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g君 Blues...
보통 일베들의 시대 (김학준, 오월의봄, 2022.) 본문
김학준이 쓴 '보통 일베들의 시대'를 읽었습니다.
'일베'라는 이름이 세간에 등장했을 때의 놀라움을 잊을 수 없습니다. 저런 말을 실제로 입으로 말하고, 손으로 쓰는 사람이 세상에 실제로 있었구나! 하는 마음이었죠. 저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저와 비슷하게 놀랐고, 그 이후로 일베는 언제나 문제적인 존재였습니다. 그들이 쏟아내는 혐오와 왜곡 앞에서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겁니다. 저 역시도 그런 말과 글들을 보면 욕지거리부터 튀어나옵니다.
하지만 저는 일베에 쏟아진 거개의 반응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습니다. 일베가 문제적인 존재라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말이죠. 저는 일베를 단지 악마화하고 타자화하는 것으로는 아무런 해법도 찾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일베 역시도 우리 사회 안에서 나타난 현상이고 그 구성원 역시 우리 사회의 구성원이니 그 기원과 해법 역시 우리 사회 안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쪽입니다. (그런 점에서 제 생각은 이 책에서 지양해야 한다고 지적한 '우리 안의 일베'에 더 가깝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책의 제목부터 의미심장하게 느껴집니다. "보통"이나 "들" 같은 표현은 일베가 단지 하나의 사이트가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에 도사린 혐오의 정서이며, 일베의 탄생 역시 구조적이고 역사적인 기원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뜻합니다. 이 책이 꽤 긴 분량을 할애해서 일베의 역사적 연원을 더듬고(1장), 일베 이용자를 직접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본 것(4장)은 그런 문제의식 때문일 겁니다. 또한 일베의 데이터를 분석하는 (그래서 문외한에게는 너무 기술적이고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2장 역시 저자가 일베를 단지 타자화하고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일베를 객관적이고 학문적인 분석대상으로 바라보았기에 가능한 구성이겠습니다.
그래서 탕수육은 이런 접근법에 적극 동의하는 바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일베'라는 현상이 90년대 중후반 등장한 온라인의 하위문화에서 기원했다고 생각합니다. 온라인 공간이란 생산자와 소비자의 경계가 흐릿하기에 본질적으로 탈권위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현실 정치에 대해서 신랄하고 비판적일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죠. 이것을 두고 당대에는 온라인의 정치지형이 '진보적'이라고들 이해했지만 이미 이 시기부터 소수자에 대한 혐오코드는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예컨대 딴지일보만 해도 정치에 대한 신랄한 풍자는 여성에 대한 혐오나 편견과 기댄 것이 대부분이었죠. 서로 정반대인 것처럼 보이는 '펨코'와 '루리웹'이 젠더 문제에서만큼은 '국공합작'을 하는 것이 그로부터 기인할 것이겠죠. 그래서 저는 온라인의 정치지형을 평가할 때 '진보/보수'보다는 '탈권위'의 구도가 좀 더 적절하다고 봅니다. 온라인의 정치지형을 분석할 때 '진보/보수'라는 단순하고 고답적인 이분법적 잣대만 자꾸 들이대면, 분석결과가 현실에 비해 너무 단순할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정치가 배출되는 담론지형 자체를 이분법으로 단순화시킨다고 생각합니다. 관찰자의 존재가 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뭐 그런 상황이라고나 할까요. 이 과정에서 '진보/보수' 구도로 소화될 수 없는 '소수자 혐오' 등의 문제가 부차화되는 것은 물론이구요.
쓰다보니 흥분해서 제 얘기가 길어졌습니다만, 뭐 암튼,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 책이 무척 마음에 든다는 겁니다. ㅎㅎㅎ
자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이 책에 따르면 일베는 능력주의와 파편화의 결과물인 것처럼 보입니다. 저자는 일베의 구성원이 희구하는 것이 '평범함'이라고 봅니다. 각자도생의 가혹한 체제 속에서 각각의 생애경로는 '평범함'으로 획일화되었지만 이 평범하고 소박한 꿈조차 달성하기 어려운 것이 엄연한 현실입니다. 그러다보니 각각의 구성원은 '자기경영' 혹은 '자기계발'에 매달리게 되고, 이에 (자의건 타의건) 순응하지 못한 존재에 대해서는 철저한 무감無感과 멸시를 통해 우월감과 존재감을 확인할 뿐입니다. 그래서 일베의 열광은 실은 "도피적인 태도"(346쪽.)일 뿐이고, 오래 지속될 수 없는 "차가운 열광"(353쪽.)입니다.
