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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경제의 설계자들 (정진아, 역사비평사, 2022.)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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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경제의 설계자들 (정진아, 역사비평사, 2022.)

Dog君 2022. 10. 1. 10:02

 

  무슨 무슨 말을 보태려고 한참 읽고 한참 밑줄 긋고 한참 생각했다. 『역사문제연구』 48호에 실린 저작비평회 내용과 『서울리뷰오브북스』 7호에 실린 김두얼의 서평까지 챙겨읽었다.

 

  다 읽고 난 첫 번째 느낌은 '고양'. 학위논문에 싸질러놓은 똥 같은 이야기들을 다듬을 때 이 책에서 밑줄 그은 부분부터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또 내가 발을 담근 분야의 관점에서 이 책의 논점도 살펴보면 일치하는 부분과 어긋나는 부분도 있는데 이것도 내 나름의 방식으로 찬찬히 정리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또 한편으로는 '막막'. 특히 『역사문제연구』와 『서울리뷰오브북스』에 실린 서평은 하나 같이 묵직한 문제제기들이라 나로서는 도저히 감당할 능력이 안 된다는 느낌이 들었다. 어느 때보다 버겁고 막막하다. 그래서 잠도 안 오는 모양이라 평소 같지 않게 새벽까지 이렇게 글을 끄적이고 있다. (현재시각 새벽 2시...)

 

  이 자리에서 굳이 이 책에 대해서 내가 더 말을 보태거나 시간을 들여 정리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이 책에 대한 나의 감상은 빠른 시일 내에 논문으로 정리해야 할 것이다. 문어발처럼 늘어놓은 논문들, 올해 안으로는 정리해야 할텐데 과연...

 

  계획경제, 대기업 및 광산의 국가관리, 기업경영에 노동자 대표 참여 등 일면 좌파의 주장과도 다를 바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미소공동위원회의 5, 6호 답신안에서도 살펴볼 수 있듯이, 생산력 증가를 위해 계획경제를 채용하고자 하는 우파와 공익을 우선시하는 중간파의 계획경제론 사이에는 경계선이 분명할 수밖에 없었다. (...) 이는 노동자·농민의 계급투쟁이 치열했던 해방 후의 상황을 진정시키기 위한 사회개량책의 일환이자, 생산력 발전에 노동자를 동원하기 위한 노자협조주의에 불과했다. (...) (55쪽.)

 

  '조선민주주의임시정부'의 정책에 대한 미소공동위원회의 제6호 자문은 산업정책, 토지개혁, 유통정책, 기업체 운영 등의 항목으로 구성되었다. (...)
  (...) 기업체 운영에 대해서는 (...) 시국대책협의회는 대산업은 국가가 경영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고 했다. 임시정부수립대책협의회와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은 대산업을 공유 혹은 국영으로 하고, 업종에 따라 위탁경영도 할 수 있다고 했다. 국가가 기업체 운영에 어느 정도 개입할 것인가, 민간의 기업 운영을 어느 정도까지 허용할 것인가가 문제의 핵심이었다. 시국대책협의회와 임시정부수립대책협의회,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의 정강 및 정책의 경계선은 재산권에 대한 이해, 토지개혁 방법, 기업체 소유와 운영 방식에 있었다. (64~65쪽.)

 

  국가가 경제건설에 개입할 수밖에 없는 이유로 당시의 지식인층은 다음과 같은 현실적인 문제를 들었다. 첫 번째는 자본가의 취약성 문제였다. (...)
  두 번째는 자유방임주의에 대한 비판이었다. (...)
  세 번째는 통제경제 및 계획경제의 효율성에 대한 인식이었다. (...)
  네 번째는 귀속기업체의 존재로 인해 국가가 산업 운영을 주도할 수 있는 조건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 (67~69쪽.)

