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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인을 위한 역사학 교실 (윤진석, 이른비, 2022.)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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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인을 위한 역사학 교실 (윤진석, 이른비, 2022.)

Dog君 2022. 10. 1. 10:11

 

  간혹 강의를 나갈 때가 있다. 대개 직장인이 대상이고 (학교 강의 경험 0...) 거의 대부분은 타의에 의해 끌려온 사람들이다. 신입사원인 경우가 많아서 그나마 다행이다. 마지못해 앉기는 했지만 그래도 신입으로서의 열정은 있기에 일단은 참고 들어줄 자세는 갖춘 청중이다. (직장인 대상 강의를 해 보신 분은 알 거다. 이 정도만 해도 정말 훌륭한 청중이다.)

 

  그런 청중들 앞에 서면 늘 고민이 된다. 역사와는 전혀 무관한 삶을 사는 이들에게 역사학이 대체 무슨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까. 설모모 같은 현란한 언변이 있다면야 청중을 들었다 놨다 하며 강의를 휘어잡을 수 있겠지만 그건 연극영화 전공인 설모모의 몫이고, 역사공부을 업業으로 삼은 나의 몫은 다른데 있을 것이다. (애초에 현란한 언변도 없고...)

 

  그래서 나는 '역사학적으로 생각하는 방법'을 이야기하려고 노력한다. 스마트폰 검색으로 금방 알아낼 수 있는 인명이나 지명 같은 것들 말고, 역사학의 렌즈로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이 어떻게 달리 보이는지를 더 많이 이야기하려고 애쓴다. 그런 식으로 한 몇 년 구르다 보니 이제는 어느 정도 강의안도 자리를 잡은 느낌이다. 하지만 나는 내 강의가 여전히 부족하다고 느끼고 그래서 여전히 역사학 입문서나 개론서에 대해 목이 마르다. (하지만 내 일천한 내공으로 그걸 직접 쓰는 건 꿈도 못 꿀 일이고...) 그런 참에 이 책을 만나게 되어 무척 반가웠다. 그리고 근래 보기 드물게 즐거운 독서였다.

 

  이 책이 재미있게 느껴진 것은 아마도 역사학 입문서에 대한 나의 갈증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의 내용은 목차를 보고 짐작할 수 있는 거의 그대로이다. 내 타임라인에 계신, 역사공부를 직업으로 하시는 분이라면 누구나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일견 뻔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연구자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었던 이 내용들을 이렇게 하나로 꿰어 만든 책은 정말이지 오래간만인 것 같다.

 

  만약에 내 주변에서 학부 1~2학년 정도를 대상으로 한 (혹은 그에 준하는 수준의) 역사학 입문 수업을 맡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기꺼이 이 책을 텍스트북으로 삼기를 권할란다. 마침 목차도 딱 19장이다. 적당히 더하고 보태서 16주짜리 커리큘럼으로 만들기에 딱인 구성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기획과 편집에 대해서도 칭찬해야 한다.)

 

  (...) 남들이 "그것이 무슨 객관적인 것이냐?"고 하더라도 적어도 스스로는 객관적으로 바라보려고 노력한 것이어야 비로소 학문으로서의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객관성을 추구했으나 객관에 이르지 못한 것과 아예 작정하고 근거 없는 주관을 설파하는 것 가운데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가 무엇인지는 자명하지 않은가? (40~41쪽.)

 

  역사공부를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책에 대해서 나름대로 더하거나 빼고 싶은 부분이 있을 것이다. 나 같은 경우에는 역사학에서의 객관과 주관(혹은 공정과 중립)을 다루는 3장의 결론에 대해서 약간 아쉬움이 있다. 이 책에서는 객관과 주관에 대해서 '객관적이려고 노력하는 주관'이라는 정도로 결론을 내고 끝내는데, 내가 보기에는 너무 소극적이지 않나 싶다. '객관적'이라는 말이 흔히 '학문적 엄정성'과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는 점을 생각할 때, '객관적이려고 노력하는 주관'에서 이야기가 끝나면 '역사학은 주관적인 학문'이라는 명제 자체는 여전히 유지되기 때문이다. 객관과 주관의 의미부터 새로이 정의했으면 어땠을까 싶다.

 

  식민지기의 수탈론-근대화론 논쟁에 대해서도 이영훈의 '반일종족주의'를 예시로 든 것은 아주 적절하지는 않다는 느낌이다. 저자가 '반일종족주의'를 예시로 든 것은 그 책의 대중적 명성을 염두에 두고 독자의 이해를 돕겠다는 의도 때문이겠지만, '반일종족주의'를 수탈론-근대화론 논쟁의 맥락에서 보기는 다소 부적절한 면이 있다. 더욱이 '반일종족주의'의 조악한 논리로 수탈론을 이해할 경우 수탈론-근대화론 논쟁 역시 조악하고 피상적으로 전달되지 않을까 걱정된다. 테리 이글턴의 표현을 (혹시라도 유식해 보일까 싶어서 굳이) 빌려오자면, 근대화론을 "아무 가치도 없거나 도통 못 알아먹을 얘기로 치부해 맹렬히 공격하고는 싸구려 승리감에 도취"하게 되지는 않을까 싶은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저자를 책망하고 싶은 마음은 1도 없다. 수탈론-근대화론 논쟁을 잘 정리해서 전달하는 것은 근현대 전공자의 의무이지, 고대사를 전공한 저자의 의무일 수는 없다. 이 정도로 식민지기를 비중있게 다루었으니 오히려 저자는 자기 몫 이상을 한 것이다.

 

  현대(시기)의 경제(분야)를 공부하는 내가 본 아쉬움이 이렇다면, 다른 시기와 분야를 전공하는 분들은 또 다른 아쉬움을 말할 것이다. 앞서 나는 이 책을 학부 1~2학년을 위한 역사학 입문 강의의 텍스트로 추천한다고 했다. 여기서 텍스트라 함은, 강의를 듣는 사람을 위한 기본 교재라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강의를 하는 사람을 위한 기본 교재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 책을 읽는 연구자라면 모두 각각의 아쉬움이 있을테니 그 아쉬움을 각자의 전공 시기와 분야에서 갈고 닦은 통찰들로 메울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하면 아마도 연구자의 숫자만큼 다양하고 풍성한 커리큘럼이 완성될 것이다.

 

  그러니 이 책은 떡잎이다. 이제 막 역사학 공부를 시작한 이들을 위한 강의를 맡았거나 역사학을 도구로 삼아 세상과 소통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각자의 경험과 지혜를 보태어 튼실한 나무 한 그루로 키워낼 수 있는 소중한 떡잎이다. 그 누구도 아닌 나부터 당장 그러하고 싶다. 모처럼만에 힘이 나는 독서였다.

 

  (...) 성호 이익은 "역사란 이미 성공과 실패가 결정된 후에 쓰이기 때문에 그 성패에 따라 아름답게 꾸미기도 하고 나쁘게 깎아내리기도 하여 마치 당연한 것처럼 만든다. 또한 선한 쪽에 대해서는 그 잘못을 많이 숨기고, 악한 쪽으로부터는 그 좋은 부분을 반드시 없애버린다. 따라서 어리석음과 슬기로움에 대한 판별이나 선악에 따르는 응보應報가 마치 징험徵驗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므로) 천년이 지난 뒤에 어떻게 참으로 옳고 그름을 알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4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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