그렇기에 해법도 이로부터 도출됩니다. 일베의 저류에 깔린 것이 '평범함'을 이룩하기 어려운 이들의 좌절감에 있다고 할 때, 이를 비웃거나 낡은 것으로 치부할 것이 아니라 그 대안이 무엇인지를 함께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죠. 각각의 생애경로가 '평범함'으로 획일화된 것이 문제라면, 그 해법은 "평범함을 다변화"하고 "불평등 문제를 해결"(이상 367쪽.)하는 것에서부터 해법이 모색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마지막 장까지 다 읽고 나면, 어딘지 모를 궁금증이 여전히 남습니다. 이는 이 책의 기본적인 구성과 관련이 있을 것입니다. 이 책은 2014년에 저자가 발표한 석사학위논문에서 기본적인 골격을 가져왔습니다. 지금으로부터 8년 전입니다. 독자로서의 궁금증은 바로 이 8년의 간격에서 생겨납니다. 물론 저자는 그간 일베의 혐오가 생산되고 소비되는 방식은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았기에 8년의 간격이 결정적인 문제가 되지는 않으리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독자 입장에서는 그 8년의 시간 때문에 궁금증이 계속 솟아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지난 8년간 우리가 겪은 일이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일베에 대한 관심이 급격히 일어났던 2013~2014년 경 대부분의 논자들이 동의했던 것은, 일베가 오프라인에서 물리적으로 구체화되지는 않으리라는 전망이었습니다. 일베가 기초한 온라인의 문법은 오프라인의 그것과는 분명히 다르기 때문입니다. 일베를 비롯한 대부분의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친목질'을 터부시하는 것이 좋은 예입니다. 이 책 역시도 일베의 열정을 "차가운 열광"이라고 부르며, 그것이 오프라인에서 실질적인 힘을 발휘하기는 힘들 것이라 예상합니다.(353~354쪽.) 하지만 (이 책이 곧이어 서술하는 것처럼) 일베 류의 공공연한 혐오 정서를 자양분으로 삼은 현실정치인 이준석의 등장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하겠습니다. 이 책 역시 이준석의 등장을 혐오의 정서가 오프라인에서도 실질적인 힘을 획득할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예시합니다. 그런데 이 책은 이준석에 대해 책 말미에서 살짝 언급하고 지나가는 정도로 그치고 특별히 더 많은 이야기를 덧붙이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가 집권여당의 당대표로 떡 하니 버티고 있는 2022년을 살아가는 독자로서는 이에 대한 저자의 생각이 궁금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8년의 간격은 또다른 궁금증도 불러일으킵니다. 2014년의 일베 구성원과 2022년의 일베 구성원은 분명히 다릅니다. 무엇보다 그 8년 사이에 세월호 사건과 박근혜 탄핵 등의 굵직굵직한 경험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저는 2022년의 정치를 말할 때, 세월호 사건과 박근혜 탄핵을 지켜보며 20대가 된 이들이 왜 '이대남'이 되었는가 하는 문제가 반드시 규명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일베에 대한 이 책의 분석에 대해 적극 동의하는 한편으로 지난 8년 간의 정치적 경험이 2022년의 '일베'와 '혐오'로 이어지는 과정이 보이지 않는 것은 약간 아쉽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런 아쉬움이 이 책의 흠결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왜 이 내용이 없냐'는 식의 비판은 썩 정당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 책의 내용과 형식에 상당 부분 동의하는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저자가 다음 책(혹은 논문)을 통해 이런 아쉬움도 풀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일 뿐입니다.