 

  우파 세력과 소장파의 논의는 헌법 경제장과 정부조직법상의 계획기관 설립으로 성문화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고도로 추상화된 내용으로서, 국회의 경제관을 보여줄 뿐이었다. 이 법안의 실현 주체는 행정부였기 때문에 정부가 헌법과 정부조직법을 어떻게 해석하고, 어떠한 정책을 담아내느냐에 따라 법안 실현의 구체적인 현실도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정부는 한국이 추구하는 정책노선과 한반도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외세의 정책노선 사이에서 갈등하면서 양자의 정책노선을 타협하고 조정하는 가운데 현실 정책을 수행할 것이었다. 이것이 우리가 행정부의 정책노선에 각별히 주목해야 하는 이유이다. (80쪽.)

 

  이렇게 본다면 상공부와 재무부 등의 핵심 관료들은 자본가를 중심으로 한국 경제를 운영하며, 국가가 재정·금융의 수단을 통해 이들을 육성하는 정책을 구상하는 자유경제론자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부서는 한민당과 친이승만 계열로 분류되는 보수우익 진영의 인물들로 구성되었고, 이들의 계급적 기반은 지주·자본가 세력이었다. (...) (90쪽.)

 

  기획처는 산업부흥5개년계획 수립을 결정하고, 농산·수산·광산·섬유 및 동력 계획을 세운 다음 물자 면에서 이를 뒷받침할 '물동5개년계획'을 기안했다. 1949년 4월 17일 국무회의를 통과한 물동5개년계획은 각 산업을 농업, 임업, 축산업, 잠업, 수산업, 광업, 제철업, 제련업, 기계기구공업(정밀공업, 공작기계, 공구기계, 전기기계, 원동기, 농기구, 방직기계, 광산기계, 운수기계), 섬유공업, 유지공업, 고무공업, 비료공업, 피혁공업, 연료공업(울산정유정제공장 재건을 위한 수급 계획 포함), 무기화학, 화약 및 기타 화학공업(폭약 및 화학약품, 의료약품, 양약, 한양), 제지공업, 식료품공업, 요업, 동력공업의 21개 부문으로 구분하고, 국내 수요량과 수출입 예정량, 생산 목표량을 수립한 방대한 물자 수급 계획이었다. (99쪽.)

 

  이렇게 본다면 계획경제론자들이 구상한 국가경제의 모습은 자본주의체제 내 개혁, 즉 농지개혁과 대기업 국유화를 단행하여 지주와 자본가의 독점적 이윤수탈을 제어하는 체제였다. 그리고 국가의 강력한 계획에 국영기업과 농촌의 중소농, 도시의 노동자, 중소자본가가 협동조합을 매개로 생산력 증진을 위해 협조하는 관민협조 체제였다. 사회주의자들이 주장한 것과 같이 소유관계나 생산 체제의 사회화를 전망하는 것이 아니라, 사적 소유권의 보장을 전제한 생산의 공동화·협동화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101~102쪽.)

 

  경제운영에 관한 논의 과정을 살펴볼 때, 전쟁 전과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이 있다면 통제와 계획 및 미국의 원조에 대한 인식이었다. 전쟁 전 생산력 증대를 통해 분배와 계급 문제의 해결을 추구했던 자본주의 계획경제론의 문제의식은 전쟁이라는 상황 속에서 현저히 약화되었다. (...) 즉 이 시기의 통제는 생산과 분배, 소비에 이르는 전 과정을 통제함으로써 분배와 계급 문제를 해결한다는 내용이 아니라, 비정상적인 물가폭등을 적정선에서 억제하는 가격통제와 적재적소에 원료를 배정하는 물자통제를 시행함으로써 자본가를 측면 지원하고 전쟁승리라는 국익을 실현하기 위해 생산력을 극대화한다는 '국가주의적' 성격을 갖고 있었다. (150~151쪽.)

