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g君 Blues...
쇳밥일지 (천현우, 문학동네, 2022.) 본문
요즘 핫한 책이죠. 저자인 천현우는 페이스북에서 널리 공유된 글을 통해 처음 접했습니다. 현장 노동자의 현장감 넘치는 글이라는 느낌이 들어서 꽤 좋게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 이후로도 꽤 존중할만한 글을 몇 번 더 읽었고요. 이 책은 저자가 자신의 삶을 담담하게 정리한, 일종의 자서전입니다. (페이스북에서 봤던 글들은 아니더군요;;) 워낙에 문장도 좋고 구성도 깔끔해서 그런가, 읽는 재미로만 따지면 여느 소설 못지 않습니다.
현장노동자가 글을 통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공감대를 얻는다는 것은 그 자체로 매우 좋은 일입니다. 흔히들 '글을 쓰는 것이 곧 권력'이라고 합니다. 글을 통해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고 후대에 기록을 남길 수 있다는 것이 굉장한 특권인 것은 사실이죠. 그런 점에서 언제나 객체로 머물렀던 현장노동자가 자기 손으로 전해주는 자기 이야기는 무척 소중합니다.
한편으로 저에겐 저자에 대해 삐딱한 시선도 있었습니다. 그의 글이 인용되고 전파되고 호응을 얻는 과정이, 마치 뭐랄까, '당사자성'이라는 이름으로 2022년의 박노해나 전태일을 만들어내려는 또 어떤 이들에게 간택되는 과정은 아닌가 했거든요. 생각해보면 종종 '당사자성'이라는 것이 상대방의 입을 틀어막기 위한 방법으로 악용되기도 했고요. ('내가 해봐서 아는데...' 내지는 반지성주의로 빠지기 십상이죠.) 그가 본격적으로 글을 통해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과정을 다룬 3부를 읽으면서 이런 걱정은 더욱 심해졌습니다. 결국 이 책도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가 되는구나 싶었거든요.
(...) 보름 후에 첫 월급이 나왔다. 170만원. 취업한 선배가 자랑했던 200만원, 담임이 비웃었던 그 200만원보다도 훨씬 적은 액수. 잠도 제대로 못 자가면서 68시간 꽉 채워 받아낸 그 금액은, 노동강도 생각하면 코웃음 나게 적었지만 내 삶을 뒤바꿔놓기엔 충분했다. 전화 요금 내고, 밀린 집세를 내고, 끊긴 인터넷도 복구하고, 한쪽만 나오는 헤드폰을 바꾸고도 남은 돈으로 엄마 용돈까지 드렸다. 온전히 누려야 할 권리마저 박탈당한 삶이 정상 궤도로 돌아왔을 때의 그 쾌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 (45~46쪽.)
아저씨는 사람이 경박했지만 큰 틀을 보는 통찰력은 놀라울 정도였다. 한번은 편입 실패와 학벌 콤플렉스에 대해서 횡설수설 떠들었는데, 의외로 진지한 표정으로 내 고민을 들어주었다.
"야, 현우야. 우리 없으면 누가 다리 만들어주냐? 우리 뿐만 아냐. 청소부, 간호사, 택배, 배달, 노가다, 이런 사람들 하루라도 일 안 하면 난리 나. 저기 서울대 나온 새끼들이 뭐하는 줄 알어? 서류 존나 어렵게 꼬아놓고, 돈으로 돈 따먹기만 하고, 땅덩어리로 장난질이나 치지. 그런 새끼들보다 우리가 훨씬 대단한 거야. 기죽지 마."
저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놀라웠다. (...) 그저 나이를 먹어갈수록, 어딜 가나 얼마 안 되는 승자들이 패자가 응당 가질 몫까지 몽땅 빨아들이는 현실만 알아갈 뿐. 스물다섯 살의 나는 일찌감치 사회에 투항했다. 승자 독식에 의문을 느끼고 저항할수록 나의 초라함만 되새길 뿐이란 사실을 깨달아버렸다. 명문대생은 공부 많이 했으니 유능해서 대단한 일을 하고, 전문대생은 공부 안 했으니 무능해서 못난 일만 한다. 그리 생각하면 세상만사가 일목요연하고 질서정연해졌다. 체념하면 모든 게 편할 텐데, 오히려 '우리가 훨씬 대단한 거야'라니. 확신에 찬 그 목소리가 참 멋지다고 느꼈다. (116~117쪽.)
하지만 책의 거의 끝에서 아래 부분을 본 이후로 그런 걱정은 많이 덜어졌습니다. 그런 우려를 저자 스스로가 이미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거든요. 아마 앞으로도 이 우려를 더 많은 사람들이 더 첨예하게 제기할 겁니다. 제발 부디 저자가 이 마음을 잊지 말고 계속 더 정교하게 다듬어 나가면 좋겠습니다.
(...) 근 몇 개월간 "천현우라는 사람은 귀중하다"라고 말한 사람들은 이미 사회에서 성공한 이들, 통장이며 부동산에 박아둔 돈은 제각기 다를지언정 모두가 좋은 직업과 학벌을 가진 이들이었다. 마산에서 얌전히 용접만 하고 살았다면 평생 볼 일 없었을 사람들의 환대와 존중은 기쁘고도 불안했다. 공장 일꾼이란 정체성으로 현장의 서사를 팔아 나 혼자 비겁하게 출세하는 건 아닐까. 진짜 현장 노동자들은 천현우를 기득권 앞에서 글 재롱 부리는 간신으로 생각하진 않을까. (...) (284쪽.)
교정. 초판
187쪽 3줄 : 외롭다, 는 생각이 -> 외롭다는 생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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