'깨어 있는 진보 대 동원된 보수'라는 신화는 정보화 혁명 이후 한국 사이버공간의 정치의식을 논할 때 언제나 깔려 있는 전제요, 상식이었다. 십알단 이전에는 '알바'라는 이름으로 호명된 이들 '동원된 보수'는 그 명명처럼 하나의 목소리로 받아들여지지 못한 채 조롱과 비아냥의 대상으로만 위치지어졌다. 즉, '이성'적인 사람이라면 한국의 보수는 '감정'적으로 용서할 수 없으며 따라서 옹호할 수도 없는 대상이기 때문에 '수구 꼴통'을 대변한다는 것은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없거나 무식한 사람, 혹은 진정성 없이 감정노동(또는 여론몰이)을 하는 사람으로 여기는 게 당연하다는 태도로 귀결되어왔던 것이다. 그렇기에 포털과 커뮤니티를 막론한 사이버공간에서 보수를 자임하거나 우파의 이념을 설파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냉소나 동정의 대상이 되었다. 다시 말해 최소한 사이버 '공론장'에서 우파의 자리는 존재한 적이 없었다. 그들은 단지 소수의 '악플러'로, 기계적으로 타이핑을 반복하는 '알바'로, 과거로의 회귀를 주장하는 '무식한 노인들'로 타자화되어왔다.
하지만 일베는 달랐다. (...) 보수 또는 극우적인 생각을 가진 이들이 실존한다는 놀라움, 실존하는 보수주의자들이 심지어 젊다는 반전, 그들의 행동이 자발적이라는 데서 오는 당혹, 특히 범진보 진영의 입장에서 행해지던 비판과 풍자의 칼날이 정확히 반대 방향을 향한다는 충격, 정의와 공정 같은 민주적 가치로 민주주의를 공격하는 데 대한 분노에 이르기까지, 일베는 그 등장과 함께 한국 공론장에 거대한 혼돈을 불러온 진앙지가 되었다. (7~8쪽.)
또한 백욱인의 지적처럼, 딴지일보가 개척한 패러디는 성찰을 전제로 한 웃음을 불러일으키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여전히 그것을 보고 웃는 이들의 우월감이 도사리고 있다. 사이버문화의 초창기에 해당하는 200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패러디의 대상은 당시 한나라당이나 자유민주연합(자민련) 같은 보수정당과 그 지지자들이었다. (...) 스스로를 '깨어 있는 시민'으로 여기는 '웃는 이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반대파를 무식하고 비윤리적이며 비양심적인 이들로 몰아세웠다. 한국 사이버 정치의 맥락에서 패러디라는 양식의 확대는 정치적 담론을 웃음으로, 그중에서도 냉소와 조롱으로 대체하는 역효과를 가져왔다. (39~40쪽.)
(...) 2010년 이후 한국 인터넷 담론장의 문제는 다음과 같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첫째, 주도적으로 이슈를 끌고 가지 못한 진보담론의 리더십 부재. 둘째, 다음(아고라)을 필두로 한 '진보' 커뮤니티의 게토화. 셋째, 두발자유화 문제에서부터 2015년 4월 이후 새롭게 그어진 반여성 전선에서까지 볼 수 있는 '진보 네티즌' 자체의 보수성. 넷째, 자신의 오류 가능성을 부정하고 상대편을 악마화하는 성찰 불가능성. 이러한 문제는 지금의 일베가 나타날 수 있는 훌륭한 토양을 제공했다. 첫 번째 문제는 진보담론 부재로 인한 전략적 공백을 일베가 선점할 수 있는 담론적 공간을, 두 번째 문제는 진보담론 자체의 자생력이 상실됐다는 의미에서 일베의 공격이 갖고 있는 파괴력을 극대화하는 전략적 우위를 제공했다. 세 번째 문제는 '민주주의' '정권'과 같은 거대담론에 매몰되어 데이트 비용과 같은 생활 정치 영역에 대한 관심이 부재하게 된 결과 '김치녀 담론' 등 보수적·'윤리적' 가치에 기대 일베의 주요한 공격을 사실상 방치하게 되었으며, 특정 진영에 속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가진 정당성에 대한 확신과 그로 인한 성찰 불가능성은 음모론적 세계관, 또는 '순수성'에의 희구를 강화하며 소통을 통한 문제 해결의 가능성을 축소했다. (49~50쪽.)
