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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친코 (이민진, 문학사상사, 2018.)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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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친코 (이민진, 문학사상사, 2018.)

Dog君 2022. 7. 16. 09:58

 

"역사가 우리를 망쳐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History failed us, but no matter"

 

  (사전에 따르면, 'fail'은 자동사로 쓸 때만 '망치다'의 의미가 있다. 즉, 지금처럼 "역사가 우리를 망쳐놨지만"으로 번역하기는 어렵다는 거다. 물론 전문번역자가 이렇게 번역한 것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을테니 이걸 무작정 오역이라고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내 생각에는 사전적 의미에 충실해서 "저버리다' 정도로 쓰는게 내용상 가장 무난하지 않나 싶다.)

 

  하필 드라마 파친코가 공개되고 반향이 일던 즈음에 문학사상사의 판권 계약이 종료되는 바람에 발만 동동 구르고 있던 것을 순전히 책방이음의 호의 덕분에 읽을 수 있었다.

 

  (그래서 이 책, 소설로서는 가장 중요한 세일즈 타이밍을 놓친 듯하다. 한창 화제가 될 때는 책을 못 팔다가 애초의 반향이 좀 시들해진 후에야 새 책이 나올 예정이기 때문이다. 물론 새 출판사는 시즌2를 기대하고 있겠지만...)

 

  가장 먼저 만듦새부터 짚고 넘어가야겠다. 책을 읽다 보면 종종 어색하다 싶은 표현이 나오는데, 이게 대체로 오역이나 문장 누락 때문이라고 한다. (오역에 관해서는 포털 검색 ㄱㄱ) 편집 단계에서도 꼼꼼함이 부족했다는 느낌이다. 예컨대 386쪽에서 거론한 인물 중에서 "강상준"은 아마도 '강상중'의 실수가 아닐까 싶다. 만약 '강상중'이 맞다면, (물론 번역자야 강상중을 모를 수도 있지만) 문학사상 정도 되는 출판사에서 이걸 편집단계에서 걸러내지 못했다면 그것은 빈축을 살 일이다. 재일코리안 연구에 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는 내 눈에도 이런게 보이니 이쪽에 밝은 분이 보시면 더 많이 보일 수도 있겠다.

 

  소설이라는 점에서도, 글쎄, 그저 무난하게 잘 읽기는 했는데 굉장히 재미있다거나 흡입력이 느껴진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일단 캐릭터랄게 없다. 수십 년간 이어지는 대하소설 느낌을 내려면 적어도 이야기 전체를 끌어가는 중심인물을 세우거나('삼국지'의 유비 형제나 '토지'의 서희 같은) 그게 아니면 적어도 각 캐릭터를 아주 전형적으로라도 설정해야 되는데('태백산맥이 그러했지) 선자도 그렇고 한수도 그렇고 책을 다 읽고 나서도 어떤 사람인지 딱히 감이 오지 않는다.

 

  그리고 이 책의 재일코리안 서사는 나에게 익숙한 그것과는 많이 달라서 그것도 처음에는 당황스러웠다. 재일코리안 사회의 역사적 형성 과정이나 그들이 일본 사회에서 느끼는 차별과 배제의 경험, 국적 선택을 둘러싼 고민들, 둘로 나뉜 재일코리안 사회의 갈등, 북송 문제 등 재일코리안을 이야기할 때 흔히들 거론하는 소재들은 이 소설에서 아주 희미하게만 다뤄질 뿐 소설의 전개나 캐릭터의 성격에 거의 영향을 주지 않는다. 소설 처음에 '역사history'가 어쩌저쩌고 멋부린 문장을 던지긴 했지만 정작 이 책의 이야기는 '역사'와는 별달리 연결되지 않는다. (아, 그래서 "상관 없다no matter"라고 한건가.)

 

  물론 내게 익숙하지 않다는 것이 이 이야기의 결격이 될 수는 없다.재일코리안을 말할 때 떠올리는 나의 서사가 너무 편협한 것일 수 있다. 어쩌면 저자가 의도적으로 그런 서사를 피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럴 가능성을 모두 인정한다해도 이 소설이 나의 편견을 부수는 새로운 대안서사를 만들어낸 것 같지는 않다. 이 책에서 묘사되는 재일코리안은 그저 일본 사회의 '소수자'로만 다뤄질 뿐 그들을 둘러싼 맥락과 배경을 저자가 나름대로 새롭게 해석했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서사에서 유독 불만스런 부분도 꼽자면, 그건... 스포일러니까 아래에 따로 쓰기로 하고.

 

  종교적 모티프에 밝은 사람이라면 여기에 등장하는 '이삭', '요셉', '노아' 등의 인물을 종교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 이들이 주로 창세기에 등장하는 인물이라는 것과 무일푼으로 일본에서 삶의 터전을 마련해갔던 선자(와 주변 사람들)의 경험을 연관지은 해석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만은 내가 거기에 대해서는 까막눈이니까 이 얘기는 여기서 그만..

 

  뭐 암튼 그래서 이 소설에 대해서는 재일코리안에 밝은 사회학자나 역사학자가 비평이나 해설을 하면 재미있고 유익할 것 같다. (이 책에도 해설이 실려있긴 한데, 아 그거 참, 영 재미도 없고, 맥아리도 없고...) 소설을 소설 그 자체로 즐기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그런 비평이나 해설을 덧붙이면 200%, 300%로 즐길 수 있잖아요. 물 들어올 때 노 젓는다고, 공부 좀 많이 하신 누가 이런거 좀 쓰시면 널리 읽히기도 하고 좋잖아요. 그러니까 누가 글 좀 써줘요, 네? (현기증 난단 말이에요.)

