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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g君 Blues...
(...) 홍명희의 독서는 완독完讀과 남독濫讀의 책 읽기였다. 일단 그는 책을 한번 집어 들었으면 끝까지 보고야 말았다는 점에서 완독을 지향했다. 중간에 필요 없는 내용이 있다 하더라도 그 책을 다 읽기까지 다른 책은 거들떠보지 않았다. 재미있는 책은 재미있는대로, 재미없는 책은 다른 재미있는 책을 얼른 읽기 위해 악을 쓰고 빨리 보았다. (...) (18쪽.) (...) 근우회를 새롭게 이끌게 되면서 그는 식민지 조선의 여성혐오와 맞서 싸웠다. 그 당시 언론은 공공연하게 '구여성'을 계몽의 대상이자 불쌍한 존재로, '신여성'을 풍자와 오락거리로 삼았다. 이 가운데 '취미 잡지'를 표방한 《별건곤別乾坤》은 신여성의 사생활과 여성운동을 조롱하는 일에 앞장섰다. 가령 두창의 후유증으로 얼굴에 곰보자국이 남아..
진주를 떠나 산 것도 벌써 20년이 넘었다. 공익근무요원 시절을 포함해도 전체 인생의 절반 가까이를 타지에서 살았으니 진주 사람이라는 정체성도 많이 옅어진 셈이다. 그래도 여전히 진주 사람이 쓴 책을 보면 괜히 반갑고 관심이 간다. 진주 말을 살려 쓴 책이면 더 그렇다. 구어(口語)로만 쓰던 사투리를 문어(文語)로 옮기면 어딘지 모르게 오글거리고 간지러운 느낌이 든다. 처음에는 그 느낌이 그렇게 싫었는데, 언제부턴가 그 오글거리고 간지러운 느낌이 나쁘지가 않다. 『빅토리 노트』는 진주 태생인 이옥선이 쓴 육아일기를 살짝 다듬고 거기에 지금 시점에서의 느낌을 보태서 낸 책이다. 아마 이 책에 대한 거개의 감상은 5년 간의 육필 육아일기라는 것 혹은 김하나 작가의 유명세에 맞춰져 있겠지만 육아의 경험이 없는..
정찬의 소설을 읽을 때는 마음의 준비가 많이 필요하다. 죄의식이나 역사적 책임감 같은 것을 느끼는 거야 다른 소설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지만 그의 소설은 그런 감정이 주는 무게감을 어떻게 하면 더 절실히 드러낼 것인가에 집중하는 듯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때로는 그의 글이 너무 추상적으로 느껴지기도 하고 그의 글이 가진 무게감에 괜히 나까지 짓눌려서 호흡이 곤란해지는 것 같은 느낌도 든다. 그래서 그의 글을 읽을 때 마음의 준비가 많이 필요하다는 것이고, 책을 다 덮고나도 그 무게감에 한동안 멍-한 느낌이 가시질 않는다. 정찬의 소설에서 이제는 좀, 뭐랄까, 적극적인 실천과 분투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은 마음이 있다. 실천하고 분투한다고 해서 답답한 현실이 바뀌는 것은 아니지만, 실천하고 분투하는 그 자체..
적어도 탕수육에게 중일전쟁은 역사의 공백처럼 남아있습니다. 중고등학교에서 배웠던 중국근현대사는 1911년 신해혁명으로 끝났고, 이후 독립운동 과정에서 몇 차례 등장하다가 1949년 공산주의 혁명과 뒤이은 한국전쟁으로 다시 제 시야에 들어오기 때문에 신해혁명부터의 40여 년간 군벌의 할거와 중일전쟁에 대해서 제가 아는 것은 극히 적습니다. 그나마 읽은 책도 『장개석은 왜 패배하였는가』와 『왕징웨이 연구』 정도입니다. 그런데 하필 두 책이 국공내전에서 국민당의 패인을 분석하거나 국민당 출신의 괴뢰정부 수반인 왕징웨이를 다룬 탓에 중일전쟁 과정에서 국민당의 역할에 대한 저의 인상은 극히 부정적입니다. 마오쩌둥이 이끄는 공산당군에게 희대의 역전패를 당한 것도 모자라 대만으로 넘어간 후에는 2.28 같은 짓거리나..
제목에 'XX성'이라는 말이 들어 있으면 일단 거리를 두게 된다. 'XX성'으로 표현되는 개념 치고 난해하고 추상적이지 않은 것이 없는데 내가 그런 내용에 유독 취약하기 때문이다. (철학 다중전공을 포기한 것도 대략 그 때문이지.)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이 저자가 그렇게 추상적이고 난해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약간 의아하기도 했다. (저자 본인은 모르시겠지만 꽤 오래 전부터 지켜보고 있다... 아니, 그렇다고 스토커는 아니고;;) 이 책에서 말하는 연속성과 교차성이란 사실 대단히 까다로운 개념이 아니고, 사회를 변혁시키는데 있어서 여러 층위의 모순과 질곡에 연속적이고 교차적으로 맞서싸워야 한다는 의미이다. 아니, 그건 너무 당연한 거 아니야? 라고 되물을 사람이 있겠지만 그간 한국의 변혁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