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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g君 Blu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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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를 물리적으로 대하는 태도에서 시작해서, 사료를 역사학적으로 대하는 태도에 대한 이야기까지 이어진다. 아카이브 작업을 직업의 일부로 삼은 역사학 연구자라면 누구나 공감할만한 책이다. 대중적으로 반향을 얻을만한 책은 아니지만 사료 앞에 섰을 때의 막막함을 느껴본 (즉, 글쓰기의 고통에 시달려본) 역사학 연구자에게는 깊숙한 공감을 얻을만하다. 한여름에 만져도 얼음처럼 차갑다. 눈이 해독하는 동안 손은 점점 얼어붙어 간다. 손끝은 양피지 아니면 래그 페이퍼의 차가운 먼지로 점점 검어진다. 꼼꼼하고 가지런한 글자들로 차려입었지만, 미숙련자의 눈으로는 거의 해독 불가능하다. 열람실 책상에 등장할 때는 대개 두툼한 종이 뭉치의 모습을 하고 있다. 허리 부분은 가는 끈으로, 아니면 굵은 띠로 묶여 있고, 모서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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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피셜 하지들 마시라고 역사학에서 그렇게나 연구해놨는데 이렇게 뇌피셜로만 점철된 책이 아직도 나오고, 심지어 잘 팔리기까지 하니 마음이 영 언짢다. 세대론 관련해서는 사둔 책도 안 읽을 확률이 100%가 되었으니 어디 내다 팔든가 해야겠다. 이제부터 나는 쌀로, 더 정확히는 쌀을 재배하는 문화와 시스템으로 많은 것을 설명할 것이다. 바로 '쌀 이론rice theory'의 수립이다. (...) 나는 쌀 이론을 통해 오늘의 한국 사회의 구조와 그 부산물들을 파헤칠 것이다. 그 목록은 위계 구조와 불평등, 불평등에 대한 인식, 급속한 경제 발전, 협력과 경쟁의 공존, 행복과 질시, 교육열과 사회이동, 노동시장 구조, 성차별, 연공 문화의 존속 그리고 소통의 문화까지 포괄한다. (48쪽.) 나는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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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가 어쩌고 저쩌고 하는 책 치고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마음에 드는 것이 없다. 저자는 아마도 90년대 후반 언제쯤 한국을 떠나서 얼마 전에 한국에 돌아오신 것 같은데, 생각이 딱 그 때에 멈춰계신 듯. 글쎄, 더 이상은 논평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겠다. (...) 한국 사회에서 '세대'란 역사적 경험과 기억을 공유하는 집단 그 이상의 것, 즉 '자원 동원 네트워크'를 의미한다. 네트워크를 통해 정보와 자원을 주고받는 '품앗이 네트워크'로서, 다시 말해 '경제 공동체'란 이야기다. (...) (33쪽.) 산업화 세대가 경제성장의 수혜를 40대에 진입하면서 최초의 자산 축적을 통해 경험했다면, 386세대는 70~80년대를 한층 넉넉해진 가정경제, 넘치는 일자리, 더 늘어난 계층 상승의 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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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황정은을 두고 리얼리즘이라는 평을 들었던 것 같다. 문학이나 예술을 하나도 모르는 나는 리얼리즘이란 대체로 세상의 참혹함을 있는 그대로(real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라는 뜻 정도로 이해한다. 그래서 리얼리즘에서 보여주는 세상이란 황폐하고 희망 없는 공간이기 마련이고, 책/화면/캔버스 속으로 최대한 비집고 들어가도 결국에는 지금 내가 속한 세상과 별반 다를 것 없는 세상이 또다시 펼쳐지는 것 같다. 평소에 느끼는 것을 그대로 또 느끼는 뭐 그런 느낌적인 느낌. 그래서 다 읽고/보고 나면 어딘지 모를 불편함과 막막함만 남는 것 같다. 그런데 그게 현실(real)인 것을 어쩌겠나 싶다. 역사에서 보는 세상이 대체로 그러하다. 언제나 현실은 악독하고 냉정하다. 때로는 보통 사람조차도 다시 없을 악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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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조작한 것이 아닙니다. 남이 대신 뛰어준 것도 아닙니다. 한 번에 10km 뛰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어쩌다 맑은 날 아침마다 몇km씩 모았습니다. 이렇게 몇백km를 뛰어 마일스톤 하나와 바꾸었습니다. 이러기를 몇번을 하여 겨우 이 귀한 '블랙 레벨'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걸 얻느라고 일 년 다섯 달이 더 걸렸습니다." 4월 20일 아침의 일이다. 첫 2,500km를 뛰는데는 1년 5개월이 걸렸는데, 다시 2,500km를 더 뛰는데는 2년 6개월이 걸렸다. (학위논문 쓰느라 그랬나.) 다른 사람에 비길만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기쁘다. 