(...) 나날이 거대해지는 갤러리의 규모와 높아지는 리젠율은 웃음을 생산하기 위해 투여되는 노동의 가치 절하를 초래했다. 주목을 받기 위해 공들여 콘텐츠를 만드는 것보다 자극적인 제목과 콘텐츠를 게시하는 것이 훨씬 더 유리한 환경이 된 것이다. 바야흐로 '막장'의 시대가 열렸다. 이제 갤러리 이용자들은 암묵적으로 지켜지던 커뮤니티의 금기, 또는 한계를 넘어 무한히 확장하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금기를 깨부수는 패러디의 전통을 따라 고인을 희롱하는 것도 개의치 않고, 대구 지하철 참사나 세월호 참사 같은 사회적 비극의 희생자는 물론 유가족도 농담의 대상으로 삼기 시작했다. (...) (70쪽.)
(...) 앞서 우리는 일베의 문화적 기원을 추적하는 작업을 거쳤다. 일베 게시물은 그 내용과는 상관없이 온라인 문화콘텐츠라는 형식을 갖추고 있다. 온라인 콘텐츠는 해당 커뮤니티의 역사적·문화적 맥락이라는 통시적 바탕 위에 특정 시점의 사건이라는 공시적 맥락이 중첩되는 한편, 그 게시물에 감정적으로 공명하는 이들이 댓글이라는 적극적인 상호작용을 취했을 때 비로소 유의미한 무언가가 될 수 있다. 대부분의 바이럴 콘텐츠는 이런 식으로 확산된다.
(...) 외부세력이 개입하여 눈에 띄는 숫자를 만들어낸다 한들, 그것이 구성원들의 인정을 받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예컨대 아이유와 같은 시점에 앨범을 발매한 모 가수가 음원 사재기로 음원사이트 순위를 '올킬'한다고 하더라도 그의 노래가 아이유의 노래보다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고 말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것이 이른바 '국정원 일베 개입설'이 무의미해지는 이유이다. (96~97쪽.)
(...) '남성' 일베 이용자들은 후기근대적 불안과 순응의 피로를 로맨틱한 이상적 사랑을 통해 해소하고자 한다. 하지만 '김치녀'라는 한국 여성 일반은 사랑의 이상을 물질화하고, 결혼을 통한 안정의 목표를 '평등'의 이름으로 파괴하는 존재들이다. 그러면서도 경제적으로는 남성에게 의존하고, 병역의무로 대표되는 공동체적 책임을 회피하며, 일상생활에는 전혀 필요 없는 물건(명품백)에 집착한다. 남성들(특히 일베 이용자들)은 이러한 여성들의 통제 불가능성을 강하게 성토하는데, 이들의 인식에서 '김치녀'에 대한 공감대는 정치적 지향과 무관하게 형성되어 있는 것이다. (...)
이러한 분개는 어느 정도 불안을 완충해줄 수 있다고 믿었던 유일한 가치인 사랑(연애, 결혼)이 대단히 합리적이고 계산적인 의례가 되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이 때문에 이들은 언제나 사랑에 목말하하면서도 '아파'할 수밖에 없다. 부안한 현대에서 거의 유일한 안정을 보장하는 사랑에 대한 배신감이 격렬하게 표현되는 것은 물론이다. (209~210쪽.)
연구참여자들에게서 보이듯이 이들은 '자기경영'의 이름으로 스스로를 착취하는 동시에 그러한 대세에 따르지 않는 이들을 비난한다. 이 새로운 무능과 구속에의 집착은 자유의 이름으로 생애경로를 획일화한 후 후기자본주의 체제의 진정한 힘이며, 이는 유동적 근대의 '유동화' 원리가 사람들을 공포로 경직시킴으로써 상상력과 사유의 능력 자체를 빼앗아 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 그들이 느끼기에 88만 원 세대론에서 말하듯 '짱돌을 들라'는 요구는 대단히 무례하면서도 무리한 요구이다. 공포와 불안이 내사화된 이들에게 '기득권'인 386 세대는 "존나 열심히 살고 있는 우리"에게 왜 1980년대의 자신들처럼 저항하지 않느냐며 무턱대고 다그치는 무례한 존재일 뿐이다. (...) 최선을 다해 '자기계발 담론'을 수행하고 있는 만큼 그 '노력'이 부정되고 무시되는 것에 대한 분노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386 세대에 대한 일베 이용자들의 분노는 사실상 어떠한 선택지도 놓여 있지 않은 현실을 만들어낸 이들의 원죄에 대한 추궁이며, 이들의 순응은 순응 외에는 답이 없는 한국 사회를 온몸으로 통찰한 결과이기도 하다.