 

  전쟁 전 남한의 지식인들은, 미국의 원조를 받아들이면서도 미국의 정치적 개입과 미국 자본의 유치가 또 다른 종속을 불러올 수 있다고 경계했다. 식민지배의 경험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경계의식을 잘 드러내주는 것이 미국 제너럴일렉트릭사의 자본 도입을 둘러싼 논란이었다. 1948년 북한의 5·14 단전조치로 전력 수급에 애로를 겪고 있던 정부는 1949년 5월 27일 기획처 기획관실에서 전기 관련 정재계, 학계의 인사가 모두 모인 가운데 미국 최대의 전기 업체인 제너럴일렉트릭사로 하여금 남한에 전기기계제작소를 설치하게 하자는 안건을 논의했다. 이 토론에서는 일부 찬성 의견도 나왔으나, 절대 반대한다는 의견이 대세를 점했다. 당시 상공부 공업국장 유한상(柳漢相)은 ECA 원조를 받고 있는데 외국 자본까지 들어온다면 산업부흥5개년계획이 붕괴할 것이라는 강경한 의견을 제시했다. 상공회의소의 서형석은 자립자결 원칙에 입각하여 부족한 원자재는 물동5개년계획에 의해 수입함으로써 외국 자본의 시장이 되는 것을 막고, 기술자 부족은 양성 프로그램을 마련하여 단기일에 양성하며, 그간의 문제는 미국 등지로부터 몇몇 기술자를 초빙하면 가능할 것이라면서 절대 반대라는 의견을 피력했다. 경성전기 사장도 외자 도입은 불찬성이지만, 만약 설치해야 한다면 미국 회사는 원자재와 기술진만 제공하고, 한국인이 절반 이상의 투자로 공장을 자유롭게 운용할 수 있어야 하며, 기술자를 양성할 수 없다면 절대 반대라고 주장했다. (151~152쪽.)

 

  전후 원조 문제에 대한 미국과의 협의를 담당하고 있던 백두진은 자유경제의 확립을 통한 원조 도입으로 한국 경제를 부흥시키려고 생각했다. (...) 전쟁이 발발하기 전부터 그는 이미 한국의 경제자립이 '독력(獨力)'으로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가 외국 원조의 도입을 강조하는 이유는 경제자립이 독자적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원조를 활용하여 자립경제를 건설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더욱 강화되어 재무부장관으로 임명된 후 정책운영의 기본 논리가 되었다. (...)
  (...) 소비재 생산 부문은 자본가에게 맡기고, 정부는 도로, 항만, 철도, 발전 등 사회간접자본과 제철, 시멘트 등 기간산업을 정부투융자로 건설하여 생산기반을 정비하는 데 주력한다. 백두진은 이 과정을 거치면서 한국이 자본가가 주도하는 자유경제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철저히 원조에 기반한 산업부흥책이었다. (162~163쪽.)

 

  미국이 한국의 경제 현안에 직접 개입하기 위해서는 유엔군 총사령부와 한국 정부 사이에 별도의 협정이 필요했다. 미국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52년 5월 13일 미 대통령 특사 마이어(Clarence E. Meyer)를 파견했다. 한국과 미국 양측 정부를 대표하여 백두진과 마이어는 1952년 5월 24일 '대한민국과 통일사령부 간의 경제조정에 관한 협정'(이른바 마이어협정)을 체결했다. 한미 양측은 유엔군 총사령부와 한국 정부 사이의 경제 문제를 조정할 기구로서 한미합동경제위원회를 신설하고, 유엔군 대여금을 전액청산하기로 합의했다. (...)
  미국은 합동경제위원회 내에 다양한 위원회를 조직하고 그들에게 정책입안 권한을 부여하고자 했다. 미국은 한국 경제운영에 합동경제위원회와 산하의 분과위원회가 일정한 권한을 갖고 다양한 분야에 개입할 수 있기를 원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분과위원회를 공식화하고 이들 위원회에 정책 입안의 권한을 부여하는 것에 반대했다. (...) 합동경제위원회가 경제에 대한 쌍방의 주요 협의체지만 조정 및 자문기관일 뿐이라는 게 한국 정부의 일관된 생각이었다. 따라서 세부 분야에까지 위원회가 구성될 필요는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
  합동경제위원회 본회의는 1953년 3월, 제13차 회의 이후 개최되지 않았다. 다만 산하의 상설분과위원회가 원조 운영에서 한미 간에 공조가 필요한 부분을 논의하기 위해 비정규적인 회합을 가졌을 뿐이다. (172~174쪽.)

