세')와 국내적 역량을 고려한 '합리적인'(전략적인) 선택이 결국 해금 또는 육방(陸防) 우선으로 귀결되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79~82쪽.)
휘주 상인은 1492년의 운사납은제로 열린 틈을 통해 염상계로 진입했고, 이후 급변하는 상황에서 상업 활동을 확대하기 위해 조정의 정책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관료들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전략을 선택했다. 결과는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그들은 염운법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했고, 양주로 진출하여 막대한 염세를 미리 납부하면서 소금 유통과 대운하 유통을 서서히 잠식해 나갔다. 마침 그들이 진출했던 양주와 회안 등의 도시는 대운하 유통망의 핵심적인 결절점이었고, 양회 염장의 소금 유통망은 염운하-대운하-양자강으로 연결된 유통망과 일치했다. 즉 휘주 상인은 대운하와 양자강을 이용한 남북 방향과 동서 방향의 장거리 유통업에서 성공한 모델이 되었다.
(...)
그런데 이것이 과연 당시 휘주 상인에게 최선의 선택이었을까? 좀 더 극적인 치부의 기회, 가령 해양으로 진출해서 돈을 버는 방식은 고려하지 않았을까? 물론 바다로 진출하면 좀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었겠지만, 해금 정책을 고수하며 바다 건너 세력과 공모하거나 결탁하는 것을 극도로 염려하는 관부와 경쟁하거나 충돌해야 했다. 기왕이면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한 선택을 하는 것이 상인들의 속성이겠지만, 현명한 상인에게는 예상 가능한 이윤과 이를 위해 지불해야 하는 대가를 비교하고 신중하게 선택하는 것 역시 필수적인 덕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 직면했던 휘주 상인은 해상으로의 진출을 포기하고 명 조정과 청 조정이 모두 중시했던 조운과 염정을 적극적으로 후원하며 대운하 유통로에 정착했다. 이 선택을 통해 휘주 상인은 이후 왕조가 교체되는 동란기를 거친 후에도 산서 상인과 함께 중국에서 가장 힘이 있는 양대 상인 집단으로 손꼽혔다. (120~121쪽.)
1573년 6월, 산동반도 남단의 즉묵현(卽墨縣) 복산도(福山島)에서 조운선 일곱 척이 전복되었다. 원인은 바다에서 흔히 만나는 강한 회오리바람이었다. (...)
상황이 긴박했던 만큼 왕종목은 우선 피해 규모를 가늠해 보았다. (...) 사고는 분명 사고였지만,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던 것이다. 북경의 조정에서 가장 민감해하는 항목인 곡물 가운데 바다에 휩쓸려간 분량은 전체 운송량의 2.5퍼센트 정도였고, 선박의 피해 규모는 1.6퍼센트, 인명 피해는 0.3퍼센트에 불과했다.
이 정도 규모의 사고는 이전에 내륙의 대운하를 이용할 때에도 수없이 발생했다. (...) (135~138쪽.)
(...) 왕종목이 우려했던 마지막 변수, 즉 수보직의 교체는 실제 해운 정책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1573년(만력 원년) 6월, 사고가 밠애하자마자 호과도급사중(戶科都給事中) 가삼근(賈三近)을 시작으로 여러 감찰 관료는 기다렸다는 듯이 해운을 정지해야 한다는 상소를 어린 황제에게 올렸다. 그리고 8월에 왕종목은 청천벽력과도 같은 조정의 통보를 받았다. 그동안 그토록 심혈을 기울여 준비했고 이제 막 두 번째 시행을 마친 해운을 금지한다는 통보였다. (144쪽.)
이것이 "왜 중국은 효율적인 해운을 이용하지 않고 대운하에 집착하는가?"라는 '마테오 리치의 난제[利瑪竇難題]'였다. 여기서 리치가 언급했던 해운이란 월항 등지에서 이루어지는 남양(南洋: 동남아시아) 무역이 아니라 강남과 북경 사이의 해도 조운이었다. (...) 이는 곧 조운이라는 국가적 물류에서는 철저히 해금의 정책적 기조를 유지하면서도, 국제적 물류에서는 통제된 거점과 암묵적인 밀무역을 허용했던 대운하 시대의 모순적인 구조와 특징을 보여 준다.
리치는 자신이 제기했던 난제에 나름대로 답을 제시하였다. 그것은 "바다와 해안을 침범하는 해적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이러한 두려움이 중국인들의 마음에 깊이 뿌리박혀 있기에 바다를 통한 북경으로의 조량 운송을 위험하다고 믿는다는 평가였다. 중국인들의 마음에 깊이 뿌리박혀 있는 두려움이 해양이 더 위험하는 기존 신념을 강화했다는 심리적인 분석이다. (...) (174~175쪽.)
(...) 절실한 경제적 필요에 따라 해운이 개방될 수 있으나, 안보의 유지라는 대전제에 종속된 '제한적' 개방이라는 인식의 틀은 아직 근본적으로 변화하지 않았던 것이다.