이를 감정사회학적 견지에서 번역하자면, 앞선 세대의 '짱돌을 들라'와 같은 요구는 불안을 외사화화여 분노를 표출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체제의 감정적 분할통치 전략은 노동자들 사이의 연대를 불가능하게 한다. (...) 하물며 타자지향적 성격으로 대표되는 중산층의 감정 아비투스를 가지고 있는 청년들의 경우라면 불안과 공포를 분노로 외사화할 가능성은 대단히 희박하다. 아직 실제로 취업을 하지 않은 상황에서의 '기대'는 자기계발을 통해 현실화될 수 있다는 희망으로 변주되므로 이 과정에서 체제 순응적 삶을 강화하는 것 외에 다른 선택지를 상상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249~252쪽.)
무엇보다 평범 내러티브는 오늘날의 청년들에게 '평범함' 그 자체가 하나의 유토피아가 되었음을 암시한다. "꿈"은 친밀성과 가족의 영역을 유지해 계급을 재생산하는 데 초점이 맞춰진다. 이제 누구도 '계층 상승'을 꿈꾸지 않는다. "금전적으로 부족하지 않게", "평화롭게, 사회에서 튀지" 않게, "화목한 가정을 이루어서" 평범하게 사는 것이 불가침의 유토피아가 된다. 그리고 그러한 유토피아를 위해서는 모든 가치를 물화시키는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 연애, 결혼, 육아로 이어지는 평범함의 유토피아에서 필요한 것은 이제 오로지 돈뿐이다.
그리고 여기서 다시 불안이 고개를 든다. 대학 입시에서 '재수는 필수, 삼수는 선택'이었던 것 애교로 느껴질 만큼 청년 실업의 현실은 살인적이고, 부모를 보며 간접적으로 경험한 구조조정의 공포가 취업 이후의 상상에도 그림자를 드리운다. 오늘날 한국을 살고 있는 청년이라면 누구나 겪고 있는 이런 상황에서, 일베 이용자들은 저항보다 순응을 선택한 이들이다. (260~261쪽.)
(...) 평범 내러티브는 입시나 취업처럼 누구나 겪은 일상생활에서의 어려움은 물론, 흙수저라는 태생적 환경, 왕따, 심지어 세월호 사건과 같은 사회적 참사에 이르는 고통까지도 모두 개인이 감당해내야 하는 것으로 만들고, 그러한 고통을 감당함으로써 생존자 또는 감수感受자로서의 능력을 입증할 것을 요구한다. 순응하는 이에게 복이 있고, 참는 자에게 차례가 올 것이라는 믿음하에 평범 내러티브는 타인의 고통의 현존을 부정한다. 만약 어떤 이가 고통을 감당하지 못한다면 그것으로 그는 패자이고, 패자에게는 권리가 없으므로 사회에 어떠한 요구도 해서는 안 된다. 그의 패배, 즉 '권리 없음'은 오로지 고통을 극복해내지 못한 그의 탓이기 때문이다. 이때 고통의 극복은 오로지 그 자신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 누구의 삶에나 주어지는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 패자들에게 남는 것은 도태 아니면 승자들이 선의로 내어주는 시혜를 감사히 받기나 하는 것뿐이다.
이 같은 각자도생의 윤리는 평범 내러티브를 구성하는 또다른 도덕적 정당화 기제인 능력주의를 만나 패자를 멸시하고 승자를 물신화하는 데 이른다. 승자로서 패자를 멸시하는 감각이야말로 일베의 열광적인 혐오를 설명해주는 기제인바, 능력주의의 한국적 변종이라 할만한 평범 내러티브는 어떤 말이나 행위를 '일베적'이라고 느끼게 만드는 직감의 많은 부분을 설명해준다. (269~270쪽.)
