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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g君 Blues...

우리나라 지명 중에 '陽'(볕 양)자가 들어간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陽'의 뜻이 그때그때 달라진다는 겁니다. 서울의 옛 지명인 '한양(漢陽)'은 '한강[漢水]의 북쪽'이라는 뜻이지만 안양시의 관양동(冠陽洞)은 '관악산(冠岳山)의 남쪽'이라는 뜻이니 '陽'이 어떨 때는 북쪽을 의미했다가 또 어떨 때는 남쪽을 의미한다는 겁니다. 하나의 글자가 정반대의 의미를 함께 갖고 있는 셈입니다, 아이고 참. 알고보면 이유는 간단합니다. '양지바른 곳'을 뜻하는 '陽'은 강을 기준으로 하면 북쪽을 지칭하고 산을 기준으로 하면 남쪽을 지칭하기 때문이죠. 남쪽에서 해가 뜨면 강은 북쪽 사면에 양달이 생기고 산은 남쪽 사면에 양달이 생기잖습니까. 이걸 알고 나면 우리나라의 여러 지명에서 '陽'이 들어간 ..

청-조선 관계를 다룬 이 책은 제목부터 독자의 관심을 끕니다. 한국사를 더 많이 배운 한국인은 '청나라는 조선에게 무엇이었나'라고 묻기 마련이지만, 이 책은 그와 반대로 묻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단지 시선 방향을 바꾸는 것만으로도 전혀 의외의 역사상이 보이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마침 이 책의 번역자인 손성욱 선생님의 『사신을 따라 청나라에 가다』가 좋은 예입니다. 그 책의 3부에서는 숙종 대에서 영조 대까지의 왕세자(왕세제) 책봉 문제를 다루는데요, 여기서는 이 문제를 청나라 내부의 사정을 포함하여 다룹니다. 이렇게 되니 조선의 책봉 문제가 단순히 조선 내부의 정치 문제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중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세계질서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죠. 여진족이 흥기하여 대조선관계를 ..

저자가 어떤 사람인지, 이 책이 어떤 문제의식으로 쓰여졌는지는 굳이 더 말을 보탤 필요는 없겠지요. 책 좀 읽으시는 분이라면 저자의 이름을 이미 알고 계실 겁니다. 그리고 책의 내용도 충분히 짐작이 가실 겁니다. 그래서 김승섭의 책은 동어반복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아우, 또 이 얘기야?' 하고 말이죠. 새로 나온 책을 읽을 때마다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차별이 무엇인지 내가 어디에 무신경했던 건지를 조금씩 더 알게 되긴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의식과 메시지는 책이 거듭되어도 그다지 다르지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기회가 날 때마다 김승섭의 책을 읽는 것은, 그의 글이 제가 처음 공부를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던 이유를 새삼 되새기게끔 하기 때문입니다. 처음 대학원에 가기로 마음 먹었을 때만 ..

해방부터 정부 수립에 이르기까지는 반공주의가 득세하면서 사상적 다양성이 거세되고 미국과 친미세력을 중심으로 정치가 재편되는 시기였습니다. 한국전쟁까지 거치면서 이런 경향은 더 강화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1950년대는 이승만 정권의 독재와 반공주의로만 설명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1950년대를 이야기할 때 사사오입 정도 말고는 딱히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없다면 그게 아마 그 때문일 겁니다. 하지만 1950년대는 그렇게 간단히 처리될 시기가 아닙니다. 식민지배와 한국전쟁으로 피폐해진 나라를 하루 속히 '근대화'시켜야 한다는 강박이 한국 사회를 지배했을 것입니다. 여기서 1950년대의 한국 사회를 분석하고 또 나아갈 길을 모색한 사회과학계가 추구한 것이 무엇이며 또 그것들이 어떤 과정을 통해 형성되었는지를 ..

특별히 똑똑하지도 성실하지도 못했던 탕수육에게 대학원 생활은 결코 녹록치 않았습니다. 매주 반복되는 수업 진도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벅찬 나날이었습니다. 그러고도 결과물은 남들에 크게 못미치는 것들이어서 자괴감도 심했구요. 그럼에도 대학원 생활 내내 신선한 지적 자극에 노출될 수 있었던 것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큰 즐거움이었습니다. 일상사, 트랜스내셔널 히스토리, 캘리포니아 학파 등, 각 분야의 최전선에서 활동하시던 교수님들로부터 받았던 다양한 지적 자극과 충격은 대학원 생활의 어려움을 상쇄할만큼 컸습니다. (지금의 팟캐스트도 어쩌면 그때의 경험 덕분입니다 ㅋ)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그런 지적 자극들은 '전형적이고 정형화된 서사를 넘어서기 위한 노력'이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여기서..

