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2019/02 (17)
Dog君 Blues...
식사를 마치자 남자는 소년을 데리고 다리 밑의 자갈이 깔린 곳으로 갔다. 남자는 물가의 얇은 얼음을 막대기로 밀었다. 남자는 무릎을 꿇고 앉아 소년의 얼굴과 머리카락을 씻겨주었다. 물이 너무 차서 소년이 울음을 터뜨렸다. 그들은 자갈을 따라 내려가 깨끗한 물을 찾았다. 남자는 다시 최선을 다해 소년의 머리를 감겨주었으나 소년이 차가워서 신음을 토하자 결국 그만두고 말았다. 남자는 불빛을 받으며 무릎을 꿇고 담요로 소년의 머리를 말려주었다. 교각의 그림자가 개울 건너 말뚝 같은 나무줄기들 위에서 부서졌다. 이애는 내 아이야. 남자가 말했다. 나는 내 아이의 머리카락에서 죽은 사람의 뇌를 씻어내는 거야. 이건 내가 할 일이야. 이윽고 남자는 소년을 담요로 싸서 안고 불가로 데려갔다. (86쪽.) 도랑에서 부..
1-1. 나 스스로를 경계하는 편이다. 나는 내가 가진 습관과 기호가, 사회적 통념에 다소 어긋난다고 생각한다. 사람을 만나고 대화하고 교감하는 능력도 많이 부족하다. 1-2. 숫자에 대한 가벼운 강박이 있다. 라디오 볼륨을 19나 23으로 하는 경우는 잘 없다. 트레드밀 위에서 2.47km만 뛰고 내려오는 일도 잘 없다. 27은 만화에 나오는 전투기의 뾰족한 수직미익垂直尾翼처럼 느껴진다. 49는 귀퉁이가 한 칸 빠진 8~12칸짜리 큐브 같아서 찝찝하고, 반대로 51은 작은 꼬다리 같은 것이 튀어나온 매끈한 직육면체 같다. 깎아내건 채워넣건 뭐라도 하고 나면 마음이 한결 편해진다. 1-3. 물건에 대한 강박도 있다. 책은 무조건 키 순서로 꽂아야 하고, 가능하면 출판사 별로 모아두기도 한다. 연필은 최대..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놈이 있다. '나'라는 놈 안에 있는, '시커먼 것'이라고나 할까, 뭐 그런 놈이 있다. 스무살 이후의 내 삶은 그 '시커먼 것'을 관리하고 이겨내기 위한 노력의 과정이었다. 억지로 눌러놓기도 하고 잘 달래기도 하면서 지금까지 살고 있다. (물론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내가 잘나서가 아니다. 전적으로 친구들 덕분이다. 나를 믿고, 기다려주고, 격려해주는, 좋은 친구들. 평생을 갚아도 다 못 갚을 빚이라고 생각한다.) 그 '시커먼 것'은 주기적으로 고개를 드는데, 꽤 여러 모습으로 나타난다. 지극한 자기 모멸감이기도 하고, 극단적인 외로움이기도 하고, 엄청난 의욕상실이기도 하다. 대체로는 우울증으로 귀결되는데, 순간적으로는 자살충동 같은 것이 되기는 한다. 물론 '순간적'이라서, 크게 문..
누가 보건 말건 그저 나 하나 재미있자고 쓰는, 그래서 문장도 개판이고, 그런데 퇴고도 제대로 안 하고 막 쓰는, 잉여력 터지는 역사학도의 판문점 TMI 시간, 오늘이 마지막입니다. 지난 시간에 휴전협정 조인 이후에 살짝 반전이 있다는 것까지 말씀을 드렸죠. 그 반전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휴전협정 조인식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네, 바로 이 사진이 휴전협정 조인 당시의 모습입니다. 교과서에도 나오고 관련 연구서에서도 많이 인용되기 때문에 우리에게 무척 친숙한 사진입니다. (이 사진에 대한 상세한 정보는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이 때 휴전협정을 조인했던 건물은 사실 휴전회담을 벌였던 그 건물은 아닙니다. 휴전협정 조인을 위해서 별도로 더 큰 건물을 따로 지었고, 바로 거기에서 휴전협..
한가하고 게으른 역사학도의 잉여력 터지는 TMI 시간. 오늘은 판문점이 휴전회담 장소가 된 이유를 찾아갑니다. 1950년 6월 25일에 발발한 한국전쟁의 초반, 전선戰線은 매우 드라마틱하게 변했습니다. 남과 북 양측 모두 각자를 패배 직전까지 몰아넣었고, 인천상륙작전과 중국군의 참전으로 전황이 거듭 뒤집히기도 했으니까요. 하지만 1951년 중반 정도부터는 전선戰線이 지금의 휴전선 부근에서 교착된 채로 일진일퇴의 공방전만이 거듭됩니다. 양측 모두 상대를 압도할 수 있는 역량이 없었기 때문이겠죠. 그리고 이런 상황은 자연스럽게 휴전회담 논의로 이어졌구요. 휴전회담 장소로 처음 고려된 곳은 덴마크 국적의 병원선 유틀란디아(Jutlandia)였습니다. 덴마크는 UN군의 일부로 남한 측을 지원하고는 있었지만 인도..
지난 시간에는 ‘판문점’이라는 표기가 1951년 이전부터 사용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자료를 통해 밝혔습니다. 그렇다면 '‘판문점’이라는 지명은 1951년에 휴전회담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다'라는 말은 대체 어디서 나온 걸까요. 2편에서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보도록 하겠습니다. '‘판문점’이라는 지명이 1951년 휴전회담 과정에서 만들어졌다'라고 서술하는 책들은 한결같이 하나의 근거를 지목합니다. 바로 1995년에 남북회담사무국에서 펴낸 『판문점수첩』입니다. 바로 이 책 8쪽에서 관련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데요, 원문을 그대로 옮기면 이렇습니다. 새로운 회담장은 널문리의 점막(店幕) 앞 콩밭에 지어졌다. 그런데 새로운 휴전회담의 장소가 된 「널문리」를 중국측이 한자로 표기할 수가 없어 회담장소인 널..
2018년 4월 27일,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판문점에서 만났습니다. 분단이 시작되었던 바로 그 장소에서, 분단을 끝낼 방법을 논하는 두 정상의 모습은 역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의미가 깊었습니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전쟁을 하니 마니 하는 소리가 오갔던 것을 생각하면, 더 그렇습니다. 저 역시 한창 업무시간 중이었는데도 불구하고 한쪽 귀로 정상회담 중계를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저처럼 통일이나 민족 같은 가치에 대해서 시큰둥한 녀석에게도 남북의 정상이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은 그렇게나 벅찬 것이었습니다. ...만 개인적인 감상을 끄적이는 것은 이 글의 목적이 아니므로 개인적인 감회는 여기서 각설하고. 남북정상회담만큼이나 세간의 주목을 받은 것은, 남북정상회담의 무대였던 판문점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