물론 모두가 이 파괴적인 감정에 순순히 마음을 내주지는 않으며 공동체가 산산히 흩어질수록, 사이버공간이든 동네 공터든 마음 맞는 이들이 만나 꼭 껴안고 서로를 붙들고자 하는 노력들이 있어왔다. 공동체 회복에의 시도는 성공보다 실패할 가능성이 높지만, 때로 공동체 회복을 바라는 이들의 감정적 고양 자체가 훼손된 집합감정을 접합하기도 한다. 최소한, 쪼개졌던 마음이 조금이나마 달라붙는 회복의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혐오란 너무나 달콤하다. 현실의 나열만으로도 숨 막히는 '헬조선'의 상황에서 혐오는 어떤 대안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혐오하는 순간만큼은 타자화된 이를 (댓글로나마) 짓밟으며 스스로의 존재 의미 또는 우월감을 회복할 수도 있고, 지금 겪고 있는 불행의 원인을 그들에게 돌릴 수도 있다. 그것이 얼마나 파괴적인 감정이든 간에, 혐오를 통해 고양된 자아의식은 다차원적으로 몰려오는 불안과 공포, 수치심을 잠시나마 잊게 해준다. 타자의 존엄을 훼손함으로써 자신을 회복하고자 하는 시도는 욕설과 패드립을 만나 일종의 해방감을 선사한다. 그렇게 오늘도 일베나 유튜브 같은 삶의 뒷공간에는 쓰레기 같은 말이 쌓여간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일베가 일베일 수 있는 특수한 감정적 표현 양식이 드러난다. 일베는 냉소하는 이들이다. (...)
일베의 냉소는 일베 이용자들이 스스로를 이성적 주체로 여긴다는 사실에서 연원하는 우월적이면서도 탈현실적인, 그러므로 실은 도피적인 태도이다. (...) (345~346쪽.)
(...) 온라인에서만큼은 어느 커뮤니티보다 열광을 과시하는 일베지만 '현실 세계'에서 서로를 대면한 적은 없기에 그들이 '일부심' 등으로 연출하는 연대는 근본적으로 불충분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나는 일베가 보여주는 이러한 열광을 '연대를 만들어내지 않는 열광', 다시 말해 차가운 열광이라고 부르고 싶다. 차가운 열광은 타자를 향한 냉혹한 폭력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 열광은 '희생자'인 타자에게는 물론 동료이며 '가해자'인 '우리'에게조차 냉담한 열광이고, 일베라는 공간 자체는 공적이되 그 구성원들은 사적인 공간에, 즉 컴퓨터와 스마트폰 앞에 머물러 있기에 가능한 열광이다. (...) 2014년,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위한 단식농성장 옆에서 이에 '대항하기' 위해 이뤄진 이른바 '폭식집회'가 장기적인, 또는 집중적으로 대규모의 자원을 투입해야 하는(즉, 정치적으로 사람들을 동원해야 하는) 집회가 되지 못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353~354쪽.)
이준석은 과연 단지 한때를 휩쓸고 지나갈 젊은 정치인의 일베적 캐릭터에 불과할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일베적 멘털리티와 행위는 더 이상 사이버공간의 하위문화가 아니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산발적으로 분출되던 혐오와 불만이 그들을 가장 잘 이해하는 정치인에 의해 '정당한' 것으로 인정받고, 그 인정을 바탕으로 정치적인 동원과 승리라는 경험을 축적하기에 이르렀다. 당초 2030 남성 청년층과 60대 이상 노인층을 한데 결집하는 것으로 민주당 코어 지지층을 고립시키겠다던 국민의힘의 '세대 포위론'은 20대 여성의 '이반'으로 좌절되었지만, 혐오를 기표로 지지층 결집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확인한 정치는 더욱 가열한 백래시를 시도할 확률이 높다.
만약 이준석에게서 일베의 그림자를 느낀다면 그것은 그가 혐오 선동가여서가 아니라(설령 그렇다 할지라도 선동이라는 행위는 부차적이다) 그가 보여주는 정치의 형식과 내용과 비전이 일베의 그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준석이라는 표상은 일베적 멘털리티가 정당성을 확보하고 승리의 경험을 축적하며 조직화되고 주류화되는 문을 열어젖혔다. 그리하여 이준석에게서 느껴지는 일베의 그림자란 각자의 특수한 경험과 환경과 조건이 무시되고, '공정한 경쟁'이라는 이름의 경직된 평가체계에 모두가 사활을 걸고, 그 결과에 따른 열패감과 모멸감, 그리고 빈곤까지도 기꺼이 받아들이는 능력주의적 디스토피아의 도래다. 하물며 모멸을 주는 이들이 일베적 형식까지 취한다면 이 사회가 얼마나 참혹할지는 말할 것도 없다. (361~362쪽.)