(...) 이봉규는 오늘날 저명한 사회과학자들의 1960년대 초 중반의 근대성 모색이 어떠했나를 잘 보여준다. 윤천주, 차기벽, 이만갑 등 우리에게 익숙한 대가들이 등장하는데, 그 이름만으로 독자의 흥미를 불러일으킬지 모른다. 이들의 글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당대 존재했던 많은 사회과학자들이 추구한 근대성이란 결국 산업화가 우선시되는 발전이었다는 점이다. 그 속에서 형식적 민주주의는 '서구'라는 수식이 붙어 상대적으로 우선순위에서 배제되며, 전통 역시 발전주의에 호응하는 요소들만이 재전유될 따름이다. (...) (한봉석, 「책머리에」, 7쪽.)

(...) 이론적 논의에서 실천의 기술까지 아우르면서 연구를 진행하기 위해서는 학회 설립 및 저널 발간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이때, 다른 역사학 분야와 달리 공공역사 연구에서는 역사학자, 공공역사가, 역사애호가들까지 아우르는 독자를 상정하고 글을 쓸 필요가 있다. 따라서 내용에 따라 학문적 글쓰기보다는 비평적 글쓰기(critical review)가 더 유용할 수 있다. 1987년 창간된 『역사비평』이 초창기에 가졌던 콘셉트, 곧 대중들도 읽을 수 있는 역사 이슈에 대한 비평지로서의 정체성이 점차 희미해지고 최근으로 올수록 다른 학술지와의 차별성이 약화되고 있는 것은 아쉬운 대목이다. 이는 정량적 평가가 잣대가 되는 한국 학술계 전체의 문제에 기인한 것이지만, 그로 인해 역사학계는 비평적 글쓰..

학술지를 읽는 것은 늘 즐겁습니다. 동료 연구자들의 최근 관심사를 확인할 수 있을 뿐더러 연구자로서 자극도 많이 받거든요. 『역사비평』 147호의 특집 '사이비역사학 비판과 비판 너머의 역사쓰기'와 148호에 게재된 김태현·김재원의 「학교에서 태어나 미디어가 키운 '공공역사', 중국을 혐오하다」를 함께 읽으면서는 이들 문제를 말할 때 이제는 논점이 좀 더 확장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둘이 대상으로 삼은 사이비역사학 비판과 미디어 비평이, 여전히 민족주의적 편견에 대한 비판에서 머무는 것 같거든요. 이러한 비판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만, 뭐랄까요, 이제는 너무 익숙해진데다가 논평이 계속 제자리를 맴돌다가 고인물이 되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147호에 게재된 기경량의..

사료史料로서의 소설, 사진, 영화, 만화, 온라인콘텐츠에 대한 분석의 가능성과 방법론을 모색한 이 책의 내용은, 쓰여진지 20여년이 지난 지금 보면 아주 새롭지는 않습니다. 그러니 비전공 독자가 이제 와서 이 책을 굳이 찾아 읽을 이유는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사료로서가 아니라, 분석의 대상(텍스트)으로서의 소설, 사진, 영화, 만화, 온라인콘텐츠에 대해 여전히 적절한 수준의 방법론을 가지지 못한 역사학에게는 (이하나, 「한국 공공역사 연구의 가능성과 지향」, 『역사비평』 148, 2024.) 아직 이 책이 필요해보입니다. 게다가 이 책이 나온 이후로 사료와 텍스트의 범위는 더 확장되었기에 비평에 대한 고민은 더 깊게 요구될 겁니다. 유튜브의 대중화와 '짤meme'의 범람은 역사학이 그간 묵수했던 ..

책을 읽으면서 적잖이 당황했습니다. 사회적 소수자에 대해 아주 모르는 것은 아니라고 내심 자부하고 있었는데, 미등록이주민에 대해서는 정말 아무 것도 몰랐다는 것을 이 책을 읽고서야 깨달았습니다. 저는 미등록이주아동이라고 하면 그저 불법체류자가 낳았기 때문에 교육이나 의료에 대해 아무런 권리도 누리지 못하는, '서류상으로 존재하지 않는' 아이들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저의 생각은 한참이나 부족하고 왜곡된 것이었습니다. 무엇보다 미등록이주아동이 고등학교까지 다닐 수 있다는 것도 몰랐습니다. 고등학교까지라도 다닐 수 있으니 다행이라는게 아닙니다. 미등록이주아동은 그렇게 평범한 모습으로 제 주변에 이미 오래 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저는 그제서야 깨달았다는 겁니다. 하긴, 제가 무심코 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