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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g君 Blues...

저는 역사학 연구자가 늘상 의식해야 하는 것 중 하나가 '윤리'라고 생각합니다. 역사학의 본질이 과거에 있었던 일을 현재에 재현하는 것이라면, 그리고 그 재현의 결과인 글이 세세만년 남는 것이라면, 연구자는 한순간도 윤리의 문제를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글을 쓴다는 것은 일종의 '권력'이기도 합니다.) 혹시라도 내 생각과 내 글이 누군가를 대상과 수단으로만 보고 있지는 않은지, 그 역시도 나와 똑같은 인격체이자 동료시민이라는 점을 망각하지는 않았는지, 그리고 앞으로도 그러할 위험은 없는지, 늘 긴장해야 합니다. 사회적 참사 생존자와 사회적 소수자를 오랫동안 연구하고 또 연대했던 보건학자 김승섭의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공부』에는 그러한 긴장이 가득합니다. 누구보다 사회적 문제에 관심이 많고 ..

역사학은 과거를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하지만 지나간 과거를 직접 들여다 볼 수는 없지요. 과거를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과거가 남긴 흔적인 '사료史料'를 통해야만 합니다. 하지만 사료도 과거를 온전히 보여주는 것은 아닙니다. 사료를 통해 과거를 살피는 것은 흡사, 안주접시에 담긴 북어포를 보며 명태 어군이 헤엄쳐 다니는 동해바다를 상상하는 일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역사학 연구자는 늘 사료에 목이 마르지요. (반대로 가장 기쁠 때는 사료 찾았을 때 ㅋㅋㅋ) 기본적으로는 문헌으로 남은 것이 가장 주된 사료가 되겠습니다만, 역사학 연구자는 비석에 새겨진 글귀나 구전된 이야기, 땅에 묻힌 유물과 유적 등 과거에 접근할 수 있는 수단이라면 무엇이건 가리지 않습니다. 그러니 역사학 연구는 과거에 접근할 수 있는 더 많..

한 200년 쯤 뒤에 어떤 역사학자가 90년대 말 이후의 한국 사회를 연구하면서 "많은 대학생들이 노량진으로 갔다"라는 문장을 만났다고 가정해봅시다. 지금의 우리는 저 문장을 대번에 이해할 수 있습니다. IMF 이후 직업의 안정성이 무엇보다 중요해지면서 많은 젊은이들이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게 되었다는 뜻이죠. 하지만 90년대 말 이후의 한국 사회를 모르는 사람이 저 문장을 읽으면 그 뜻을 전혀 이해할 수 없을 겁니다. 상상도 못한 아주 엉뚱한 해석을 내놓을 수도 있습니다. ㅎㅎㅎ 역사를 연구한다는 것이 대체로 이러합니다. 단순히 사료史料를 읽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을 때가 많죠. 사료의 겉면만으로는 읽어낼 수 없는, 사회 전반의 분위기나 전제들을 알아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한문이 말하지 못한 한..

1923년 9월 1일 낮, 대규모 지진이 일본 간토지방을 강타했습니다. 지진 자체도 문제였지만 지진이 하필이면 점심시간에 일어난 것도 비극이었습니다. 불을 피워 식사를 준비하던 중이라 지진이 화재로 이어진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수없이 많은 인명과 재산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그런데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비극 앞에 흉흉해진 마음이, 서로 달래고 도우며 진정되기보다는 사회적 소수자들에 대한 분노와 폭력으로 분출되었습니다. 일본으로 이주했던 조선인과 중국인을 비롯해 평소부터 일본 우익과 군부가 눈엣가시로 여겼던 사회주의자나 무정부주의자 등이 그 대상이었습니다. 그 결과 최소 수천 명이 살해당하는 최악의 학살이 자행되었습니다. 이게 우리가 아는 '간토대학살'입니다. 그런데 약간 의아한 것이 있습..

이 책의 성취는 무엇보다 한국현대사 연구에 '난민'이라는 화두를 던졌다는 점에 있습니다. '난민'은 본래 삶의 터전에서 유리(流離)된 존재인 동시에 정착이라는 명목으로 동원되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국민국가의 안과 밖에 모두 걸친 존재라는 말이지요. (그래서 제목에 "경계"가 들어갔겠죠.) 그말인즉슨 '난민’ 개념이 한국현대사의 어떤 측면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무척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물론 다만 이 개념은 김아람 선생님이 이제 막 화두로 던진 것이라 '난민' 개념의 정확한 의미와 범위는 후속 연구를 통해 더 다듬어져야겠지요.) 하지만 혹자에게 이 책은 딱히 새삼스럽지 않은 것처럼 느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국가폭력을 폭로하거나 역사 속에서 소외되고 배제되었던 존재들을 발굴하는 연구가 아주..

