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g君 Blues...

출생을 넘어서 (황경문, 너머북스, 2022.) 본문

잡冊나부랭이

출생을 넘어서 (황경문, 너머북스, 2022.)

Dog君 2022. 10. 1. 10:17

 

  이 책은 저자의 박사학위논문을 다듬어서 낸 책을 번역한 것입니다. 중인, 서얼, 무반 등을 '제2신분집단'으로 묶은 다음 이들 집단을 중심으로 한국 근대의 신분변동을 다뤘습니다. 이 책의 가장 적절한 요약(비유)은, 제가 어느 블로그에서 본 "한국의 근대는 임꺽정의 난이 아니었다"는 문장으로 충분할 것 같습니다. 소설 임꺽정에 등장하는 길막봉(중인)이나 이봉학(향리), 배돌석(무반) 같은 이들이 바로 이 책에서 말하는 '제2신분집단'이죠. 소설 임꺽정은 이들과 농민 출신의 다른 의적 패거리들이 힘을 합쳐 봉건지배질서에 맞서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이 책에 따르면 한국의 근대는 이런 식으로 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제2신분집단'은 전근대의 관료제 하에서 저 나름의 지위와 입지를 공고하게 다졌고, 이를 기반으로 근대 이후에 사회적 성취를 이뤘다는 게 이 책의 주장입니다.

 

  이러한 주장은 우리의 역사적 통념과는 다소 충돌합니다. 우리는 이미 개항 이전부터 상품작물과 상업의 발달로 신분제가 크게 흔들려 공명첩 등의 수단을 통해 하층신분이 양반신분을 획득하는 경우가 꽤 많았다고 배웠습니다. (그걸 '내재적 발전론'이라고들 하지요.) 근대 이후의 신분질서도 조선시대의 그것과는 꽤 다른, 단절적인 것이라고도 배웠고요. 하지만 이 책은 신분제가 본격적으로 변동한 것이 (적어도 상향이동의 측면에서는) 개항과 갑오개혁 이후라고 말하고, 근대 이후에 '제2신분집단'이 대두한 것도 실은 전근대 신분질서와의 관련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으니까요. 식민지기에 대한 서술도, 자신의 능력만 충분하면 신분에 덜 구애받으면서 사회적 성취를 이룰 수 있었다는 것처럼 읽힐 수 있겠습니다.

 

  물론 그러한 저자의 주장이, 한국이 여전히 전근대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식으로 귀결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저자는 '제2신분집단'의 자기성취욕구가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룩한 한국사회의 원동력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고보면 이 책 역시도 해외학계의 오래된 궁금증과 궤를 같이 한다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 현대 한국의 거대한 성취를 설명하기 위해 오래된 역사적 전통에서 그 원인을 찾아보려는 노력 말이죠.

 

  좀 솔직히 말하자면, 탕수육 개인적으로는 이 책에 동의하는 부분보다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더 많습니다. 물론 탕수육은 신분제 전문가도 아니고 최근 연구성과에 대해서도 어두운 사람이라 책의 진짜 가치를 알아보지 못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책 전체를 각하시킬 마음은 전혀 없습니다. 종종 말씀드리지만, 저에게 유익한 독서란 제 생각을 확장시키는 독서입니다. 제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을 일깨워주고 새로운 관점을 제시해줄 때 저는 독서가 즐겁습니다. 제 생각과 다른 주장을 하는 것도 좋습니다. 그 역시도 제 생각을 돌이켜보게 해주는 것은 마찬가지고, 혹은 그 주장을 꼼꼼하게 검증하면서 제 내공이 쌓이기도 하니까요. 제가 이미 갖고 있는 생각을 다시금 재확인하기만 할거라면 왜 굳이 시간과 노력을 들여 책을 읽겠습니까 ㅎㅎㅎ

 