 

  백두진이 한국 경제부흥의 경로를 제시했다면, 상공부장관 안동혁은 공업 방면에서 그것을 구체화하는 임무를 맡았다. (...) 그가 제시하는 공업 건설의 방안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유기적이고 종합적인 경제정책을 확립한다. 둘째, 일관되고 안정적인 재정 정책을 확립한다. 셋째, 자금이 정상적으로 조달되도록 금융기관을 정비하고 증권시장을 개설한다. 넷째, 농업을 위시한 원료산업을 강화한다. 다섯째, 기간산업 및 전기, 석탄, 교통, 통신을 정비한다. 여섯째, 기업의 운영능력을 향상시킨다. 마지막으로 해외시장을 개척하고 소비를 지도한다. (...)
  즉 안동혁 공업화론의 핵심은 종합적이고 장기적인 경제부흥계획을 작성하여 공업 건설을 계획적으로 추진하는 것이었다. 그 중심이 되는 분야는 민생구제를 위한 방직, 비료, 시멘트, 판유리공장과 그가 경제자립의 핵심이라고 생각했던 화학공업 및 제철공업 등 중화학공업 분야였다. 그는 적어도 이 분야에 대해서만큼은 국가가 조성 정책을 취하여 건설을 촉진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공업 분야에 정통한 전문가로서 연구 활동을 바탕으로 제시한 그의 공업화론은 일제 시기 이래 민족·자본주의 진영의 공업화 지향을 집약한 내용이자, 후진 자본주의 국가의 경제운영에 대한 고민을 오롯이 담고 있었다. 1950년대 이승만 정권의 공업화 정책은 바로 그가 제시하고 정립한 내용을 토대로 했다. (194~195쪽.)

 

  1950년 6월 8일 휴전협정이 가조인되면서 인플레이션 수습을 위한 통제경제론은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전투가 중지됨에 따라 전쟁물자 동원을 위한 통제의 유인이 반감했기 때문이다. (...)
  통제경제를 주장했던 논자들조차 이제 '증권시장'을 활성화한 후 기업의 규모를 막론하고 "기업 정신이 왕성한 민간에게 불하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주장했다. 생활필수품을 중심으로 물자통제와 가격통제가 시행되고 있었지만, 허다한 문제를 발생시키는 부분적인 통제 방식보다는 시장의 조절 작용을 통한 생산력 증진이 오히려 나을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230~231쪽.)

 

  (...) 헌법 개정의 가장 큰 요인은 원조 제공자인 미국의 압력이었다. 하루빨리 전후재건사업에 나서겠다는 정부의 의욕과는 달리, 곧 도입될 것 같던 원조는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도입될 원조물자의 내용, 부흥자금 운영, 환율 등에 대한 한미 간의 의견차이로 인해 지연되고 있었다. 한국 정부의 입장에서는 재건사업을 더 이상 미룰 수 없었지만, 미국은 한국의 경제 환경이 원조 제공엥 부적합하다고 생각했다. 특히 미국은 국유화와 사유재산권의 제한을 명시하고 있는 한국의 헌법 경제조항을 문제 삼았다. (238~239쪽.)

 

  헌법 개정 논의가 진행되는 동안 미국 하원은 "사회주의적 정책을 채택하는 국가에게 더 이상 원조를 계속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의 동의안을 가결했다. 이를 계기로 한국의 개헌안은 더욱 탄력을 받았다. 결국 1954년 11월 29일 자유당 의원들의 만장일치로 개헌안이 통과되었다. 대통령 중임제에 논의가 집중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경제조항의 개정에 대해서는 거의 반대의견이 없었다. 그에 따라 중요자원의 국유와 공공기업의 국영을 규정한 헌법 제85조, 제87조, 사기업의 소유권을 제한했던 헌법 제88조의 내용이 대폭 수정되었다. (...) (243쪽.)