(...) 체계적인 무능과 마비, 지적 게으름 또는 허영 속에서도 한국 인문사회과학에서는 탁월한 연구와 새로운 시도들이 계속해서 나타나고 있다. (...) 촘촘한 현장조사와 철저한 문헌연구, 연구자들 사이의 치열한 리뷰까지 지식 생산의 정석을 따른 연구와 언어화된 경험들은 현실을 살아가는 이웃들로부터 귀납한 지혜이기에 단단하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생산된 지식은 역사성과 거시적 맥락을 복원하여 지식과 개념의 연결망을 구성하고 이윽고 활자 밖으로 튀어나오는 생동감과 현실감을 전달한다. 이러한 현장성이야말로 탈맥락화를 통한 반증 사례를 들이밀며 '깔짝대는' 일베식의 이죽거림과 선동가들의 현혹에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지식의 원천이라고 믿는다.
많은 이들이 오늘날을 혐오 사회라고 일컫는다. 갈등이 격화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역사를 돌이켜보면 갈등은 항상 기존의 힘과 대안적 힘이 어느 정도 비등한 수준이 되었을 때 폭발했다. 지금의 이른바 '젠더 갈등'과 소수자 혐오는 바꿔 말하면 한국 사회의 '평범'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것이며, 자신을 소수자로 인식하는 이들이 그만큼 많아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당장 일베적 언어 표현의 기원을 따져보아도 언더도그의 그것이 아니던가. 일베 이용자들이 언더도그의 언어로 언더도그마를 비난하나마, 전통적인 '평범한 남성'에 속하지 못하는 이들의 불만 역시 임계치에 다다랐음을 인정해야 한다. 누군가는 일베가 철석같이 믿는 평범성을 두고 '그런 시대는 지났다'며 비웃겠지만, '밥상머리 교육'에서부터 시작돼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며 삶의 목표로 삼았을 누군가의 지향점을 '낡은 것'이라고 할 때는 그 낡은 관념을 대체할 만한 무언가에 대한 고민을 전제해야 한다. 그러한 고민 없이 '평범'한 '노오력'을 지속하는 이들을 비웃었던 데서, 그로 인해 일군의 평범한 노력가들이 좌절하고 상처받았던 과거 언젠가의 시점부터 일베는 태동했을지 모른다.
평범한 삶이 도달 불가능한 것이 된 지금, 엉뚱하게도 그에 대한 좌절의 책임을 구조가 아닌 소수자에게 묻고 있다고 할 때, 그래서 사회가 점점 더 파편화되고 있다고 할 때, 다시 사회를 만들어낼 새로운 도덕의 단초는 능력주의가 아닌 평범함을 다변화하는 데 있을 것이다. (...) 이는 필연적으로 고용안정을 포함한 여타의 사회적 안정망은 물론, 서울 대 지방이라는 지역 간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는 것까지 폭넓은 대책이 요구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엄기호의 말대로 "역사를 믿는다는 것"이 광장의 "조울증에서 벗어나 평상심을 회복하는 일"이라면, "절망보다 좀 더 긴 시간 감각을 가지고 삶의 현장을 보는 것, 광장의 찰나에 흥분하기보다 좀 더 긴 시간 감각을 가지고 광장을 보는 것"이라면, 우리는 우리의 역사를 조금 더 믿을 필요가 있다. 그러한 태도가 "우리를 이 체제의 통치에서 벗어나 다시 역사를 도모할 수 있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365~367쪽.)
교정. 초판 1쇄
10쪽 14줄 : '형재애'와 -> '형제애'와
129쪽 3줄 : 추체선을 -> 추세선을
176쪽 2줄 : 《1212와 5.18》과 -> 《12.12와 5.18》과
227쪽 밑에서 4줄 : '젋은' -> '젊은'
252쪽 밑에서 7줄 : 젋었을 -> 젊었을
261쪽 2줄 : 결혼, 육아로 -> 결혼, 육아로 (띄어쓰기 2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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