  이 연구의 주목표는 제2 신분집단이 어떻게 전근대적 사회 위계의 근본 특성을 포착하고 관료제를 통해 상승하여 한국 사회 전체의 근대적 변화를 몸소 구현했는지 그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 17세기 중반을 시작으로 근대 시기까지 이어지는 사회구조의 역사, 특히 사회 위계의 역사를 다룬다. 초점은 19세기부터 일제 식민지기 중반(1930년대)까지이다. 이 책은 이 같은 질문을 품고 당대 한국 관료제의 발전, 특히 비귀족 집단의 구성원이 관료 엘리트 계층에 합류할 수 있도록 변화된 관료 선발제도와 승진제도를 전반적으로 소개할 것이다. 또한 조선왕조에서 형성되고 발전된 제2 신분집단의 역사를 소개하며, 뒤이어 20세기 초 그들의 가족과 개인에 대한 사례 연구도 제시될 것이다. 전체적으로 이러한 발견들은 한국 사회사에 대한 재검토의 근거를 제시할 것이다.
  예를 들어, 제2 신분집단은 조선왕조의 고유한 특성을 전 범위에 걸쳐 보여주는 사례가 되고 있다. 국가의 권위 및 지배력의 확장성, 가족·친족 체계의 강력한 사회적 영향력, 기술·실용·전문화에 대한 철학·도덕·일반화의 인식론적 우위성, 경제적 부에 대한 규제, 심지어 세계 속에서의 한국인의 위상을 의식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다. 또한 제2 신분집단에 관한 서사는 근대 한국의 중요한 주제들 중에서 전근대 시기에도 마찬가지로 존재했던 것이 놀랍도록 많다는 점이 우리의 관심을 끈다. 국가 개입, 지역주의, 군대의 역할, 사회 질서에 있어 전문가가 차지하는 위상, 관료의 부패, 그리고 아마도 가장 설득력 있는 것일 텐데, 사회적 상호작용에 있어 지위와 지위의식이 차지하는 크나큰 영향력이 그것이다. 제2 신분집단은 이 같은 장기지속적 패턴의 근대적 형태들을 몸소 체화하여 전승했고, 그것을 직접 만들어내기도 했다. (30~31쪽.)

 

  (...) 사람들은 관직 보유, 조세, 부역 등 통상 국가에 대한 책무, 즉 직역職役에 따라 구분되는 귀속 지위 집단으로 차별화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관료적 성취라기보다는 출생 신분에 의해 결정되는 관직접근권eligibility이었다. 실제 관직접근권의 분포는 사회 위계를 반영했다. 양반, 중인(제2 신분집단), 평민, 천민이라는 4대 신분 범주는 각 구성원의 관료제에 댛나 접근권에 대응했기 때문이다. 특히 관아 소속 노비(공노비)나 (춘향의 어머니 같은) 관기와 무당이 국가의 일에 종사하긴 했지만, 천민(노비, 백정, 광대, 무당 등)은 여러 지구이에 부적격으로 남아 있었다. 평민(농민, 장인, 상인, 어부)은 법적으로는 모든 관직에 접근권이 있었지만, 가장 낮고 천한 직책을 제외하고는 그로부터 배제되어 있었다. 제2 신분집단과 귀족 계급의 구성원이 거의 모든 관직을 차지했다. 사실상 제2 신분집단의 존재 그 자체가 관직 접권관상의 차별에 기반해 있었다. (52~53쪽.)

 