 

  헌법 경제조항 개정에도 불구하고, 학계는 6·25전쟁 후 이승만 정권의 정책기조에 대해 자유경제, 혹은 통제경제라는 대립된 해석을 내놓고 있다. 공제욱은 자유경제 정책이 추진되었다고 했지만, 신용옥은 적어도 1956년까지 한국의 경제정책에는 통제적 요소가 강하게 남아 있었다고 보았다. 이처럼 정반대의 해석이 공존하는 이유는 자유경제를 표방했음에도 전후 이승만 정권의 경제정책 추진 과정에서 정부의 직접적인 개입과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이러한 현상은 기간산업에서 두드러졌다. 따라서 이 문제를 해명하기 위해서는 이승만 정권이 구상했던 전후재건의 방식과 기간산업 건설 및 운영 사이의 상관성을 면밀히 고찰해야 한다. (...) 이러한 연구성과에도 불구하고 전후 이승만 정권이 표방한 자유경제 정책과 정부 주도의 기간산업 건설이 어떠한 논리 속에서 충돌 없이 결합되고 추진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 (244~245쪽.)

 

  정부는 (...) 1954년 4월 17일 53개의 국영기업체에 대해 국영 지정을 해제했고, 정부대행기관 16개소에 대한 대행 지정을 취소했다.
  (...)
  이 조치로 인해 헌법 제85조와 제87조, 특수법, 귀속재선처리법시행령 제5조에 의해 1951년 3월 31일자 국무원 고시 제12호 및 동년 5월 29일자 국무원 고시 제13호로써 국공유 국공영으로 지정된 기업체 중 한국은행과 한국산업은행, 조폐공사를 제외한 모든 국공유기업체의 국영 지정이 해제되었다. 정부는 해제된 국공영기업체에 대한 정부의 간섭을 모두 폐지하고 민간기업과 동일한 운영 방식을 채택하도록 했다. 그리고 해제된 국공영기업체는 구체적인 불하 계획을 국무회의에 보고하도록 했다. (...) (246~247쪽.)

 

  이어 김현철과 유엔 사령부 측 경제조정관 타일러 우드는 3년여 동안 휴회 중이었던 합동경제위원회 본회의를 재개했다. 합동경제위원회 본회의는 1953년 3월 제13차 회의 이후 개최되지 않았다. 다만 산하의 상설분과위원회가 원조 운영에서 한미공조가 필요한 부분을 논의하기 위해 비정규적인 회합을 가졌을 뿐이었다. 3년 동안이나 합동경제위원회 본회의가 휴회되었던 것은 한국 정부가 합동경제위원회 운영에 대해 가진 회의적인 시각과 백두진의 입지 때문이었다. (...)
  한편 1954년 5월 20일 총선에서 자유당이 압승을 거두고 이기붕이 국회의장에 당선되자, 백두진은 국무총리직에서 물러나 경제조정관직만 유지하게 되었다. 실직이 없이 경제조정관을 맡게 된 백두진은 미국과의 협상 외에는 경제부처를 통솔할 권한이 없었다. (...) 백두진은 각 분과위원회에서 해결되지 않는 일만 최종적으로 미국 측 경제조정관과 협의할 뿐이었다. 그 외에 그에게 맡겨진 경제행정적인 역할은 전혀 없었다. 이승만은 백두진과 합동경제위원회에 힘을 실어줄 의사가 없었던 것이다.
  김현철이 경제조정관으로 부임하면서 이런 문제들이 해결되기 시작했다. 1956년 6월 27일 김현철과 우드는 상호이해를 필요로 하는 중요한 이슈들을 공유하기 위해 합동경제위원회 본회의를 정례화하고 원조사업에서 협력을 강화하기로 결정했다. 그간 한국의 경제정책은 한국의 경제장관들로 구성된 부흥위원회와 유엔 측 경제조정관을 보좌하는 경제조정관실을 통해 각각 검토되고 있었다. 양측 경제조정관은 부흥위원회와 경제조정관실이 각각 해왔던 정책 조정 업무를 합동경제위원회로 가져와 한미가 함께 논의하고 해결하기로 합의했다. 앞으로 한국의 경제 현안은 2주에 한 번씩 열리는 합동경제위원회 회의에서 구체적으로 검토되고 조정될 것이었다.
  (...) 합동경제위원회가 정례화되자 한국 경제장관들의 협의체인 부흥위원회가 했던 경제정책에 관한 전반적인 논의구조가 합동경제위원회로 옮아갔고, 중요한 경제정책이 합동경제위원회의 상설위원회와 본회의에서 조정되고 결정되는 구조가 형성되었다. 이는 한미공조가 확대되는 한편 한국 정부의 자율적이고 독자적인 정책 운영이 제한되는 양면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287~289쪽.)