잘 할 자신은 없지만 오래 할 자신은 있다. 그리고, 달리기 속도도 추가. 바로 앞의 글에서 달리기 능력이 속도가 거의 초기화되었다고 했는데 그리고 석달 가까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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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런던에서 머물던 나의 주요한 일요일 일정은 교회에 갔다가 H마트에 들러 일주일 먹을 식료품을 사오는 것이었다. 라면 두어개에 계란, 그리고 밑반찬 몇 가지를 사오곤 했고, 가끔 내키면 데우기만 하면 되는 닭강정이나 탕수육도 사왔던 것 같다. 하지만 체류기간이 짧아서 그런지 한국 음식에 대해 대단히 특별한 애착이 있어서 그랬던 것은 아니고 그저 익숙한 것을 계속 하고 싶었던 내 특유의 보수성 때문이었던 것 같다. (실제로 평일에는 하루 세끼 중 두끼는 토스트나 샌드위치로 때웠으니까.) 그럼에도 우리는 음식을 통해 특별한 애착을 표현하곤 한다. 한국전쟁 통에 강제징집당한 후 영영 만나지 못한 자식에 대한 한의 표현은 종종 '따시게 밥이라도 한 그릇 먹여 보낼걸'이고 가족을 뜻하는 말 중 하나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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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사에 대해서는 쥐뿔도 아는 것이 없으니 그저 밑줄 그으며 사실관계부터 배운다는 느낌으로 읽었다. 이 책에 따르면 치우는 애초 역사적 실체라기보다는 중국 외부로부터의 위협이라는 관념으로부터 비롯한 것 같다. 또한 치우를 동이족과 연결시키려는 시도는 그 학문적 연원이 의심스러운 것이며, 치우의 역사적 실체를 인정하는 것은 먀오족을 포섭하려는 중국의 애국주의적 역사관의 일환이라는 것도 배웠다. 그렇다면 결국 치우를 상징으로 내세운 한국의 사이비 역사학은 기실 중국의 애국주의 역사관의 파생물이자 공생관계에 있는 셈이다. (...) 서주는 무기와 예기를 제작하는 데 필수품인 청동 원료를 확보하고, 제후로서 예를 다하지 않는 초나라를 덕을 실행한다는 명목으로 정벌했는데 이러한 내용이 〈여형〉편에 황제가 치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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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감이 독백이라면, 서평은 대화입니다. 독후감은 독자가 없어도 됩니다. 혼자 쓰고 끝내도 상관없지요. 감정을 풀어 놓기만 해도 충분합니다. 반면 서평은 이를 읽어줄 독자가 필요합니다. 서평의 독자는 서평에 반응합니다. 즉 서평의 주장에 동의하거나 반대하게 됩니다. 이것이 서평을 쓰는 이와 서평을 읽는 이의 대화입니다. 서평을 쓰면서 서평의 독자를 염두에 두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독자를 설득하고자 성찰하며 언어와 논리를 구성하고 배열해야 합니다. 이를 통해 성찰은 정련되며, 정신의 성숙을 이루기도 합니다. (...) 서평은 서평에서 다루는 책에 대한 성찰을 전달합니다. 서평을 쓰는 이의 사유가 서평을 통해 공유됩니다. 이러한 공유는 대화적이지요. 누군가가 내가 쓴 서평을 읽는다고 끝이 아닙니다. 책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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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과와 이과로 크게 나뉘는 한국의 교육체계를 기준으로 하면 나는 과학과는 퍽 거리가 먼 사람이다. (과학의 언어라고 할 수 있는) 수학을 2차함수에서 포기한 것을 시작으로 해마다 물리-화학-지구과학-생물 순으로 한 과목씩 포기하면서 어른이 됐기 때문이다. 그랬던 내가 몇 년 전부터 과학책에 손을 대고 과학 팟캐스트를 즐겨듣게 된 건 꽤 놀라운 일입니다. 아마도 시험의 압박이 없다는게 가장 큰 이유일 거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과학을 알면 내 주변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제가 누리는, 실내난방을 하고 스마트폰을 보고 컴퓨터를 사용하는 보통의 일상 대부분이 과학의 발전 덕분에 가능한 것들이니까. 그런 점에서 이 책이 주는 즐거움은 무척 크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지금 우리가 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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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마치 한강이 그러하듯) 두 개의 물줄기에서 발원했다. 이 책의 북한강은 광해군에 대한 기존의 연구들이다. 광해군이라는 인물과 그의 시대에 대해서는 이미 수없이 많은 연구가 이뤄졌지만 그 중에서도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것은 한명기와 오항녕의 책인 것 같다. 한명기의 관점이 대중문화와 상식 선에서 가장 지배적인 관점이라고 할 수 있겠고, 오항녕의 책이 이에 대한 안티테제를 제시하여 지배적인 통설이 수정되는 중이라고 하겠다. 기존의 두 관점이 정과 반의 관계라고 할 때, 이제 슬슬 합이 나올 때가 되지 않았나 싶은 시점에 이 책이 나왔다. 계승범은 기존의 두 관점이 광해군 개인에 대한 평가에만 집중한다고 비판한다. 그렇다면 광해군의 치세가 조선사회의 전체적인 흐름에 있어서 어떠한 위치를 점하는지에 ..