  (...) 지배 계층에 관한 한 하위 계층에서 상향 이동하는 흐름이 있었다는 증거는 없으며, 심지어 그런 것은 개별 사례도 없다. 직역을 구입하기 위한 경제적 수단을 가진 서민과 나아가 노비는 수만 명의 17세기 무과 급제자와 다를 바가 없었다. 이들은 세금명부에서 빠지기 위해 새로 얻은 직역을 가까스로 사용했지만 후손에게 이 특권을 물려줄 수는 없었다.
  지배 계층으로의 상향 이동이라는 명제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 중에 가장 설득력 있는 것은 아마도 비계량적 요인들일 것이다. 첫째, 관료나 여타 지배 엘리트의 글에는 부유한 상민, 제2 신분집단의 일원, 또는 사족 후손이 아닌 여타 인물 그 누구도 사족으로 인정한 흔적이 없다. (...) 둘째, 선교사든 관리든 19세기에 한국을 방문한 외부 관찰자들은 활발한 상업 활동의 부족을 공통적으로 지적했다. 이는 이 사람들이 가진 경험과 관찰의 한계 때문일 수도 있지만, 시장경제가 사회구조를 뒤엎을 만큼 충분히 강했다면 눈에 띄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한다면, 17세기 이후 농업 생산과 시장 활동의 증가는 농업경제의 작용을 크게 변화시키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왜 경제적 위상이 관직접근권과는 달리 사회 신분에 반드시 조응하지 않았는지를 설명해준다. (...) 부요한 상민들은 비록 형식적인 직역을 살 수는 있었지만 귀족의 전유물인 혼인 연결망과 관직을 얻을 수는 없었다. 귀족은 하층 출신의 사람들이 경제적 지위에서 그들과 동등하거나 심지어 능가하는 것은 용인할 수 있었지만, 그들이 관료 조직에서 영향력 있는 위치에 접근하는 것을 결코 허락할 수 없었다. 더구나 혼인 상대자로는 더더욱 말할 것도 없었다. (...)
  경제적 부는 관료적 성취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지만, 이 연결의 영향은 세습적 지위에 의해 제한되었다. 흥미롭게도, 부(또는 더 정확히 말하면, 그것의 부족)는 하향 이동을 유도하는 데 훨씬 더 큰 잠재력을 가지고 있었고, 하향 이동은 상향 이동보다 훨씬 더 빈번하게 발생했다. 관직에서의 행운이 몇 세대에 걸쳐 고갈되면, 재정의 궁핍과도 결부되어 한 가문의 혼인 지평은 때로 더 낮은 신분집단으로 내몰리기에 충분할 만큼 급격히 축소될 수 있었다. (...) (59~61쪽.)

 

  특히, 외무아문은 관료제 개혁의 전조가 되었다. 4개 부서에서 각각 외교 관계, 세관, 자연 자원 개발, 근대적 통신을 담당했고, 학교인 동문학同文學은 외국어, 행정 교육과 더불어 출판도 담당했다. (...) 외무아문은 1884년 초 중인인 변원규卞元圭를 4명의 참의 중 한 명으로 임명하고, 이후 차관급(협판)으로 승진시키는 등 처음부터 차별성을 과시했다. 3명의 또 다른 중인, 즉 변수邊燧(1861~1891, 변원규와는 관련이 없음), 고영희高永喜, 정병하鄭秉夏(1849~1896)도 모두 개화기의 영향력 있는 관리가 되었고, 후에 참의로 임명되었다. 이처럼 중인을 높은 지위에 임명하는 것은 그 자체로 기성 관행에 대한 놀라울 정도의 일탈을 나타내는 것이지만, '보조원'인 주사 수준에서는 더욱 극적인 전개가 이루어졌다.
  외무아문 주사 자리는 근대 관료 집단의 요람 역할을 했다. 주사직은 제2 신분집단을 포함하여 다양한 배경을 가진 야심찬 관료들이 중앙정부에 진입하는 거점이었고, 전문성과 기술을 향한 한국 정부의 방향 전환이 구현되는 지점이었다. 오랫동안 (천시는 아닐지라도) 무시해오던 것이 갑작스럽게 긴요해졌다. 제2 신분집단 중에서 중인이 가장 많았던 것은 놀랄 것이 없다. 주사의 10퍼센트 이상이 중인으로 확인되는데, 이는 아마도 외교와 관련된 기술 및 전문 분야에 대한 외무아문의 중시를 잘 보여주는 것이다. 무반과 서얼 가문에서 놀랄 만큼 많은 인물이 주사직을 차지했다. (...)
  귀족과 제2 신분집단 배경의 다양한 인물이 같은 위치에서 함께 일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조선의 규범으로부터의 놀라운 이탈이었다. 사실, 주사가 전문적이면서 부차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 그리고 외교부를 새로운 한국 관료제의 선방장으로 만든 숙련되고 야심차며 대부분 젊은 개혁주의자인 인물들이 거기에 선발되었다는 점으로 인해, 그 자리는 정치로부터, 특히 민씨 과두정권을 둘러싸고 있던 보수파의 책동으로부터 보호될 수 있었다. (...) 이 시기에 여전히 고위 관료 수준에서 유효하게 작용하고 있던 외척 정치의 영향력이 외무아문 주사에 대해서는 현저히 감소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의 후기 경력이 이 평가를 뒷받침한다. 120여 명의 외무아문 주사 중 62명은 갑오개혁기의 정부에서 근무했다. 그리고 가장 인상적인 것은 외무아문 주사가 군국기무처 의원 중 3분의 1 이상을 배출했다는 것이다. 군국기무처는 1894년 여름, 국가와 사회의 획기적인 변화를 선언함으로써 갑오개혁을 개시한 기구이다. (95~98쪽.)