근대 국가에서 '인구'란 단지 여러 사람을 뜻하는 집합명사가 아닙니다. 국부의 증대를 위해 인구 관리의 필요성을 인식한 중농주의 이래로 인구는 자연적 현상이 아니라 권력이 개입하여 조정할 수 있는 통치의 대상으로 간주되었죠. 물론 ‘권력’ 같은 거창한 표현을 빌리지 않더라도 국가의 정책 수립과 집행을 위해서는 인구에 대한 정확한 파악과 관리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러니 본격적인 경제개발계획을 모색하던 1960년대에 가족계획을 통해 인구를 통제하겠다는 발상이 시작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말은 이렇게 쉽게 하지만 1960년대 이후 가족계획의 역사에도 온갖 우여곡절이 많았습니다. 피임으로 산아를 조절한다는 것은 전통적 농경사회의 관념에 배치되는 데다가, 피임 방법을 알려주는 것 역시 여러 가지 현실적..

델리아 오언스가 쓴 '가재가 노래하는 곳'을 읽었습니다. 성장소설로나, 스릴러소설로나, 경이로운 자연풍경에 대한 묘사로나, 대체로 다 만족스럽습니다. 책장이 잘 넘어갑니다. 카야는 갈수록 아무하고도 말을 섞지 않고 갈매기한테만 이야기했다. 아버지한테 배를 사용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으려면 어떤 거래를 해야 할까 고민이었다. 습지에 나가면 깃털과 조개껍데기를 모으고 가끔은 그 소년을 볼 수도 있을 텐데, 카야는 친구를 가져본 적은 없지만 친구가 왜 필요한지는 알 것 같았다. 매혹적인 이끌림이 느껴졌다. 강어귀도 함께 돌아다니고 소택지를 샅샅이 탐험할 수도 있을 것이다. 소년은 카야를 그저 꼬마라고 생각할 테지만, 습지를 빠삭하게 꿰고 있으니 데리고 다니면서 가르쳐줄지도 모른다. (69쪽.) 다음 날은 보통 ..

역사학은 여러 전문분야 중에서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것 중 하나입니다. TV와 스크린에는 역사를 소재로 한 드라마와 영화, 다큐멘터리가 넘쳐나고, 서점에는 소설과 만화가 가득하며,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박물관 혹은 문화재 안내판이 심심찮게 보입니다. 솔까말, 과거를 다루기만 하면 거의 다 '역사'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습니다. 역사가 소수의 역사학자만의 전유물이 아닌지는 한참 됐습니다. '공공역사public history'라는 개념은 이처럼 학계 바깥에서 이뤄지는, 역사를 소재로 한 일련의 실천들을 지칭합니다. 그러다보니 공공역사의 범위는 무척 다양하고 넓을 수밖에 없고 그것을 단번에 아우르기도 쉽지 않습니다. 한국인 저자에 의해 쓰여진 첫 공공역사 책인 『공공역사를 실천 중입..

매년 보는 한가위 보름달이 조금 지겹게 느껴진다면 망원경을 이용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망원경으로 보면 같은 보름달도 새삼스럽다. 보름달에 방아 찧는 토끼가 보였던 것이 실은 달 표면의 높낮이와 밝기 차이로 인한 파레이돌리아(pareidolia, 자연이나 사물에서 익숙한 패턴을 찾아내는 심리 현상으로, 변상증이라고도 한다)라는 것도 알 수 있다. 역사도 이와 비슷해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역사적 사건도 새로운 렌즈를 들이대면 전에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일 때가 있다. 대표적으로 ‘지역’이라는 렌즈가 있다. ‘한국사’의 범위를 ‘한국’ 대신 ‘지역’으로 좁혀보자.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한국전쟁은 1950년 6월25일 새벽에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시작되어 1953년 7월에 끝난다. 하지만 당시 경남 하동..

이 책은 목차부터 독자의 고개를 갸우뚱하게 합니다. 영화에 대한 책이라면, 게다가 그것이 저자의 첫 책이라면, 으레 등장할 법한 유명한 영화들이 이 책에는 거의 등장하지 않습니다. 물론 기본적으로는 다 권할만한 영화겠지만, 저 같은 영화 문외한으로서는 제목조차 처음 들어본 영화가 반절 이상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 책은 영화를 소재로 하지만 본격적인 평론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영화의 만듦새에 대한 이야기도 거의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영화를 소재로 하여 풀어놓은 자기 이야기가 더 많죠. 〈결혼 이야기〉를 보고 나서 자신의 결혼 생활을 이야기하거나, 〈판타스틱 소녀 백서〉에 자신의 10~20대 시절 이야기를 보태는 식입니다. 그러니 저도 자연스레, 저희에게 역사책이란 무엇인가, 하는 고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