 

  소비재산업, 특히 삼백산업에 집중된 산업구조의 문제를 보완하기 위해 이승만(李承晩) 정권은 1954년부터 1957년까지 시설투자자금을 정부투융자의 명목으로 한국산업은행을 통해 방출했다. 1954년부터 1957년까지 방출된 정부투융자 총액은 271억 8,100만 원에 달했다. 이로 인해 민간 부문의 소비지출은 억제되었고, 정부의 투자지출은 증가했다. 투자 내용을 살펴보면, 방적, 직물과 같은 소비재 생산 부문에 대한 투자는 거의 민간투자로 이루어졌던 반면 전원 개발·수리·철도·시멘트·판유리·석탄 개발·비료·철강 등 주로 동력과 기초생산재 부문에 대한 투자는 재정투융자에 의해 추진되는 양상을 보였다. (293쪽.)

 

  전후재건사업이 시작된 지 3년이 되는 1956년 삼백산업은 이미 생산 과잉 상태에 접어들었다. 반면 기간산업은 한창 공장건설이 진행 중이었으나 생산수준은 아직 일천했다. 방적 등의 섬유산업 부문에는 불필요한 중복투자가 일어났고, 기초산업 부문의 건설과 시설재 인수는 지연되기 일쑤였다. (...) (299쪽.)

 