요컨대 1684년의 해관 설치와 해양 교역의 재개는 천계령 직후에 등장했기에 해금이 완전히 풀리는 것처럼 보이기 쉬우나, 실제로는 해금이 상당히 완화된 것일 뿐 자유로운 교역으로 진전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천계령이 풀렸다는 의미에서 '개해금'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모르지만, 자유로운 해상 교역이 결코 아니었기에 '개해금'은 오해의 소지가 많은 표현이다. (...) 따라서 1684년의 해관 설치는 정씨 세력의 진압 이후 한결 유연해진 국가권력의 안보적 자세와 연안 지역의 절실한 경제적 필요가 '절충'된 결과로 평가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제국의 안보 관점에서 통제할 수 있는 범위의 해상 교역만 허용된 것이다. (254~255쪽.)
여기서 대운하가 남순의 루트로 이용되면서, 황제의 이동로이자 체류지로서의 기능이 추가되었다. 게다가 이번 남순을 시작으로 강희제는 치세 말기까지 총 여섯 차례의 남순을 거행했고, 건륭제 역시 할아버지를 모방하여 총 여섯 차례의 남순을 시행하는 선례가 마련되었다. 이는 수도 북경에 대운하가 연결된 동일한 구조를 지닌 명대에는 없었던 현상이었다. 이는 명대에 비하여 청대에 황제가 대운하를 더욱 중시하는 이유가 되었으며, 대운하 유통로의 모든 지역은 남순 때마다 초긴장 상태가 되었다. (...) 운하 도시의 관료와 상인들도 황제를 알현하기 위해 북경까지 갈 필요가 없어졌고, 남순을 매개로 황제와 현지의 유력자 사이에는 암묵적인 '소통'의 코드와 '거래'가 형성되었다. (...) (257쪽.)
(...) 광주와 하문은 대운하 유통망과의 직접적인 연결 고리가 없었다. 광주는 높은 산맥으로 둘러싸인 하문에 비하여 대유령을 통과하기만 하면 내하 수로망으로 쉽게 연결된다는 장점이 있었다. '일구통상'의 실시 이후 광동 무역 체제(廣東貿易體制, Canton Trade System: 1757~1842년) 시기에 활성화된 주강-대유령-감강-양자강-대운하-북경 노선이 그것인데, 이는 내륙의 육로와 수로를 경유했기에 원양으로 빠지는 해운보다 통제하기가 쉬웠다. (...) 요컨대 광주는 적절한 통제가 가능하면서도 중국 내지에서 생산된 물건과 유럽인이 가져온 물건을 교역하는 창구로 편리하다는 '안보'와 '이윤'의 장점을 겸비한 곳이었던 셈이다. (294쪽.)
(...) 1780년(건륭 45년)에 일흔의 건륭제는 다섯 번째 남순을 거행하고 다시 4년 뒤인 1784년에 여섯 번째 남순에 나섰다. 이제 일흔넷의 고령인 데다가 조부의 남순 횟수인 여섯 번까지 채웠으니 건륭제는 더는 남순을 시도할 힘과 명분을 잃었던 것 같다. 이제 황제는 강남으로 내려가지 않았다. 1784년은 양주의 휘주 상인이 건륭제를 만났던 마지막 해였다. 건륭제의 기력과 의지가 모두 쇠할 즈음부터 약속이나 한 듯 회양 지역 경제와 양주 상인 모두 맥이 풀린 듯했다. 양주의 도시 문화에 활력을 불어넣어 준 것은 양주 상인들의 재력인 듯싶었지만, 근본 요인은 외부적인 곳에 있었던 셈이다. 황제의 남순을 준비할 때 대운하를 비롯한 수로 체계는 재정비되었고, 도시의 문화시실은 떠들썩하게 단장되었다. 그런데 1784년 이후로는 이처럼 강력한 동기와 활력이 양주에 부여되지 않았다. (305쪽.)
1784년 11월, 광주 황포항에 정박해 있던 영국 동인도회사의 선박 '레이디 휴즈(Lady Hughes)호'에서 발생한 사건은 이후 중국과 서양 사이의 외교 관계에 불길한 전조가 되었다. 양력 11월 24일에 레이디 휴스호에서 발사한 예포(禮砲)가 '우연히' 옆에 정박해 있던 중국 선박에 떨어져 구경하던 두 명의 중국인이 사망했다. (...) 당시에 광주에서 장사하던 영국인들과 중국 황후호의 미국인들을 비롯하여 외국 상선의 선원들 대부분이 힘을 합쳐 저항했으나 결국 중국 당국의 단호한 입장을 이기지 못하고 레이디 휴스호는 해당 포병을 중국 측에 인도했다. 그는 1785년 1월에 교수형을 당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광주의 동인도회사 의회는 중국 정부의 사법적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않고서는 영국인을 안전하게 보호할 수 없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레이디 휴스호 사건은 이후 영국이 중국에 요구하는 자유무역, 치외법권, 영토 할양이라는 일련의 요구를 하나의 일괄 조치로 요구하게 되는 촉매제가 된 것이다. 이로 인해 영국 내부에서도 기존의 광동 무역 체제에 불만을 품고 황제를 직접 만나 무역에 관한 담판을 짓는 것으로 여론이 급변하였다. (...) (316~3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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