 

  (...) 분야별 위계는 기술 관료의 인구 내에서 별도의 지위집단을 설정할 만큼 충분히 강력하지는 않았다. 여러 세대에 걸쳐 한 분야에 특화하게 된 가문이 많았지만, 족보들을 살펴보면 지배적인 중인가문 중에 종종 동시대 형제나 사촌 사이에도 두 개 이상의 다른 전문 분야를 가진 경우가 많았다. 더 중요한 것은 혼인 패턴에 붙야별 내혼의 징후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 이는 학문적 분석은 물론 중인의 족보와 족보 등재자 기록이 분명하게 보여주는 바이다. 분야와 무관하게 중인은 중인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중인 가문은 하나의 집단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 (159쪽.)

 

  식민지기 관료제에서 중인 후손이 보인 패턴은 이렇다 저렇다 명확히 말하기는 어렵다. (...) 현대 엘리트의 직업적 특성이 된 분야, 즉 외국인과 교류하는 능력, 의학, 법률, 자연과학, 수학, 공학, 예술, 문학 등에서 그들의 고도의 전문화는 아마도 식민지 관료제에서 중인이 얼마 없는 것에 대한 설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관료제 영역에 중인이 별로 없었던 것은 실패를 나타낸다기보다는, 국가로부터 건설적으로 탈출하여 확장 중이던 비관료제 영역으로 들어갔음을 의미하는 것일 수 있는 것이다. 관료제를 넘어서 근대 엘리트 직업에 구석구석 존재했던 중인의 존재는 그들의 사회적 지위가 주로 그들의 관직에 의존했던 조선 시대와는 대조적으로, 20세기 초에는 그들의 재능을 배출할 많은 출구를 관료제 밖에서 발견했다는 것을 암시한다. (200쪽.)

 

  (...) 16세기 말 임진왜라 당시 혼란의 와중에 지방의 한 귀족인 구회신의 적처와 두 아이가 고립, 실종된 것으로 선언되면서 구회신은 재혼하게 되었다. 문제는 전쟁이 끝난 후 적처와 그 소생의 두 아이가 구회신을 찾아 돌아왔다는 것이다. 보통이라면 구회신은 그의 두 번째 부인을 첩으로 선언할 수밖에 없었겠지만, 구회신은 두 번째 부인을 내쫓지 않고 대신에 첫 번째 부인 소생의 아들인 구문상을 서자 지위로 격하시키는 선택을 하였다(서자라는 것은 당대의 족보가 그런 사례를 기록하는 방식이었다). 이 조치로 인해 구문상과 그 후손은 서얼로 떨어지게 되었다. 그들은 이 처분을 뒤집기 위해 2세기 반 동안 분투했다. 마침내 19세기 중반 예조판서가 그들의 청원을 받아들였다. 서파가 갑자기 적파가 되고, 적파가 졸지에 서파가 되었다. 하지만, 아마도 경제적 이해와 사회적 지위의 복합 효과 때문일 텐데, 불화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새로이 고통에 빠져버린 계보의 구성원들은 그 사건을 20세기 초 총독부 가정법원으로 가져갔고, 이 법정은 그들에게 유리하게 판결했다. 서얼이라는 오명이 너무나 끔찍했던 나머지 3세기 동안 '적파'와 '서얼'이라는 꼬리표가 세 번이나 뒤바뀌면서 계속된 싸움 끝에 심지어 외래 침입자가 법정을 지배했던 시대에조차 그 차이는 한국인에게 중대한 문제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290쪽.)