  경제개발의 전제로서 재정금융안정계획의 중요성이 부상하면서 1957년 6월 9일 김현철이 부흥부장관에서 재무부장관으로 자리를 옮겨 재정금융안정계획을 진두지휘하기 시작했다. 그는 우선 취임 직후인 1957년 6월 27일, 신년도 예산규모는 1956년 예산규모를 초과할 수 없고 신규 재원염출도 불가능하다고 선언했다. 원래 1957년도 예산은 산업부흥국채의 발행으로 인한 적자 2,550억 환을 위시하여 약 560억 환의 재정적자를 계상하고 있었지만, 예산에 대한 수정조치가 취해졌다.
  김현철은 합동경제위원회에서 당초 수립된 예산 세출액 중 총액 100억 환을 삭감하기로 한 약속에 따라 각 부서 예산의 5%를 일괄삭감했다. (...) 김현철은 각 부서 예산의 감축으로 재정적자를 475억 환으로 줄였고, 재정적자는 계획에 따라 전액 대충자금으로 보전되었다. 부흥사업을 위해서는 별도로 1,075억 환의 대충자금을 염출함으로써 비인플레적인 부흥사업자금을 확보했고, 재정투융자의 인플레이션 재원이었던 산업부흥국채를 큰 폭으로 축소했다. 금융 부문에서 예상되었던 109억 환의 여신팽창도 예금증가, 대출금 상환, 비인플레적으로 조달되는 정부차입분에 한정되도록 하여 통화팽창의 요인을 제거했다. (...)
  (...) 1958년에는 상반기 중에 통화량이 1,350억 환을 초과할 수 없도록 했고, 이것이 지켜질 경우 하반기에 합동경제위원회의 승인하에 2% 내지 6%의 통화량 증가를 인정하도록 했다. 상반기 중에는 한국은행, 산업은행 및 시중은행의 여신 활동에 의한 통화량 증가도 일체 인정하지 않기로 했다. 1957년도 재정금융안정계획은 세출억제와 금융긴축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그러나 1958년부터는 강력한 세출억제, 금융긴축과 주식공매, 사채발행 등의 방법에 의한 국유재산 확대와 귀속재산의 불하를 통한 자금조달, 그리고 비인플레적 대충자금 운영 및 세금증수 등 세입증가를 위한 방안이 함께 모색되었다. 1959년에는 재정규모를 감축하고 추가경정예산 편성을 지양하는 재정긴축 정책과 더불어 물가안정과 국내 저출증가 및 건전한 투자 지원 등 점차 국내자본 동원을 위한 방안 모색으로 그 영역이 확대되었다.
  재정금융안정계획이 포괄하는 영역이 확대됨에 따라 한미합동경제위원회가 개입하는 경제 영역도 확대되었다. 재정금융안정계획이 시작된 1957년도에는 한국 정부가 재정금융안정계획을 수립하고 합동경제위원회에서 검토하는 방식을 취했다. (...) 그러나 1958년도 재정금융안정계획부터는 합동경제위원회 재정분과위원회가 직접 계획을 담당하기로 했다. 계획에는 대충자금 징수 및 방출, 정부수입지출, 비료 및 양곡담보융자금 회수 등의 내용이 포함되었고, 월별 운영계획도 작성되었다.
  1959년에는 대충자금을 포함하는 정부재정, 금융 및 외환의 3대 부문에 대한 분기별 집행계획서를 합동경제위원회 재정분과위원회를 거쳐 합동경제위원회에 제출하고, 합동경제위원회가 매 분기 시작 전에 이를 승인하도록 했다. (...) 합동경제위원회 재정분과위원회는 1959년 재정금융안정계획의 실시상황에 관한 월별 보고서를 합동경제위원회에 제출하고, 통화량 증감계획의 집행 결과도 여기에 포함하도록 했다. 월별 통화량 분석은 1959년도 안정계획의 관계규정에 비추어 그 진행을 평가하도록 하는 등 매우 엄격한 관리 시스템을 갖추었다.
  (...) 재정금융안정계획은 세출억제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서 <표 14>에서 나타나듯이 1957년에는 650억 환, 1958년에는 440억 환, 1959년에는 490억 환의 재정흑자를 가져왔다. 그에 따라 1953~1956년까지 연평균 73.4%였던 통화량 증가율은 1957~1960년 사이에 연평균 16.5%로 급감했고, 1953~1956년까지 연평균 41.5%였던 도매물가등귀율도 1957~1960년 사이에는 연평균 5.8%로 현저히 낮아졌다. (328~331쪽.)

 

  이승만 정권은 장기적인 경제개발 프로그램에 대한 미국의 승인을 얻어 경제개발계획을 추진했다. 개발추진기구였던 산업개발위원회는 정부의 정책에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있던 인물들과 군인들도 함께 기용되었다. (...) 위원들의 문제의식은 산업 불균형 시정과 국민생활수준의 향상, 고용증대, 복지사회 건설로 집약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의식은 자본 중심의 생산력 증대를 계획의 최우선 순위에 두고자 했던 고문들의 반대에 부딪혀 퇴색했다. 생산력 증대를 계획의 최우선 순위에 두고자 했던 고문들의 반대에 부딪혀 퇴색했다. 생산력 증대를 국익 실현의 최선의 방책으로 이해하고, 분배나 복지는 생산력이 증대되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문제라고 생각한 고문들의 안이한 판단 속에서, 분배와 복지의 실현을 통한 국민생활의 안정 문제는 정책의 중심으로 자리 잡지 못했다. 다만 위원들의 주장 가운데 경제자립을 위해서는 산업구조 불균형의 시정이 절실하다는 문제의식만이 살아남아 이후 경제개발3개년계획에 수렴된다. (349쪽.)