 

  일본은 곤경에 처해 있었다. (...) 중국에서는 전쟁이 쉼 없이 계속되었다. (...) 일본은 아시아에서 한층 더 치열하게 전쟁을 벌이고 있었고, 머지않아 유럽의 전쟁에서 독일과 동맹을 맺을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그런 일들이 요셉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 요셉이 아는 모든 조선인들은 아시아에서 벌어지는 일본의 확장 전쟁을 무의미한 짓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중국은 조선이 아니었다. 중국은 백만 명을 잃어도 계속 버틸 수 있었다. (...) 조선인들이 일본이 승리하기를 바란다고? 천만의 말씀이다. 하지만 일본의 적이 이긴다면 조선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까? 조선인들이 스스로를 구할 수 있을까? 분명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내 밥그릇이나 잘 챙기자는 것이 조선인들이 남몰래 품고 있는 속마음이었다. 가족을 구하고, 자기 배를 채우고, 관리자들을 경계하자. 조선의 독립주의자들이 나라를 되찾지 못한다면 아이들에게 일본어를 가르쳐 출셋길을 열어주자. 적응해서 살자. 이만큼 간단한 것이 또 어디 잇겠는가? 조선의 독립을 위해 싸우는 모든 애국자나 일본을 위해서 싸우는 재수 없는 조선인 개자식이나 다들 먹고 살려고 애쓰는 만 명의 동포 중 하나일 뿐이었다. 결국 굶주림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1권, 266~267쪽.)

 

  그로부터 몇 년이 흐른 후, 노아는 일본인 사장이 처음부터 자신을 좋아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첫 달 이후, 일본인 사장은 다카노에게 노아의 봉급을 올려주고 노아에게 더 좋은 방을 배정해주라고 말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노아에게 특혜를 준다고 소란을 떨지도 모르니까 그해 말까지 기다리라고 했다. 일본인 사장은 반 노부오가 조선인이라고 의심했지만, 그 사실을 아무도 모른다면 상관없었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2권, 150쪽.)

 

  "잘 들어.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어. 이 나라는 변하지 않아. 나 같은 조선인들은 이 나라를 떠날 수도 없어. 우리가 어디로 가겠어? 고국으로 돌아간 조선인들도 달라진 게 없어. 서울에서는 나 같은 사람들을 일본인 새끼라고 불러. 일본에서는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아무리 근사하게 차려입어도 더러운 조선인 소리를 듣고. 대체 우리 보고 어떡하라는 거야? 북한으로 돌아간 사람들은 굶어 죽거나 공포에 떨고 있어." (2권, 220쪽.)

 

  솔로몬의 파티에 초대된 아이들은 외교관과 은행가, 미국과 유럽의 부유한 국외 거주자들의 자녀들이었다. 모두가 일본어가 아니라 영어로 말했다. 모자수는 서구인들의 사상을 좋아해서 솔로몬을 요코하마에 있는 국제 학교에 보냈다. 그는 아들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키울 것인가에 대한 확실한 계획이 있었다. 솔로몬은 일본어뿐만 아니라 영어를 완벽하게 할 줄 알아야 했다. 전 세계의 중산층 사람들 사이에서 성장해야 했다. 궁극적으로는 도쿄나 뉴욕의 미국인 회사에서 일해야 했다. 그중에서 특히 뉴욕은 모자수가 한 번도 가보지 못했지만 모든 사람들을 공정하게 대우해주는 곳이라고 생각하는 도시였다. 모자수는 아들이 국제적인 인재가 되기를 바랐다. (2권, 261쪽.)

 

  (여기서부터 다소 스포일러 있음)

 

  이 소설에서 가장 마음에 걸리는 것은, 모든 등장인물의 최종 종착지가 파친코라는 것이다. 공부를 많이 하건 적게 하건, 자기 혈통(그놈의 '핏줄'은 이 소설에서도 중요한 요소다)을 인정하건 말건, 주요 인물은 모두 다 결국 파친코로 귀결된다. (깔때기여, 뭐여) 불법 아니면 행운에 기댈 수밖에 없는 재일코리안의 취약한 운명을 그런 식으로 드러내는 것이 저자의 의도였을까.

 

  이는 혈통이니 핏줄이니 하는 것에 적극적인 의지로 맞섰던 이삭과 노아가 맞는 파국 때문에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1권 중반 정도까지만 해도 선자와 경희에게서 무언가를 기대했지만 결국에는 그것이 부처님 손바닥 신세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지점에서부터 그만 맥이 풀렸다. 그 후로는 계속, 무슨 노력을 하건 간에 결국에는 소수자로서 음지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임을 보여주다가 'Life goes on.'으로 소설이 끝나버린다. 아, 이렇게 이 소설도 결국에는 무기력한 체념의 이야기로 끝나는 건가 해서 뒷맛이 영 개운찮다.

 

  원래는 어떻게 해서든 드라마도 챙겨봐야겠다 싶었지만, 책을 다 덮은 지금은, 으흐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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