 

  (...) 서북인은 자신들의 사회적 위신에서 부족한 점을 사회적 역동성으로 보충했다. 귀족의 부재, 그리고 그에 따른 사회적 상호 작용의 유동성은 사회적 사다리의 하층부에 훨씬 적으 수의 서북인이 서게 하는 것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15세기에 국경으로 이주한 노비들에게는 면천의 혜택이 부여되었고, 15세기 중반 이후의 관찰자들은 이곳에 사노비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2세기가 지난 후에는 심지어 관노조차 자신들의 의무를 버리고 양인 농민 인구로 섞여 들어갔다는 보고가 많았다. 본질적으로, 조선 초기부터 서북 지방 사람은 본래의 출신이 무엇이든 간에 거대한 평민平民의 대중 속으로 융화되었다. 이런 다양한 실마리로부터 독특한 사회 구조가 생겨난 것이다. (341쪽.)

 

  서북인의 부상에 있어서 핵심은, 중인이나 향리와 마찬가지로, 그들이 20세기 사회적 명성을 성취하는 수단으로서 서구 지향적 '신교육'을 효과적으로 그리고 열정적으로 채택한 것에 있다는 것이다. 이 장은 서북인이 이러한 변화를 수용한 요인으로서 몇 가지 다른 점도 시사한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조선왕조 동안 서북 지역에 귀족 계급이 없었다는 것이다. 비록 이러한 부재가 수 세기 동안 지속된 사회적 편견과 정치적 차별의 원인이었지만, 그것은 또한 서북의 사회적 위계를 덜 경직되게 만들었다. 이것은 사회 계층화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조건을 다양화시켰고, 조선 후기에 유교적 교양과 학문뿐 아니라 군대와 상업을 통해 높은 사회적 위상을 얻은 지역 엘리트를 낳았다. 특히 번성하고 있던 상인 문화는 지역의 군사 엘리트뿐 아니라 성장하는 문인에게도 경제적 지원을 제공함으로써 근대적 전환에 큰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
  높은 사회적, 경제적 유연성에 더하여, 이보다는 덜 구체적이지만 똑같이 효과적인 자극이 조선 체제의 억압 효과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생겨났던 것 같다. 홍경래의 봉기, 관료제 속으로 더 많은 서북인을 수용해달라는 조정에서의 잦은 상소, 그리고 이러한 현실에 대한 서북인의 만연한 체념은 그들에게 가해진 차별에 대한 예리한 인식을 나타낸다. (...) 서구에서 도입한 교육과 종교, 민족(주의)적인 문화의 수용, 민간 사회와 관료제에서 전통적인 위계질서를 넘어서는 것 등, 이 새로운 시대의 상징은 그들이 조선에서 도달할 수 없었던 높은 위상과 영향력 있는 지위를 얻을 수 있게 해주었다. (374~376쪽.)

 

교정. 제1판 1쇄
53쪽 7줄 : 관직 접근권상의 -> 관직접근권상의
57쪽 4줄 : 차창섭과 -> 차장섭과
60쪽 12줄 : 살 수는 있지만 -> 살 수는 있었지만 (시제를 통일)
61쪽 5줄 : 그렇다면 경제적 부는 -> 경제적 부는
179쪽 밑에서 2줄 :  이나바 이와키치稲葉岩吉 씨는 -> 이나바 이와키치稲葉岩吉는
212쪽 각주 3줄 : 프란센지트 두아라 -> 프라센지트 두아라
240쪽 7줄 : 향리 들을 -> 향리들을
341쪽 5줄 : 자신들이 사회적 위신에서 -> 자신들의 사회적 위신에서
454쪽 밑에서 1줄 : 식민지 체체에서 -> 식민지 체제에서
512쪽 미주 79번 : 이노우에 가우루 -> 이노우에 가오루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