 

  (...) 경제개발3개년계획은 광업 및 전력, 통신의 사회기반시설과 제조업 발전에 주력하고자 했다. 전력이 강조된 이유는, 석탄이 증산되고 있었지만 제조업이 발전될수록 전력 부족분이 커질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이다. 계획 심의 과정에서도 2차산업의 발전을 뒷받침할 에너지, 그중에서도 전력의 부족 문제가 집중적으로 제기되었다. 태완선 고문은 전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차관이 어렵다면 정부보유불을 사용해서라도 전력 분야에 자금을 투입하고, 발전소를 건설해서 전력시설을 완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확정된 계획에는 화력발전소 신설계획이 추가되었고, 전력 부문의 증산 목표치가 크게 상승했다. (...) (356쪽.)

 

  한국의 경우 정부수립 초기의 산업화 구상 속에는 두 가지 계통의 이론과 경험이 축적되어 있었다. 자본주의 계획경제론과 자유경제론이었다. 당시의 통제-자유 논의에는 경제자립에 대한 모색뿐 아니라 계획과 통제를 통해 계급 문제와 분배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의식과 체제이념에 대한 고민이 존재했다. 그러나 그러한 고민들은 전쟁과 체제경쟁 과정에서 배제되거나 희석화되었다.
  전쟁기의 관리경제 정책과 통제경제론은 비정상적인 물가폭등을 적정선에서 억제하는 가격통제와 적재적소에 원료를 배정하는 물자통제를 시행함으로써 자본가를 측면 지원하고, 전쟁승리라는 국익을 실현하기 위해 생산력을 극대화한다는 국가주의적 성격을 갖고 있었다. 이렇게 국가 주도 산업화의 내면에 존재했던 자유와 계획의 각 요소들은 6·25전쟁 후 헌법 경제조항이 개정되면서 자본 중심의 경제성장론으로 단일화되어갔다. 국가에 부여되었던 역할 중 공익 실현의 역할은 현저히 축소되었고, 후진성 극복을 위한 선도성만이 강조되었다. 이후의 경제정책과 정책론은 국가 주도의 산업재편정책과 분배·계급 문제의 해결을 배제한 경제성장론, 경제성장을 위한 통제정책으로 정리되어가고 있었다. 한국의 자본주의 건설 노선은 결국 중화학공업 중심의 국가 주도 산업화 정책과 경제개발3개년계획으로 귀결되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본가 중심으로 정초된 한국 경제정책의 계급적 성격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당시 정책 담당자들은 원조자금이 들어오는 동안 공업화와 생산력 증진에 매진함으로써 경제자립을 달성하려고 했다. 관민협조, 노자협조 이데올로기 속에서 자본가들은 생산력 증진의 주역으로 상정된 반면, 농민과 노동자들은 작업장과 마을 단위에서 자활과 자립을 통해 국책에 부응하는 존재로 규정되었다. 또한 전후재건사업과 경제개발계획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한국 경제는 국민생활수준의 향상 및 분배와 계급 문제 해결을 후순위로 돌린 채 경제성장을 고도화하는 방향으로 설계되었다. (...) 한국 경제는 자립경제를 표방하면서 최소한의 지원으로 노동자, 농민의 자립과 자활을 강제하고 경제성장에 동원해왔다. 이로 인한 소외와 사회적 갈등 심화는 고도의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한국 경제의 고질적이고 근본적인 문제로서 극복해야 할 과제로 남았다. (375~377쪽.)

교정. 1판 1쇄
230쪽 1줄 : 1950년 6월 8일 휴전협정이 가조인되면서 인플레이션 수습을 위한 통제경제론은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전투가 중지됨에 따라 전쟁물자 동원을 위한 통제의 유인이 반감했기 때문이다. (휴전협정이 가조인되고 전투가 중지된 것은 아니므로 수정이 필요한 문장이다.)
240쪽 각주 161번 : 천녕자원 -> 천연자원
색인의 일부 항목들 : (색인의 원조 관련 기구를 중점적으로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예컨대 '유엔민사처(UNCACK)'나 '유엔한국재건단(UNKRA)' 같은 항목은 본문에서는 약간씩 다르게 표기되어 있기 때문에 통일시킬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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